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135화 (135/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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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아데스덴의 보물 (2)

어차피 요란스럽게 왕도에 입성하는 건 그 역시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떠들썩한 승전식은 그에게 영 불편하기만 했다. 그런 면에서 테오도르 국왕의 지시는 오히려 반길만한 일이었다.

다만 그 꿍꿍이가 뭔지 알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을 뿐이다.

“국왕 폐하의 명령이라….”

아무래도 이 난데없는 지시의 저의를 알려면 당사자를 만나야 할 것 같았다.

“혹시 여기까지 오는 길에 따로 만났다거나, 연락을 한 분이 계십니까?”

압실링거 드나우 레버쿠젠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하늘을 통해 이동한 그가 다른 이들과 마주칠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혹시라도 괴수를 보고 사람들이 놀랄까 염려해 휴식마저 마을이 아닌 평원에서 노숙하는 식으로 해결했으니 그가 왕도로 향했다는 사실은 오직 라인펄 영지의 사람들뿐이었다.

“다행입니다.”

짧게 안도의 말을 남긴 중년의 기사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뭔가 상황이 복잡한 모양이군요.”

기사는 대답 대신 레드번을 눈짓했다. 그 모습이 마치 일단 눈에 띄는 괴수부터 먼저 치우고 이야기를 하자는 것처럼 보여 그는 레드번에게 명령했다.

“다시 부를 때까지 눈에 띄지 않게 있어.”

물끄러미 주인을 바라보던 레드번이 훌쩍 날아오르더니, 순식간에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이제 됐습니까?”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전 대륙에 유일한 와이번 라이더신지라, 단순히 와이번을 목격했다는 것만으로도 행보가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서 말입니다.”

그렇게 말한 중년의 기사가 칙칙한 빛깔의 로브를 건네주었다.

“불편하시더라도 도착할 때까지는 얼굴을 가리고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김선혁은 건네받은 로브를 머리끝까지 둘러썼다. 뒤를 돌아보니 아샤 트레일과 줄리앙도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왕가 수호대가 준비해두었던 말에 올라탄 김선혁은 그들을 따라 이동을 시작했다.

**

왕성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김선혁은 일행과 떨어져야 했다.

“트레일 경. 줄리앙을 잘 부탁드립니다.”

아샤 트레일은 대답 대신 어린 종자의 손을 꼭 잡아 보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종자를 많이 아끼시는군요.”

기사들의 안내를 받아 어딘가로 향하는 일행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이제껏 묵묵히 걸음만을 옮겨온 압실링거 드나우 레버쿠젠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착한 아이거든요. 유능하기도 하고.”

게다가 자신으로 인해 성장이 멈춰버리는 후유증이 생겨버린 가엾은 아이이기도 했다. 그래서 근래 들어 부쩍 걱정이 늘고 신경이 쓰이는 와중이었다. 사실은 자신보다 몇 배는 강하고 씩씩한 줄리앙인데 말이다.

“그렇군요.”

그저 지나가는 말이었는지 중년의 기사는 더 이상 줄리앙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쪽으로.”

김선혁은 언젠가 왕녀와 티타임을 가졌던 왕성의 내원마저 지나 보다 깊은 곳으로 안내되었다.

“음….”

어느 순간이 되자 내원을 오고 가던 시녀들의 모습도 사라지고 요소요소에서 눈을 번뜩이며 경계를 서던 기사들도 이제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내원 깊숙이 그를 안내한 압실링거 드나우 레버쿠젠이 양해를 구했다. 그는 그러마 하고 대답을 해주었고, 중년의 기사는 곧 그를 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음.”

잠시 왕가 수호대의 기사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김선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담스럽게 꾸며진 정원은 조용했고 인기척조차 보이지 않아 마치 세상에 혼자만 존재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무방비하게 방치된 정원이야말로 여태 지나온 그 어떤 곳보다 경비가 삼엄한 곳임을 알고 있었다.

정원 곳곳에 모습을 드러나지 않은 기척이 수십이었다. 풍령이 아니었다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감시였다.

김선혁은 직감적으로 이곳이 왕가에게만 허락된 내원에서도 가장 깊은 심처임을 깨닫게 되었다.

끙. 대체 무슨 용건이길래.

괜스레 불안한 마음에 발끝으로 애꿎은 땅만 차댔다.

“드라흔 경.”

잠시 시간이 흐르고 사라졌던 왕가 수호대의 기사들이 돌아왔다.

“국왕 폐하께서 곧 당도하실 겁니다.”

김선혁은 로브를 벗고 차림새를 정돈했다. 잠깐 텀을 두고 저 멀리서 테오도르 국왕이 몇몇 기사들을 대동한 채 모습을 드러냈다.

“선혁 라인펄 김 드라흔이 아덴버그의 하나뿐인 지배자이시자, 아데스덴의 피를 물려받으신 테오도르 티베리우스 로 아데스덴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벌써 몇 번이나 왕족들을 상대하다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왕실의 예법이 몸에 뱄던 모양이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나무랄 데 없는 자세로 아덴버그의 지배자를 맞이하고 있었다.

“통신을 통해 목소리를 종종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는 건 실로 오랜만이구나.”

테오도르 국왕의 존재감은 여전했다. 조용하던 내원이 국왕의 등장만으로 꽉 채워진 듯한 느낌이었다.

“강녕하신 모습을 보니 제 마음이….”

“아아. 익숙하지도 않은 예법을 따를 것 없다. 격식을 차릴 생각이었다면 이곳이 아닌 대전으로 그대를 불러들였을 것이다. 그러니 일어나거라.”

김선혁은 허리를 펴며 씨익 웃어보였다. 변함없이 효율을 중시하는 국왕의 태도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던 것처럼 거북스럽던 기분이 가신 것이다.

“배려 감사드립니다.”

그의 미소를 본 테오도르 국왕이 눈에 이채를 띄었다.

“과연 그대의 기개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구나.”

짧은 감탄을 토해낸 국왕이 말을 이어갔다.

“그대가 요란스러운 허례허식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전쟁 영웅을 이리 환대도 없이 입성토록 한 걸 사과하도록 하지.”

“환대는 바라지도 않았으나, 혹시 이렇게 은밀하게 움직여야 했던 이유가 있는 겁니까?”

테오도르 국왕의 표정에 불쾌함이 서렸다.

혹시나 자신이 갑작스레 끼어들어 질문을 던져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닌가 했지만, 국왕의 성정상 그럴 리가 없었다. 아마도 따로 국왕의 기분이 상한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내가 추진하고자 하는 일이 있는데, 귀족들이 조금 반대를 해서 말이다.”

단도직입적인 말에 김선혁이 다소 놀란 얼굴을 해보였다.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수완으로 노회한 귀족들마저 수족 부리듯 하던 군주가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쳤다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탓이다.

“나는 그대에게 기사된 자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을 약속한 바가 있다. 그대는 충분히 그에 합당한 공을 세웠고 나는 이제 약속을 지키고자 한다.”

아무래도 그 반대라는 게 그 약속한 영광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었던 모양이다. 김선혁은 걱정 반 기대 반의 심정이 되어 가만히 테오도르 국왕이 말을 이어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에 앞서 그대와 먼저 입을 맞춰 둘 필요를 느꼈노라.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가를 제시했는데, 정작 그대가 어깃장을 놓으면 모양새가 우스워질 테니까.”

테오도르 국왕이 잠시 말을 멈추고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또, 또!

마치 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그 투명한 눈동자에 그가 넌더리를 쳤다. 하지만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태연하게 국왕의 말을 기다리는 충실한 신하의 모습을 연기했다.

테오도르 국왕은 한참이나 그를 바라보다 갑자기 껄껄대며 웃기 시작했다.

“과연 내 결정이 옳았다. 지금 그대를 보니 나는 다시 확신하게 되었노라.”

대체 뭐가 그리 흡족한 것인지 국왕의 말과 태도에 기꺼운 빛이 가득했다.

“그대는 영광을 받아들일 자격이 충분하다.”

그렇게 선언한 국왕이 갑작스레 뜬금없는 질문을 던져 왔다.

“혹시 마음에 담아둔 여인이 있는가.”

“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지, 김선혁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로 반문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그가 사과했지만, 국왕은 조금도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게 그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보기와는 달리 영 숙맥이로다.”

국왕의 시선은 과도할 정도로 온화했고, 지나치게 친근했다.

“다시 묻겠다. 혹여 마음을 준 여인이나 혼담이 오고 가는 가문이 있는가.”

그 집요한 질문에 김선혁은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었다. 국왕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 저의를 알 길이 없었다.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따로 마음에 둔 여인은 없는 것이렷다.”

그런 그의 침묵을 멋대로 해석한 국왕이 껄껄거리며 웃어댔다.

“그럼 아무런 문제가 없군.”

“무슨 문제 말입니까?”

그대로 있다가는 왠지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에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그대 드라흔이여.”

하지만 국왕은 의문을 풀어주는 대신, 위엄 가득한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대가 세운 혁혁한 전공은 나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것, 나는 좀처럼 그에 걸맞는 보상을 찾을 수가 없었노라.”

마음 같아서야 그 보상 그렇게 궁리할 것 없이 적당히 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김선혁은 차마 국왕의 말을 끊을 수 없었다.

“하여 나는 몇날 며칠을 밤을 새웠고, 고민 끝에 겨우 합당하다 논할 수 있는 보상을 찾았노라.”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벌도 아닌 상을 받는데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것인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나 테오도르 티베리우스 로 아데스덴은 그대에게 아데스덴 왕가의 보물 중에서도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을 수여하고자 한다.”

보석이라는 말에 김선혁이 남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안도하기에는 너무 일렀던 모양이다.

국왕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는 섣불리 안도했던 스스로를 저주해야만 했다.

“오필리아 라우렐 로 아데스덴, 나의 친애하는 딸이자, 만백성이 칭송해 마지않는 아름다운 왕녀, 그녀야말로 내가 그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니, 그녀를 통해 그대는 아데스덴의 성을 잇게 되리라.”

김선혁은 완전히 얼이 빠져버렸다. 당최 테오도르 국왕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반쯤 넋이 나가버린 그를 보며 테오도르 국왕이 여전히 위엄 넘치는 음성으로 한마디를 보탰다.

“그대를 왕가의 가족으로 맞이하겠다는 말이다.”

**

김선혁은 그 뒤로 국왕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조차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저 정신을 차려보니 왕족에게만 허락되었다는 내성에 마련된 숙소에 머무는 자신을 발견했을 뿐이다.

“이런 미친!”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가 욕설을 내뱉었다.

“미친 거 아냐? 사람이 무슨 물건이야?”

왕도에 올 때면 유달리 말을 아꼈던 김선혁이지만 지금만큼은 예외를 둘 수밖에 없었다.

“무슨 지 딸을 상으로 내려!”

그는 이곳이 왕성 가장 깊숙한 곳이라는 것도 잊고 흥분해서 떠들어댔다.

“그런 꼬맹이랑!”

도대체가 그런 꼬맹이를 두고 아름답네 뭐네 떠들어대는 족속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현대인으로 살아온 그가 보기에 이제 고작 열네 살에 불과한 왕녀는 한참은 더 자라야 하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그런데 제 아비가 그런 어린 딸을 친히 보상이랍시고 주겠단다. 그로서는 황당할 지경이었다.

만약 제안을 한 자가 아덴버그의 정점에 오른 아데스덴의 수장이 아니었다면 그는 가차 없이 상대를 응징했을 것이다. 그만큼 테오도르 국왕의 제안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범죄와도 다름이 없었다.

다소 시간이 흐르자 잔뜩 흥분했던 김선혁은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그는 열넷짜리 어린아이랑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게 될 판국이었다.

‘나는 내일 대소신료들을 한자리에 모아 이러한 결정을 만천하에 공표할 것이다. 그대는 그 자리에 동석하여 감히 귀족들이 그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못하게 하라.’

더욱 큰 문제는 이 추진력 강한 아데스덴 왕가의 수장이 당장 내일 이 사실을 기정사실화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미치겠네.”

결혼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그는 완벽한 혼돈에 빠지고 말았다.

똑똑.

“누굽니까.”

저도 모르게 날이 선 음성으로 질문한 김선혁이 뒤늦게 이곳이 왕족에게만 허락된 구중심처라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누구십니까.”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지독스러울 정도로 딱딱하고 사무적인 음성, 불안한 마음에 문을 열어준 그는 완전 무장한 금갑의 여기사를 보고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왕가 수호대의 상징과도 같은 금빛 갑주를 입은 여기사, 왕성에서도 오직 한 부류였다.

테오도르 티베리우스 로 아데스덴의 하나뿐인 핏줄이자 아데스덴 왕실의 유일한 여성, 오필리아 왕녀의 수호기사들뿐이었다.

“왕녀께서 방문하시기에 앞서 잠시 방을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질문이라기보다는 통보에 가까운 여기사의 말에 그는 자포자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실례했습니다.”

망연자실한 그를 두고 숙소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여기사가 금세 수색을 마치고는 문밖으로 신호를 보냈다.

뚜벅, 뚜벅.

“오랜만이구나.”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새소리 지저귀듯 상큼한 음성이 들려왔다.

“선혁 라인펄 김 드라흔이 왕녀를 뵙….”

반사적으로 예를 표하던 김선혁이 뒤늦게 왕녀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1년 만에 만난 왕녀의 모습이 그가 기억하는 왕녀의 모습과 너무도 달라져 있었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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