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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드래곤 피어 (3)
전쟁터에서 돌아온 영주를 본 순간부터 기사의 피가 들끓었다. 기세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영주는 얼핏 보기에도 전장에서 이룬 성취가 적지 않아 보였다.
아샤 트레일은 영주와 검을 겨루어 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제 막 전장에서 돌아온 이에게 무례하게도 대련을 신청했다. 얼마나 머물게 될지 모를 왕도행 이후로 대련을 미루기에는 영주의 존재감이 너무도 강렬했다.
“뭐, 어려울 것 없지요.”
다행스럽게도 영주는 흔쾌히 자신의 부탁을 수락해주었다. 갑주에 쌓인 먼지만큼이나 두텁게 내려앉았을 전장의 피로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아무래도 전과는 다를 테니.”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창을 잡은 자세부터 시작해서 눈빛까지 뭐 하나 예전과 같은 게 없었다. 영주는 놀라울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저라고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수호 기사의 업무에서 해방된 이후 줄곧 수련에 매진하여 얻은 성취는 결코 적지 않았다. 그녀는 검날 끝에 모여든 찬란한 검광을 보며 다시 한 번 투쟁심을 끌어 올렸다.
“후우. 그럼 슬슬 시작해보지요.”
창끝에 특유의 기운을 휘감은 영주가 창을 콱, 하고 움켜잡았다.
그 순간 영주의 기세가 돌변했다.
이건 대체….
아샤 트레일은 맹세코 이러한 형태의 투기(鬪氣)를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들어본 적도 없었다.
기사의 투기와 기세란 모름지기 오랜 세월 정련하여 벼려낸 칼과도 같은 것, 날카롭지만 은밀한 검이었다.
하지만 영주의 기세는 명백하게 그런 상식을 초월해 있었다.
그의 투기는 눈에 보일 것처럼 선명했고,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역동적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지가 굳고 뒷목이 뻣뻣하게 굳어왔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며 순식간에 입속에 단내가 확, 하고 퍼져나갔다.
저도 모르게 검의 손잡이를 있는 힘껏 움켜잡았다.
또르르.
절대로 살아있을 리 없는 생명도 없는 기세가 눈을 굴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착각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순간 분명 그 정체불명의 무엇과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온몸을 지배했고, 그녀는 그것이 스스로가 일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려움, 공포. 패배감.
수호 기사단의 수장이자 왕국에서도 최강의 검호라 추앙받는 레인하르트 후작과 마주했을 때도 느껴본 적이 없는 두려움, 그녀는 그 순간 주저앉기보다는 차라리 분노했다.
“하아압!”
두려움으로 굳어버린 육신의 통제권을 되찾고 패배감을 떨쳐내는 데는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린 기합 한 번이면 충분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는 비로소 영주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온몸을 찍어 누르는 듯한 강대한 기세는 그대로였지만, 영주의 투기는 더 이상 전처럼 이질적이지 않았다. 단지 유달리 난폭하고 강렬할 뿐이었다.
“아….”
마치 끔찍한 악몽이라도 꾼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영주는 현실이었고, 어느새 코앞까지 짓쳐 든 거창은 실재했다.
쐬에에에엑!
거창 끝에 휘감긴 칼날 같은 바람에 벌써부터 온몸이 저릿저릿해 왔다. 그녀는 마구잡이로 중심을 흔드는 그 광풍 앞에서 검광을 한껏 머금은 칼날을 내리쳤다.
“큭.”
이게 정말로 인간의 힘일까. 공성 병기를 맨몸으로 받아낸 듯한 충격, 굳은살 배긴 손아귀가 단번에 터져 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그 끔찍한 고통과 충격 속에서도 검을 놓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진다.
그녀는 영주의 기세에 압도되어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하고 검에 힘을 불어넣었다.
우우우웅.
경지에 오른 기사의 상징과도 같은 검 울음소리, 그 낮은 울림을 듣는 순간 엉망으로 흐트러졌던 리듬이 마침내 제자리로 돌아왔다.
지지 않는다.
또렷하게 보이는 거창의 궤적을 노려보며 그녀는 벼락같이 검을 휘둘렀다
지켜야 할 누군가를 늘 등 뒤에 두고 있기에 물러섬 따위는 허락되지 않은 수호 기사의 검, 그녀가 일생동안 갈고 닦아온 검세가 거창과 충돌했다.
쾅!
내장이 흔들리는 무지막지한 충격에 그녀는 입술을 짓씹으며 영주를 노려보았다.
영주는 무모할 정도로 과격한 돌격 직후, 필연적으로 올 수밖에 없는 경직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고, 신속하게 발을 내디뎠다.
창을 회수할 시간을 줄 생각도, 거창을 휘둘러 자신을 밀쳐낼 시간을 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다르게 영주는 무방비하지 않았다.
창이 닿는 간격 안은 여전히 그의 지배하에 있었고, 그녀가 발을 내디딘 곳은 휘몰아치는 광풍의 지옥이었다.
“큭.”
순식간에 수십, 수백 가닥의 홈이 단단한 철갑 위에 아로새겨졌다. 드러난 맨살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중심을 잡기도 힘든 끔찍한 칼바람, 그 안에서 그녀는 기어이 한 발을 내디뎠다.
“후읍.”
짧게 들이킨 한줌 호흡에 다소 수그러들었던 검광이 다시금 찬란하게 피어올랐다.
영주가 한 발 물러났다. 하지만 검광을 온전히 피해내기에는 부족한 거리, 그녀는 망설임 없이 칼끝으로 감아치듯 영주의 허리춤을 베어냈다.
**
때아닌 굉음에 놀란 병사들이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후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영주와 여기사의 싸움이 한창 과열된 상태였다.
“오오. 대련인가?”
병사들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 초인들의 대결에 열광했다. 하지만 환호하던 그들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버리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저, 저거 말려야 하는 거 아냐?”
“기사들은 원래 저렇게 대련하나?”
난장판이 되어버린 공터 가운데 끊임없이 공방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이 이미 시뻘건 혈인(血人)이나 다름이 없었다.
“저거 너무 지나친… 으억!”
병사 하나가 말끝에 비명을 내질렀다. 하필이면 그 순간 아샤 트레일의 검이 영주의 어깨를 베고 지나간 것이다. 단숨에 쪼개진 영주의 견갑이 떨어져 내리고, 그 사이로 언뜻 붉은 빛이 보였다.
“설마 트레일 경이 영주님을 시해하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럼 저건 뭔데! 저게 네 눈에도 그냥 대련으로 보여?”
병사는 동료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저 살벌한 싸움 끝에 둘 중 하나가 죽는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쾅!
영주는 간격을 벌려 돌격을 하고, 여기사는 바짝 따라붙어 공격의 기회를 원천차단했다. 쫓고 쫓기는 공방, 그 과정에서 서로가 수도 없는 난타를 주고받았다.
때로는 날붙이로, 때로는 주먹과 팔꿈치로, 공격의 수단은 다양했지만 그 모든 공격 하나하나가 철갑을 으깨고 뼈를 박살 낼 정도로 살벌하다는 것은 동일했다.
“말려야 하는 거 아냐?”
“말려? 무슨 수로?”
멀리 떨어져 있는 와중에도 펑펑 터져대는 충격파에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언감생심(焉敢生心), 말리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원수를 졌길래 저렇게 죽기 살기로….”
“평소에 사이가 안 좋을지도….”
원한이 있지 않고서야 저렇게 죽자고 서로에게 달려들 리가 없었다.
“스콰이어 줄리앙에게 알려!”
상황이 워낙에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말릴 사람을 찾다 보니 영주의 어린 종자에게까지 생각이 미친 모양이다. 병사들이 호들갑을 떨며 줄리앙을 찾았다.
하지만 병사들의 우려와는 다르게 결투는 양쪽 어느 하나 죽는 일 없이 마무리가 되었다.
아샤 트레일의 애병이 거창과의 과격한 충돌을 이겨내지 못하고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쩌어억.
무아지경 상태에 빠져 검을 휘두르던 아샤 트레일은 듣기 거북스러운 금속성에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 더 검이 버텨내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검은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검을 보호하기 위해 덧씌웠던 검력이 오히려 스스로의 날을 좀먹고 마침내 파괴했다.
파스슥.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검날을 보는 그녀의 표정에 허탈감이 가득했다.
“후우.”
영주가 거창을 회수했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영주의 몰골, 하지만 아샤 트레일은 그 모습에서 조금도 위안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검의 질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영주의 호흡은 자신만큼 가쁘지 않았다.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던 자신과는 다르게 표정에도 여유가 있었다.
“그럼 오늘은 무승부군요.”
영주는 드레이크 라이더이자 와이번 라이더, 땅에 발붙이고 싸우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의 진짜 힘은 무언가를 타고 있을 때 발휘되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를 이기지 못했다.
“오늘은 무승부로 두고, 다음을 기약….”
“철혈의 자작, 로메로 경은 한 번 승리를 거두고도 드레이크에 탄 영주님을 감당하지 못해 패배했지요. 그런데 저는 땅 위에서조차도 영주님을 이길 수가 없군요.”
그녀가 철혈의 자작 로메로보다 약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영주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을 뿐이다.
전장에서 돌아온 영주는 완전히 괴물이 되어 있었다.
“제가 졌습니다.”
아샤 트레일은 솔직하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
“이제부터 그라두스 46의 서열은 백작님 것입니다.”
김선혁은 얼떨떨한 얼굴로 아샤 트레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방인의 스킬을 트집 잡아 그의 힘을 폄하하지도 않았고, 왕실에서 특별히 제조해준 기병(奇兵)의 강력함을 꼬집어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말 그대로 깔끔하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다음에 다시 도전하겠습니다.”
하지만 정작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그녀는 절대로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비록 번쩍이던 갑주가 넝마가 되어 단정하던 몸가짐도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지만, 그녀의 허리는 여전히 꼿꼿했고, 푸른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때는 반드시 백작님 스스로 드레이크에 올라타도록 만들겠습니다.”
결의에 차서 한마디를 내뱉은 아샤 트레일이 몸을 돌렸다.
첫발을 내디뎠을 때는 휘청거렸던 걸음이 두 번째 걸음을 내디뎠을 때는 전혀 흔들림 없게 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 걸음을 내디뎠을 때는 어느새 그녀는 평소의 당당한 여기사가 되어 있었다.
“하. 멋있네.”
아샤 트레일이 완전히 사라지고, 김선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호 기사단 출신의 여기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직했다. 피하는 것보다는 맞서고 버텨내는 데 능숙했고, 사소한 공격 따위는 몸으로 받아내는 강인함을 보였다.
그것이 물러서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수호 기사 특유의 성질인지 그도 아니면 그녀 개인의 성향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엄청나게 터프하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하나는 앞으로 나아갈 줄밖에 모르고, 나머지 하나는 물러날 줄을 모르니 대련이 필요 이상으로 과격해지는 건 차라리 필연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오. 죽겠다.”
왕도로 떠나야 하는데,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몸을 보니 당장 출발하기에는 글러 버렸다.
온몸을 둔탁하게 때려대는 통증 속에서도 김선혁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야 자신이 누구를 상대로 어떤 싸움을 했는지 실감하게 된 것이다.
“아오. 완전 못 쓰게 돼버렸잖아.”
뒤늦게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거창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도 없이 홈이 파이고 갈라진 거창, 전장에서 수도 없이 돌격을 하면서도 버텨냈던 왕실의 하사품이 예리함을 잃고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영주님!”
가만히 망가진 창을 쓰다듬고 있는데, 병사들이 달려와 호들갑을 떨었다. 진즉부터 구경꾼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보여?”
온몸에 피멍이 들고, 피투성이가 된 몸을 보고도 그리 묻냐 핀잔을 주니 병사들이 민망한 얼굴을 해 보였다.
“백작님!”
그때 줄리앙이 나타났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만신창이가 된 그를 본 그녀의 얼굴이 돌처럼 바짝 굳어 있었다.
“야이… 누가 줄리앙을….”
“그게 너무 상황이 심각해 보여서, 스콰이어 줄리앙이라도 와봐야 하지 않나 싶어서….”
병사들의 변명에 김선혁이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영주가 터럭만큼이라도 다쳤다 하면 하루 종일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어린 종자의 등장에 그는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
불과 이틀이 채 지나기도 전에 김선혁의 부상은 말끔히 치료되었다. 그 모든 게 수 속성 지배력에 포함된 치유 능력 덕이었다. 좀처럼 활약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블루곤이었지만, 속성 지배력의 효과만큼은 이렇게 몇 번이나 효험을 보았다.
“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뒤늦게 자신이 전장에 두고 온 무언가를 깨달았다.
“블루곤!”
물밑을 살아가는 존재감 없는 용의 아종을 자신이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떠올린 김선혁이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멍청한 놈!”
상태 창을 열어 블루곤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인지 블루곤이 어떤 상태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망할….”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이면 블루곤도 주인이 자신을 잊고 전장을 떠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만투성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도대체 어쩌다 이런 실수를 한 것인지 그는 스스로의 멍청함을 저주했다.
한 번 토라지면 강이 가물어 버릴 정도로 막무가내인 블루곤, 그는 당장에라도 전장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전장으로 향하지 않고도 수습할 방법이 있었다.
“콜 드래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