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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드래곤 피어 (2)
“이게 얼마 만이냐!”
겨울의 막바지, 슬슬 봄의 전조가 보이는 평원을 가로질러 다시 찾은 영지는 참으로 많이 변해 있었다. 오직 효율을 생각하여 만들어두었던 투박한 영주 저택은 어느새 증축을 거듭해 제법 그럴싸한 모습이 되어 있었고, 그 아래 늘어선 마을의 건물들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용케도 자신의 귀환을 알고 마중 나온 그리운 이들의 얼굴에 떠오른 반가움이었다.
“백작님!”
추위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반가움 때문인지 하얀 볼이 빨갛게 상기된 줄리앙이 그를 보고는 냅다 소리를 질렀다.
“줄리앙. 오랜만이네.”
레드번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달려와 냉큼 안기는 어린 종자의 몸은 어찌된 일인지 하나도 자라지 않았다. 마치 시간을 비켜간 듯한 모습, 하지만 그래서 더욱 반가웠다.
“영주님의 무사귀환을 축하드립니다!”
한발 늦게 클라크가 나서 외치니, 도열해 있던 기병들과 병사들이 환호를 지르며 자신들의 영주를 환영해주었다.
“트레일 경, 내가 없는 동안 경께서 수고가 많았습니다.”
보복 삼아 침투한 기사들을 보란 듯이 격퇴한 라인펄 영지에 대한 소문은 왕국 전체를 넘어 전장에 있는 김선혁에게까지 전해졌다. 그 모든 게 상급 기사 아샤 트레일의 덕분이었다.
“그저 임무에 충실했을 뿐, 감사를 받을 일은 한 적은 없습니다.”
한결같은 여기사의 대답에 그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무표정한 아샤 트레일의 얼굴에도 미미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이렇게 날도 추운데 나와 있었어?”
“골드레이크가 아침부터 안절부절 못하고 난리를 쳐대는 바람에….”
그러고 보니 골드레이크가 저 뒤에서 크릉크릉 콧김을 내뿜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골디.”
반갑게 웃으며 손을 벌리니 집채만 한 괴수가 강아지라도 되는 양 달려와 뺨을 비벼 댔다.
캬아아악!
김선혁이 골드레이크의 커다란 머리통을 쓸어 만져주자 레드번이 빽빽거리며 소란을 피웠다. 꽤나 날카롭고 거친 소리였다.
크르르르.
나른한 표정으로 주인의 손길을 즐기고 있던 골드레이크가 대번에 목을 울리며 레드번을 위협했다.
예전의 레드번이었다면 자신을 피떡으로 만들어 개껌처럼 물고 다녔던 드레이크의 위협에 눈을 깔고 딴청을 피워댔을 것이다. 하지만 전장에서 성장할 대로 성장한 레드번은 물러서지 않았다.
캬아아.
레드번은 마치 도전이라도 하듯 전보다 두 배는 거대해진 날개를 펼쳐들고는 겅중거리며 골드레이크를 노려보았다. 당장에라도 녹색 침을 뱉어낼 것처럼 레드번의 목이 꿀렁거렸다.
“그만!”
그대로 두었다가는 기분 좋은 재회가 난장판이 될 판국이라 그가 낮게 명령했다. 하지만 머리 나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레드번이 기어코 사고를 쳤다.
콱.
손쓸 새도 없이 날아든 레드번이 골드레이크의 목을 깨물었다.
“야!”
김선혁이 기겁을 하며 레드번을 제지했지만, 이미 들러붙은 두 괴수는 도통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크아아!
골드레이크가 제 목에 달라붙은 레드번을 세차게 털어냈다.
빽!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진 레드번, 그 위로 골드레이크가 덮쳐들었다.
캬아아악! 툇!
레드번이 극독의 침을 뱉으며 골드레이크를 견제했지만, 돌격밖에 모르는 우직한 괴수는 그조차도 무시하고 레드번을 짓밟았다.
설마 이렇게까지 무식하게 달려들 줄은 몰랐는지 뒤늦게 레드번이 날갯짓을 하며 날아올랐지만, 이미 때는 늦고 난 다음이었다.
골드레이크가 레드번의 뒷다리를 물고는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빼액. 빼액.
금빛 번쩍이는 괴수에게 깔아뭉개진 레드번이 가냘프게 숨을 몰아쉬며 제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 눈망울이 꼭 자신을 구해달라는 것처럼 보여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멍청한 놈아. 싸울 거면 하늘에서 싸워야지, 무슨 깡다구로 골디한테 땅에서 덤벼.”
레드번의 더러운 성질과 멍청함은 도무지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허물을 벗으며 두 번이나 성장을 했다지만, 골드레이크의 근력과 맷집은 레드번의 몇 배에 달했다. 단순히 스테이터스만 보아도 상대가 안 되는 싸움, 내세울 거라고는 날개와 민첩성밖에 없는 레드번이 이기는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골디. 놔줘. 다시는 안 덤빌 거야.”
골드레이크는 분이 풀리지 않은 눈치였지만, 제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복종도의 차이인지 그도 아니면 타고난 성격의 차이인지 레드번에 비해 훨씬 더 믿음직스러운 골드레이크였다.
크릉.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주인의 곁에 돌아와 머리를 바짝 붙여오는 골드레이크는 비늘 한 장 상한 게 없었다. 그리핀의 질긴 가죽도 녹여버린 레드번의 독침마저도 통하지 않은 것이다.
“천적이네. 천적이야.”
단순한 스테이터스 차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친 격차에 김선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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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떠나실 거라고요?”
김선혁이 다시 왕도로 떠나야 한다는 말에 줄리앙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차피 다녀올 거면, 빨리 다녀와야지.”
예상보다 오래 전장에 머물렀다. 이제는 정말이지 쉬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하지만 왕도에서의 볼 일이 끝날 때까지는 쉬어도 쉬는 게 아니었다.
어설프게 시간만 보내느니 차라리 일을 빨리 마무리 짓고 쉬는 게 이득이었다.
“받을 건 받고, 줄 건 주고. 빨리 끝내야 나도 마음 편히 쉬지.”
“그거야 그렇지만….”
못 본 사이에 부쩍 감정 표현이 풍부해진 줄리앙은 온몸으로 아쉬움을 표했다.
“저도 같이 갈 수 있겠습니까?”
“트레일 경도?”
생각지 못한 부탁이었지만 못 들어줄 것도 없는 부탁이기도 했다.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줄리앙은 자신도 따라가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끙. 그래. 줄리앙도 같이 가도록 하지.”
고민하던 그는 물정에 밝은 줄리앙을 데려가면 도움이 되면 됐지, 손해 볼 것은 없다 여겨 그러마하고 허락을 해주었다.
“바로 떠날 채비를 하겠습니다!”
“어차피 하루 이틀은 쉬고 출발할 테니까, 너무 서두르지 마.”
줄리앙은 마치 그의 말을 듣지 못하기라도 한 것처럼 허겁지겁 달려나갔다. 마치 자신을 두고 그가 떠날까 봐 걱정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쟤는 처음 봤을 때는 애늙은이 같더니, 점점 어려지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줄리앙이 제 할 일을 똑바로 못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은 마음의 그늘이 걷힌 것 같아 김선혁은 오히려 지금의 모습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뭡니까?”
왠지 모르게 께름칙한 아샤 트레일의 말투에 그가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했다.
“스콰이어 줄리앙 말입니다.”
아샤 트레일은 잠시 문 너머를 보며 기척을 살피는 시늉을 해보이더니, 이내 더욱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몸이 자라지를 않습니다.”
“아, 난 또 뭐라고. 원래 저 또래는 갑자기 자라지 않습니까. 자랄 때가 되면 자라겠지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그를 보며 아샤 트레일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녀는 줄리앙의 변하지 않는 키와 육신이 비정상적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그녀는 1년 동안 단 1센티미터도 자라지 않았습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면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였지만 김선혁은 갑작스레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언젠가 블루곤을 잡으러 뤼겐부르크로 향했을 때, 줄리앙은 씨 서펜트의 독에 노출되어 사경을 헤맨 적이 있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됐습니다. 후유증 정도는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몸에 이상이 남거나, 작은 광증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성격이 변할 수도 있고요. 어떤 것이든 독에 당하기 전과는 상당히 달라질 겁니다.’
그때 그녀를 치료한 뤼겐부르크 남작의 마법사는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다며 몇 번이나 당부의 말을 했다.
하지만 줄리앙은 기적적으로 완쾌되었고 그 어떤 후유증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문제를 잊고 있었다.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 당분간은 지켜보셔야 할 겁니다.’
아샤 트레일의 말을 듣는 순간 잊고 있었던 마법사의 경고가 떠올랐다.
“설마….”
“짚이는 것이 있으신 겁니까?”
김선혁은 줄리앙이 겪었던 일을 전부 털어놓았고, 이야기를 전부 들은 여기사는 드물게 침울한 얼굴을 해 보였다.
“아무래도 그 후유증이라는 게 어떤 식으로든 스콰이어 줄리앙의 성장에 영향을 미친 것 같군요.”
아샤 트레일은 소질 있는 여기사 후보생에게 불어닥친 불행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왕도로 가야겠습니다. 만약 정말로 줄리앙이 자라지 않은 게 후유증 때문이라면, 왕실 마법사단의 마법사들에게 부탁을 해서라도 반드시 치료해야겠습니다.”
자신으로 말미암아 줄리앙이 평생 동안 어린아이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에게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는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어린 종자의 몸을 치료할 것을 다짐했다.
“부디 마법사단의 현명한 마법사들이 그녀를 치료할 방법을 알고 있기를 바라야겠군요.”
“저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대화는 그렇게 줄리앙의 치료법을 따로 찾아보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런데 아샤 트레일은 여전히 볼 일이 남았는지 떠나지 않았다.
“트레일 경. 따로 더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김선혁의 말에 아샤 트레일이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이제 막 귀환한 영주님께 드릴 말은 아니지만….”
잠시 말끝을 흐렸던 그녀가 이내 다부진 얼굴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와 대련을 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갑자기 무슨….”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어 이유를 물었더니, 그녀가 왕도로 떠나기 전에 그의 실력을 확인해보고 싶다 말했다.
“전장이란 것은 기사에게 있어 가장 혹독한 스승이니까요.”
아무래도 혁혁한 전공을 세운 그가 얼마나 성장했을지 호승심이라도 생긴 모양이었다.
“뭐, 어려울 것 없지요.”
그 역시 한 번쯤은 그녀와 다시 겨루어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레인하르트 후작과의 대결 같지 않았던 대결을 제외하고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패한 것이 바로 그녀였던 탓이다.
합의가 끝난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전선에서 막 돌아온 김선혁은 아직 갑주를 채 벗기도 전이었고, 뼛속까지 기사 정신이 박힌 아샤 트레일은 애초에 평복보다 갑주를 즐겨 입고 다니는 여인이었다. 그런 탓에 달리 거창하게 무장을 준비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들은 각기 자신의 창과 검만을 챙겨 후원에 마련된 공터에 마주 섰다.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아무래도 전과는 다를 테니.”
창을 잡은 김선혁이 그렇게 말하니, 아샤 트레일이 말없이 검날 위에 찬란한 섬광을 덧씌웠다.
“저라고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검에 서린 검광은 예전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찬란했다. 검력 높은 녹테인의 기사들이 넘쳐나던 전장에서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선명한 광채였다.
“음.”
그간의 성장으로 자신감이 붙었던 김선혁의 얼굴에 여유가 사라지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몸이 긴장을 하자 이제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수발이 자연스러워진 풍 속성의 힘이 창끝에 모여들었다.
“후우. 그럼 슬슬 시작해보지요.”
온몸을 감싸오는 충만한 기운, 그가 심호흡을 하며 창을 고쳐 잡았다.
고오오오.
그 순간 농밀하던 투기가 난폭하게 변했다.
전쟁이 끝나는 바람에 단 한 번도 다른 이들 앞에서 드러낼 일이 없었던 용의 기세(Dragon Fear)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상대로 발휘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