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131화 (131/305)

00132    =========================================================================

132. 드래곤 피어 (1)

“하, 미치겠네.”

김선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왜 이렇게 안 넘어오니.”

그리핀들을 길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런 변화도 가능성도 보이지 않았다면 속 시원히 포기하련만, 그건 또 아니었다. 그리핀들의 적대심은 그가 보기에도 확실히 처음보다 현저하게 낮아져 있었다.

그리핀들은 더 이상 전처럼 부리를 딱딱거리며 위협을 한다거나 발톱을 세우지 않게 되었다. 그저 소 닭 보듯이 무심한 눈을 한 채 그를 못 본 척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 자신의 방식이 아예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더욱 갑갑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더 공을 들이면 넘어올 것도 같은데, 도무지 넘어오지를 않으니 처음에는 복덩이처럼 보였던 그리핀들이 이제는 얄미워 보일 지경이었다.

“차라리 못 쓰게 망가트려 버릴까.”

잔인하다면 잔인한 생각이었지만, 그리핀들 때문에 전장을 떠나지도 못하고 발이 묶여 결국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남아있어야 했던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못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돌아가면 적이다.

아덴버그의 공중 전력이 자신 하나뿐인 이상 그리핀 라이더들이 찾아올 경우 언제고 다시 전장으로 불려올 가능성이 낮지 않았다. 차라리 일곱 중 둘이라도 못 쓰게 만들어 조금이라도 귀찮은 상황을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아냐. 아냐.”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어 자신의 생각을 털어내야만 했다.

이미 공중 전력을 통해 톡톡히 이득을 본 아덴버그다. 굳이 그리핀 라이더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유일한 공중 전력을 놀게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데스덴 왕실은 자신을 어떻게 써먹을지 벌써 궁리를 끝냈을 것이다. 또다시 전장에 끌려오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자신을 대신할 이를 찾아야 했다.

라파예트와 롤랑이라면 대역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핀들을 제대로 굴복시켰을 때의 이야기였다.

“후.”

그는 머리끝까지 차오른 짜증을 다스리며 다시 그리핀을 향해 다가갔다.

“어?”

그런데 그리핀들의 상태가 이상했다.

캬아아악.

낮게 목을 울려대는 그리핀들은 그 사나운 으르렁거림과는 다르게 마치 겁에 질리기라도 한 것처럼 바짝 몸을 숙인 채 떨고 있었다.

“얘네들은 또 왜 그래?”

혹시라도 자신이 생각에 잠긴 사이에 레드번이 무슨 짓이라도 했는가 싶어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넌 또 왜 그래?”

레드번 역시 그리핀들과 그 상태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레드번은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그를 올려다보며 애처롭게 끙끙대며 울어대고 있었다.

그때 뜬금없이 메시지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 ‘미약한 압도(Weak Fear)’ 스킬이 제 3자의 개입으로 인해 ‘용의 기세(Dragon Fear)’스킬로 진화하였습니다. 미약하여 그 근원을 알 수 없던 기세가 이제는 완연한 용의 것이 되었습니다.

- 용의 위엄이 실린 당신의 살의와 적의는 상대에게 평생 동안 잊지 못할 공포로 각인될 것입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그는 갑작스레 일어난 변화에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갑작스레 일어난 돌발적 상황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대의 바람은 이루어질 것이다.’

언젠가 용에게 대가를 요구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용은 그의 요구를 들어주겠노라 말했다. 하지만 용은 끝까지 그 대가가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았고, 그 바람에 그는 한동안 용이 약속한 보상에 대해 까맣게 잊고 지내야만 했다.

아무래도 그 보상이 지금 입금된 모양이었다. 메시지에 떡하니 나온 ‘제 3자의 개입으로…’라는 문장, 그 3자가 누군지는 빤했다.

용기병의 스테이터스에 관여할 수 있는 존재는 용밖에 없었다.

“일찍도 준다….”

보상이 늦어도 너무 늦었다.

용이 줄 새로운 능력이 필요했던 건 전쟁이 한창이던 몇 달 전이고, 지금은 전쟁도 끝이 난 상황이었다.

정작 필요할 때는 찾아오지 않았던 변화가 상황이 다 끝나고 나서야 일어난 것은 아마도 용의 심술 때문이었으리라. 인사도 없이 사라진 용은 그때까지만 해도 신성한 계약을 세속적인 잣대로 모욕한 자신에게 화가 나 있었으니까.

“이건 또 어디다 써먹는다.”

말과는 달리 그는 해답을 알고 있었다.

살의와 적의에 반응하여 일어나는 용의 기세는 적의 몸을 굳게 만들고 굴복하고 싶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의 눈앞에는 때마침 굴복시켜야 하는 두 마리의 괴수가 있었다.

“흠….”

크고 작은 전투만 백여 번이 넘게 치른 김선혁이다. 그런 그에게 살의를 일으키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네 주인이다.”

기세를 실어 한마디를 내뱉으니 그리핀들이 몸을 떨었다.

“나를 섬겨라.”

한 발짝 내딛으니 그리핀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쩔그렁거리는 쇠사슬이 괴수의 발을 잡아채지 않았다면 당장에라도 훨훨 날아 도망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너희들의 주인이다.”

그는 성큼 다가서며 그리핀들에게 선언하듯 말했고, 이제껏 수백 수천 번을 반복해온 언령이 그 순간 절대적인 명령이 되었다.

끄응.

그리핀들이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독수리의 그것보다 몇 배는 두껍고 날카로운 앞발이 무릎이라도 꿇듯 접히고, 그리핀들은 노란 부리가 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바짝 머리를 조아렸다.

“내가 너희들의 새로운 주인이다.”

그리핀들을 옭아매고 있던 각인이 깨어져 나갔다. 그리고 언령이 새로운 각인이 되어 그리핀들의 머릿속에 새겨졌다.

길고 길었던 작업에 마침내 종지부가 찍힌 것이다.

김선혁은 두 마리의 그리핀 중 비교적 덩치가 작은 드본의 사슬을 풀어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 위에 올라탔다.

“가자.”

그의 말에 잠시 주춤거리던 드본이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와. 이거 장난 아닌데?”

생긴 것과는 달리 그리핀의 탑승감은 엄청나게 훌륭했다. 그리고 안정적이었다.

빠르고 날렵한 대신 가속도를 얻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상승 시에 심각할 정도로 흔들리는 레드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체 무슨 훈련을 했다는 거지?”

그리핀 라이더들이 그리핀에 올라타기 위해 했다는 그 훈련이 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만큼 그리핀과의 비행은 편안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레드번이 그리핀에 비해 마냥 격이 떨어진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핀은 안정적인 대신 레드번처럼 날카로운 비행이 불가능했다. 폭격기처럼 하강하며 내리꽂는 과격한 기동은 그리핀의 성격과 맞지 않았다.

레드번이 전투기라면 그리핀은 헬리콥터에 가까웠다.

빼애애액!

드본에 앉아 이런저런 기동을 시험해보고 있자니 언제 잠에서 깬 것인지 불쑥 나타난 레드번이 바로 뒤에 바짝 따라붙어 있었다.

- 질투, 못마땅.

아무래도 제 주인이 자신이 아닌 다른 괴수의 등 위에 앉아있는 것이 못마땅한지 레드번은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위험스레 스쳐 가기도 하며 그의 비행에 훼방을 놓았다.

“아오! 너 안 버리니까 그만 해.”

점점 과격해지는 레드번의 시위, 급기야 제 몸으로 그리핀을 들이받기까지 했다.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떨어질 뻔했던 그는 결국 드본과의 비행을 포기해야 했다.

“넌 대체 누굴 닮아서 이렇게 속이 좁니.”

그리핀의 등에서 내리자마자 냉큼 다가와 제 등을 내미는 레드번을 본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

“오오! 드디어!”

라파예트와 롤랑은 쇠사슬의 속박에서 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리핀들을 보며 감탄했다.

“이 주인밖에 모르는 놈들을 정말로 길들일 줄이야.”

“대체 무슨 수를 쓴 겁니까.”

그들의 호들갑에 김선혁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건 알고 없고. 난 약속을 지켰어. 이제 당신들이 지킬 차례야.”

라파예트와 롤랑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드라흔 백작께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왜 나한테 충성을 맹세해?”

두 기사가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그럼?”

“충성맹세는 내가 아니라 아데스덴 왕가에 해야지.”

“아….”

그제야 자신들이 너무 기쁜 나머지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은 라파예트와 롤랑이 민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망명을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아데스덴 왕가에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그러면 된 것이지요?”

롤랑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맞아. 그렇게 당신들은 아덴버그의 기사가 되는 거지.”

사실 김선혁이 마음만 먹으면 상급 기사의 지위를 가진 창공의 기사들이라고 해서 못 부릴 것은 없었다. 그는 당당한 왕국의 백작이었고, 상급 기사를 수하에 둘 수 있는 권위와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초인에 대해 강박적인 집착을 보이는 아데스덴 왕실의 의사야 둘째 치고서라도 당장 그는 두 기사를 굳이 휘하에 둘 필요성을 찾지 못했다.

그리핀 라이더의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고국마저 버린 기사들이다. 전시에 한 약속이라고 하나 결투에 끼어들지 않겠다던 약속을 저버렸고, 패배의 대가마저 모른 척했던 이들이기도 했다. 그런 기사들을 단지 능력이 있다고 해서 곁에 둘 마음은 요만큼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들을 아데스덴 왕가에 떠넘기기로 마음먹었다.

음흉한 귀족들마저 제 수족처럼 부리는 아데스덴 왕실이라면 이 단순하고 허영심 많은 기사들을 다루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리라.

“이제는 당신들이 아덴버그의 공식적인 공군(空軍)이야.”

아덴버그 유일의 공중 전력이 이제는 셋으로 늘어났다. 아데스덴 왕실이 그에게 시킬 귀찮은 일을 도맡아줄 존재가 둘이나 늘어난 것이다.

“앞으로 잘 해보라고.”

기꺼운 마음에 그가 웃음을 터뜨리자 뭣도 모르고 두 기사가 따라 웃었다.

**

“그런 고로 앞으로 질베르 실베인 라파예트 경과 장 마리 드 롤랑 경은 아덴버그의 기사가 되기로 했습니다.”

김선혁은 완전히 전향의 의지를 굳힌 창공의 기사들을 데리고 맹스크 사령관을 찾았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잘 생각하셨소.”

라파예트와 롤랑은 사령관의 말에 복잡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망명의 의사를 표현한 뒤에 괴로운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덴버그는 그리핀도르의 라파예트 가와 롤랑 가에 사람을 보냈다. 망명이 공표된 후에 일어날 후폭풍에 대비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연락을 받은 두 가문의 반응이 예상과 전혀 달랐다.

그들은 놀랍게도 아덴버그의 전령을 사로잡아 왕실에 모든 정황을 고해바쳤다. 그 결과 그리핀도르는 발칵 뒤집혔고 아덴버그에 강력하게 항의를 하며 즉각적인 포로의 송환을 요구했다.

당연하게도 아덴버그는 그리핀도르의 요구를 묵살했고, 그 과정에서 두 기사의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들은 끝까지 라이더의 자격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의 가문이 그들을 버렸던 것처럼 그들도 기꺼이 라이더의 자리를 위해 가문을 버린 것이다.

“라파예트 가와 롤랑 가는 그리핀도르에서도 제법 명망이 높은 축에 속하는 유수의 명가지. 그런 그들이 새삼 자식 하나를 위해 수백 년 역사를 포기하고 이주를 결정할 거라고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네.”

사령관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두 가문이 그렇게까지 즉각적으로 반응한 것은 의외라며 피하지 못하고 화를 당한 전령들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앞으로 최소 50년은 라파예트 가와 롤랑 가는 그리핀도르의 중앙 정계에 접근할 수 없을 걸세. 그 이상의 시간이 흐르더라도 배신자의 가문이라는 낙인은 지워지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 모든 불이익을 감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 있는 게지.”

맹스크 사령관은 귀족들의 생리는 혈육이라고 해도 필요하다면 기꺼이 버릴 수 있는 냉혹한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김선혁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는 아예 신경을 끄기로 마음먹었다. 애초에 생각 구조가 다르게 생겨먹은 귀족을 이해하려고 해봐야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피 차가운 귀족들의 냉혹함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그럼 자네도 이제 완전히 일이 끝난 건가.”

진즉에 임무의 시한이 종료된 김선혁이다. 창공의 기사들을 상대한다고 남았고, 나중에 가서는 그리핀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조금 더 버텼다. 이제는 그마저도 마쳤으니 그가 굳이 이 칼바람 에는 칼스테인 요새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바로 떠날 건가?”

“잠깐 영지에 들렸다가 왕도에 가 보려고 합니다.”

죽어라고 싸워서 공을 세웠으니, 이제는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 할 때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