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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회유 (2)
“평생을 그리핀 라이더를 목표로 살아왔소. 이제 와서 라이더가 아니게 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군.”
한참을 고민하던 라파예트의 선택은 왕국에 대한 충성이 아닌 라이더의 자격이었다. 롤랑의 대답 역시 다르지 않았다.
“좋아. 그렇게 알도록 하지.”
김선혁은 그런 그들의 대답을 듣고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독촉을 하기에 대답을 하긴 했지만, 그들도 크게 대답에 가치를 두지는 않은 듯 그를 붙잡지 않았다.
“만약 창공의 기사들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리핀도르가 어찌 나올까요?”
맹스크 사령관을 찾은 그는 곧장 그리핀 라이더들을 돌려보내지 않을 경우 일어날 후폭풍에 대해 물었다.
“질문의 요지를 알 수가 없으니 뭐라 대답을 할 수가 없군.”
“라파예트 경과 롤랑 경이 아덴버그에 잔류하길 바란다면, 어찌해야 할지를 여쭙는 겁니다.”
평기사만 해도 나라에서 관리를 하는 중요재원이다. 하물며 상급 기사이자 그리핀 라이더인 라파예트와 롤랑이야 오죽하랴. 일을 진행하기에 앞서 뒤탈이 생길 것인지를 먼저 확인해봐야 했다.
“잡아야지. 생각할 게 뭐가 있나.”
그의 고민이 무색해질 정도로 맹스크 사령관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뒤탈이 없겠습니까?”
“뒤통수를 먼저 친 건 그리핀도르지 우리가 아닐세.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나올 수 있었던 이유가 뭐겠는가.”
김선혁은 그제야 자신이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바로 거리일세.”
아덴버그와 그리핀도르 사이에는 녹테인이라는 훌륭한 장벽이 존재했다. 녹테인이 멸망하지 않는 한 그리핀도르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덴버그를 직접적으로 해코지할 수 없었다.
“주변국을 부추겨 뭔가를 꾸민다든가, 자잘한 문제야 있겠지만 그 정도 대가라면 상급 기사 둘, 그것도 그리핀 라이더를 얻는 값으로 마땅히 지불할 만하지.”
혹시라도 자신의 행동이 또 다른 전쟁의 빌미가 되는 것은 아닌가했던 염려가 그저 기우였음을 깨달은 그는 맹스크 사령관에게 자신의 계획을 전부 말해주었다.
“호오. 창공이 일곱 기사의 별칭이 아니라 기사단의 이름이라니.”
사령관은 창공의 기사들이 사실은 그리핀 라이더 후보생들과 라이더로 이루어진 기사단이었다는 사실을 듣고는 상당히 놀라워했다. 그리고 그들이 귀국 이후에 가해질 처벌에 대해 우려하고 있음을 알고는 눈을 빛냈다.
“그리핀만 얻을 수 있다면 그들을 회유하는 것도 문제가 아니겠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리핀이었지 창공의 기사들이 아니었다. 실력이야 차고도 넘치지만 농담으로라도 신의가 있다 말할 수 없는 두 기사는 그저 그리핀에 딸려오는 부록이었을 뿐이었다.
“일단 그래도 확실히 하는 게 좋겠지. 폐하께 직접 여쭤보게나. 폐하께서는 또 다른 생각이 있으실지도 모르니 신하된 자로 심려를 끼쳐드려서는 안 되겠지.”
맹스크 사령관은 아데스덴 왕성으로 연락을 넣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테오도르 국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할 것도 없다. 할 수 있다면 그리하라. 그 뒤에 생길 문제는 내가 책임질 것이니.]
언제나처럼 시원시원한 대답, 드디어 최종결재가 떨어진 것이다.
“근데 대체 무슨 수로 주인이 각인된 그리핀들을 구슬릴 생각인가.”
맹스크 사령관의 질문에 김선혁이 씩, 하고 웃어 보였다.
“열심히 말로 설득해봐야지요.”
얼토당토않은 대답에도 사령관은 나름의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인지 더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하지만 김선혁은 그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말로 그리핀을 설득해볼 생각이었다.
‘말하라. 선언하라. 부족하다면 몇 번이고 반복하라. 그리하면 그것이 약속이 되고 언령(言令)이 되리라.’
물론 평범한 언어가 아닌 용이 전해준 능력, 언령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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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은 창공의 기사들과 따로 격리되어 레드번이 있는 곳에 묶여 있었다.
캬아아아악.
김선혁을 발견한 그리핀들이 부리를 딱딱거리며 위협을 해댔다. 하지만 그게 위협적으로 느껴지기보다는 차라리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만큼 그리핀들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갈기는 반쯤 녹아내려 눌러붙어 있었고, 보기 좋던 황색 빛 털은 듬성듬성 파여 있었다. 하얀 날개도 깃털이 빠져 앙상하기만 했다.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두 마리의 그리핀,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작작 좀 괴롭히라니까. 애들을 아주 걸레짝을 만들어놨네.”
세 마리의 괴수 중 유일하게 묶여있지 않은 레드번이 범인이었다.
삐이이익.
그의 질책에 레드번이 휘파람이라도 불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딴청을 피워댔다.
이스테인 평원에서의 전투 이후로 레드번은 또 한 번의 성장을 이루었다. 독극물 제조에 재미가 들린 아리아 아이젠의 작품이었다. 이제 레드번은 라파예트의 거대 그리핀 미온테에 꿇리지 않는 덩치가 되었고, 더욱 강해졌다.
그렇게 성장한 레드번은 자신의 힘을 그리핀들을 괴롭히는 데 사용했다. 두꺼운 쇠사슬에 사지가 묶인 그리핀들은 성질 고약한 와이번의 횡포에 제대로 저항할 수 없었다.
그 결과가 지금의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꼬락서니였다.
“진상도 이런 진상이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김선혁이 그리핀들에게 다가갔다.
캬아악!
그리핀들이 갈기를 바짝 세우고 그를 경계했다.
“쯧. 괴롭히러 온 거 아니야.”
그는 그리핀들의 상처를 보며 혀를 차다 이내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떠올리고는 곧장 작업에 착수했다.
“내가 네 주인이다. 내가 주인이다. 내가 네 주인이다.”
언젠가 스텔라를 길들였던 그때처럼 그는 끊임없이 같은 말을 되뇌었고, 자신의 말이 언령이 되어 그리핀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랐다.
**
첫날의 시도는 실패인지 아닌지도 모르게 끝이 나버렸다. 하지만 김선혁은 실망하지 않았다.
과부제조기를 길들일 때조차도 그렇게 공을 들여야 했는데, 몇 배는 사납고 강인한 그리핀들을 길들이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그는 틈만 나면 언령을 각인하기 위해 그리핀들을 찾았다.
“아오. 대체 왜 그러니.”
레드번은 제 주인의 관심이 그리핀들에게만 향하자 심통이 났는지 그가 없을 때면 더욱 더 모질게 그리핀들을 괴롭혀댔다.
“자꾸 그러면 너도 묶어버린다.”
그의 으름장에 빽빽거리는 레드번의 모습은 전혀 반성하는 듯한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태창에 떡하니 ‘불만, 억울.’이라고 나온 것이 도통 뉘우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골디한테는 찍 소리도 못하는 게.”
레드번이 빽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주둥이를 치켜들었다. 마치 그 모습이 이제는 골드레이크를 만나도 전처럼 쉽게 당하지는 않을 거라 주장하는 듯했다.
“이놈 또 영지로 돌아가면 서열 싸움하는 거 아닌가 몰라.”
레드번을 볼 때면 유독 자신이 용의 아종을 키우는 것인지 개를 키우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지금이 딱 그런 경우였다.
삑삑.
주인의 기분이 상한 듯하자 슬쩍 기다란 코를 내밀어 이리저리 비벼대는 것이 흡사 아양이라도 피우는 모양새였다.
“아오. 말을 말자. 말을 말아.”
아무리 사고를 쳐도 미워할 수 없는 레드번, 결국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
모든 희망을 잃은 것처럼 하루하루 동태눈을 하고 살아가던 창공의 기사들은 근래 들어 부쩍 활기를 되찾았다.
“아직 성과가 없습니까?”
혹시라도 자신의 말이 보채는 것이라 여겨질까 걱정이 되었는지 라파예트는 사내다운 얼굴이 무색하게 소심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말투도 어느 사이에서부턴가 상관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변해있었다.
“이러다가 덜컥 본국이 귀국의 조건을 수락하면….”
과연 눈앞의 기사가 그 자존심 강하고 고고하던 창공의 기사들 중 둘째가 맞는지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정말 여러모로 믿음이 안 가는 사내들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성격이야 전형적인 소인배였지만 지닌 능력만큼은 진짜였으니, 싫어도 안심을 시켜줄 수밖에 없었다.
“그게 그렇게 금방 되는 게 아니라니까. 좀만 더 참고 기다려봅시다.”
그도 그럴 것이 김선혁은 두 창공의 기사들을 비싼 값에 팔아먹을 생각이었다. 물론 구매자는 아데스덴 왕실이었다. 이미 테오도르 국왕과 이야기도 끝마친 상태였다. 남은 것은 그리핀을 하루라도 빨리 굴복시켜 이들이 공식적으로 망명을 선언하도록 하는 것뿐이었다.
“혹시 본국에서는 소식이 없습니까?”
이번에 질문을 한 것은 롤랑이었다.
“있긴 있었는데, 아국의 국왕폐하께서 잘 막아주고 있는 모양이다.”
두 번씩이나 승자와 패자로 남아버린 두 사람의 관계는 이제 누가 보아도 어느 쪽이 위인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극명하게 갈렸다.
“내가 묻기에는 뭐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남으려고 하지? 사실 당신들 정도면 그리핀을 타지 않더라도 충분히 대우를 받을 수 있잖아.”
라이더에 비해 격이 떨어진다 뿐이지 상급 기사라면 대륙 어느 왕국을 가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강자였다. 그런데 이들이 고국을 버린 배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각오까지 해가며 아덴버그에 잔류하려는 이유가 다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라이더가 아니면 안 됩니다.”
하늘에서 바라보는 세상에 중독되어 이제는 땅에 발붙이고 선 다른 기사들과 함께 서는 것만으로도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도 아니면 단순히 그리핀 라이더를 목표로 평생을 바쳐왔기 때문에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김선혁은 이들이 무슨 생각으로 아덴버그에 남는 것인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남았든 간에 아데스덴의 왕가의 수장, 테오도르 국왕이 잘(?) 보살펴 줄 거라 여긴 것이다.
“어쨌건. 기다려. 보채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니까.”
그는 조급증이 도진 두 기사를 달래주고는 다시 그리핀을 굴복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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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혁이 칼스테인 요새에서 그리핀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공을 들이는 동안, 아덴버그 왕국의 왕도 아데스덴에서는 연일 회의가 한창이었다.
“폐하. 부디 재고하여 주시옵소서.”
그런데 그 회의 분위기가 다소 묘했다. 테오도르 국왕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던 귀족들이 무슨 이유에선지 몇 번이고 재고를 요청했다.
“재고의 여지는 없다. 몇날 며칠을 고민하고 다시 몇날 며칠을 밤을 새워가며 생각해보아도 드라흔 백작이 세운 공에 걸맞는 보상은 이것 외에는 따로 떠오르지 않노라.”
테오도르 역시 귀족들만큼이나 완고했다.
“그럼 경들이 말해보라.”
그는 도리어 귀족들에게 호통을 쳤다.
“드라흔 백작이 적을 패퇴시킨 전투만 해도 예순여섯 번이다. 그 과정에서 와해된 적의 보병대만 해도 부지기수요, 전선 전체에 끼친 영향력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다. 그뿐인가. 그 혼자서 박살낸 기사들의 수만 해도 열넷이요 마법사는 마흔둘을 격살시켰다. 이 정도의 공을 세운 그에게 맞는 보상이 대관절 뭐가 있다는 말인가.”
듣기만 해도 입이 쩍 벌어지는 어마어마한 전공, 하지만 귀족들은 굽히지 않고 나서서 간청했다.
“드라흔 백작이 세운 공이 지대한 것은 사실이나, 그 보상이 지나친 것 역시 사실이나이다. 차라리 점령지의 일부를 맡겨 뿌리가 단단하지 못한 드라흔 백작이 더욱 공고히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경작지로도 쓰지 못할 땅덩어리를 맡겨 전후 재건 사업의 일거리를 던져주는 게 진정 그가 이룬 승리에 대한 대가로 합당한가.”
이번에는 귀족들도 대답하지 않았다. 국왕의 어조가 슬슬 날카로워질 기미가 보였던 탓이다.
“나는 이미 그에게 기사된 자로 이룰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을 주겠노라 약속했다. 그대들은 진정 내가 허언이나 일삼는 신의 없는 자가 되기를 바라는가.”
여기서 잘못 대답했다간 왕실의 명예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불충한 귀족으로 낙인이 찍힐 판이었다. 귀족들의 입이 쉬이 떨어질 리가 없었다.
“작위를 올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공에 맞는 봉토를 내리자니 점령지 전체를 주어도 모자랄 지경이다. 왕실의 재정은 풍족하나 그가 세운 전공을 재화로 환산하여 지불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후작과 공작은 오직 아데스덴의 핏줄에게만 허락된 것, 이미 백작에 오른 드라흔의 작위를 올려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현물로 보상을 내리자니 공이 커도 너무 커서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하여 나는 그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보물을 하사하여 그 공을 치하하려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