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0 =========================================================================
130. 회유 (1)
이스테인 평원에서 패배한 녹테인은 어떻게든 겨울이 오기 전까지 동부지역의 일부라도 탈환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 썼다.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깊숙이 침투하여 후방을 교란하는가 하면, 병참과 수송대를 습격하여 불리한 전세의 반전을 꾀하였다.
그중 몇몇 시도는 실제로 성공하여 나름대로 소득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후방이 조금 어지러워지고 소규모 수송대 몇이 습격당하는 정도로는 아덴버그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날이 갈수록 거세지는 공세를 꿋꿋이 견디며 겨울을 날 준비를 했고, 결국 녹테인의 노력은 잃었던 동부지역의 영토 중 2할이 채 되지 않는 땅을 탈환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녹테인으로서는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녹테인보다 더욱 억울한 것은 그리핀도르였다.
일곱의 그리핀 라이더는 그리핀도르의 자랑이자 보물이었다. 그런 그리핀 라이더를 하나도 아닌 둘이나 포로로 잡혔다. 그것도 자신들의 전쟁이 아닌 타국의 전쟁에서 나라의 보물이라 할 수 있는 기사들을 잃은 것이다.
게다가 그냥 잃은 것도 아니었다. 드높던 명성이 아주 시궁창에 처박혔다.
“붉은 와이번에게 짓밟혀 울부짖던 그리핀의 모습은 창공의 제왕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진짜 하늘의 주인은 그리핀이 아닌 와이번과 드라흔이다.”
오랜 시간동안 왕성에 웅크리고만 있던 그리핀 라이더들의 출격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이 패배했을 때,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험담하며 창공의 기사들을 깎아내렸다.
“창공이라는 이름은 드라흔의 것이다. 그리핀 라이더들은 창공이라는 이름을 쓸 자격이 없다.”
그리핀도르로서는 남의 전쟁에서 왕국의 보물을 잃은 것도 억울한데, 사람들의 조롱까지 받게 된 꼴이었다.
하지만 진짜 치욕은 땅에 떨어진 명예도, 세간의 비웃음도 아니었다.
“창공의 기사들을 돌려받고 싶다면, 아국이 제시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추가적인 대가를 치르라. 만약 거부할 시 창공의 일곱 기사들은 다섯 기사가 될 것이다.”
녹테인의 동부 영토를 흡수하며 명실상부한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아덴버그 왕국이 그리핀도르를 압박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핀도르로서는 환장할 일이었다. 그들이 언제 이렇게 타국의 눈치를 살핀다고 전전긍긍해야 했던가.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었다.
자존심을 내세워 요구조건을 모른 척하자니 일곱뿐인 그리핀의 수가 다섯으로 줄 판국이고, 그렇다고 요구조건을 들어주자니 도대체 얼마나 큰 손해를 보게 될지 예상도 할 수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시간만 하릴없이 흘렀고, 덜컥 겨울이 왔다.
겨울은 모두에게 혹독한 계절, 패자에게는 유달리 가혹한 시기였다.
**
“영지를 빼앗긴 녹테인의 귀족들 중 대부분이 목이 베이고 재산을 몰수당했네.”
맹스크 사령관의 말에 김선혁은 입을 쩍 벌렸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그 막무가내식 약탈 정책에 녹테인의 지도자가 제정신이 아님을 알았지만, 영토를 잃은 자국 내의 귀족들을 그런 식으로 처리할 줄은 상상도 못한 것이다.
“녹테인의 귀족들은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답니까?”
“방조한 것도 부족해 동부 출신 귀족들에게 패전의 책임을 씌우는데 앞장서기까지 했지.”
무자비한 녹테인의 전후(戰後)처리 방식에 그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잘도 그런 나라가 이제껏 유지되어 왔군요.”
녹테인은 상상한 것 이상으로 야만적이었다.
“그게 녹테인의 방식일세.”
방식이야 어찌 됐건 간에 전쟁으로 피폐해진 재정과 손실된 전력을 복구하는데 처형당한 귀족들의 재산이 상당부분 도움이 될 거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실제로 사령관은 질적 하락을 피하지는 못했지만 양적인 부분에서만큼은 녹테인의 전력이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었노라 말했다.
“병사들이 그렇게 막 찍어내듯 늘어날 수도 있는 겁니까?”
“우리 왕국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녹테인은 가능하네.”
사령관이 말하기를 약탈과 침략을 나라의 근간으로 삼은 녹테인의 백성들은 본디 기질이 거칠고 사나워 당장 병사로 써도 크게 모자람이 없다 하였다.
하지만 그런 녹테인이라도 완전히 전쟁 이전의 전력을 복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숙련된 궁기병들을 많이 잃은 것도 큰 타격이었지만, 전사한 기사들과 마법사들만큼은 일반 병사를 복구하듯 할 수 없었다.
“서부전선에서 전사한 기사와 마법사들을 전부 합쳐봐야 스물이 채 되지 않는다더군.”
맹스크 사령관의 어투에는 자랑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핀도르와 녹테인의 주력이 맞부딪친 험난한 전장, 그런 험악한 곳에서조차 녹테인은 고작 스물이 되지 않는 초인을 잃었을 뿐이다. 그만큼 초인들의 생명력은 끈질겼고, 국가 차원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런 초인들이 동부 전장에서 70여 명에 가깝게 죽어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전사한 녹테인의 초인들 중 대다수를 끝장낸 것이 바로 김선혁이었다.
첫 전투에서 녹테인이 자랑하는 오색 늑대 기사단 중 푸른 늑대 기사단이 지키는 마법병대의 마법사 서른을 도살했다. 그리고 마법사를 잃은 치욕을 되갚기 위에 눈에 핏발이 선 푸른 늑대 기사단의 전력을 꾸준히 소모시켰다.
단신으로 이뤘다고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업적이고 전공이었다.
그의 활약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패배감에 절어 패잔병과 다름없는 신세가 되어버린 푸른 늑대들을 대신해 붉은 늑대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동료의 고전을 교훈 삼아 철저하게 준비를 했고, 함정을 파 그를 유인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함정조차도 김선혁의 발을 묶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작전에 동원되었던 마법병대의 수장 탈리스만과 붉은 늑대 기사단의 선임 기사들이 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것은 오직 붉은 늑대 기사단의 단장 헤일로뿐이었다.
녹테인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패배, 같은 이에게 마법병대의 수장을 둘이나 잃은 건 처음이었다.
그 한 번의 전투로 아덴버그와 녹테인에 국한되어 있던 그의 명성이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검력이 경지에 오른 기사들과 고위 마법사들이 파둔 함정을 박살내고 오히려 그들을 도살한 절대강자, 드라흔의 이름이 처음으로 대륙에 널리 퍼지는 순간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김선혁은 대륙에서도 오래도록 명성을 유지해온 그리핀도르의 그리핀 라이더들을 꺾었다. 질풍의 롤랑이 두 번이나 그에게 패배했고, 불꽃의 라파예트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는 소식이 퍼져나가자 온 대륙이 난리가 났다.
“창공이라는 이름이 드디어 제 주인을 찾았다.”
창공의 기사들이 오랜 세월 동안 누려왔던 명성이 대단했던 만큼 그들을 꺾은 드라흔의 이름값이 천정부지로 솟아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대륙의 사람들이 그의 명성을 추앙한다고 해도 서부군 사이에 퍼진 그의 명성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드라흔이 있는 곳에 패배는 없다.”
서부군에게 있어 드라흔은 그 자체로 승리의 또 다른 이름이었으며, 신앙이었다. 심지어 아데스덴 왕가의 핏줄이 온다고 해도 그의 영향력을 넘어설 수는 없을 지경이었다.
어쩌면 다소 민감할 수도 있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데스덴 왕실은 그에 대한 변하지 않는 신뢰를 몇 번이나 보여주었다.
“드라흔 백작이야말로 아덴버그 왕국을 대표하는 진짜 귀족이다. 혹시라도 그를 음해하거나 모략하는 자가 있어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왕실의 이름으로 친히 징치하리라.”
귀족들은 일개 이방인 출신 귀족에게 보이는 왕실의 과도한 호의와 신뢰를 우려했지만, 감히 나서서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었다.
전쟁 영웅으로 급부상하여 이제는 왕국 내에 그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는 드라흔의 이름을 걸고 넘어가는 것은 명망 높은 귀족들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그는 말단 기병에서 시작하여 단 몇 년 만에 어느 누구도 무시할 수 없고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맹스크 사령관은 그런 김선혁의 입지가 과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세운 전공이 있으니 당연한 것이라 여긴 것이다.
“자네가 아니었다면 이번 전쟁, 힘들었을 걸세.”
사령관의 대견해 하는 표정 한 켠으로는 씁쓸한 기색이 내비쳤다.
전장은 초인들의 놀이터가 아니라고 늘 주장해왔던 사령관이다. 하지만 막상 초인들이 대거 투입된 전장에서 일반 병사들과 지휘관들이 할 일은 없었다. 전장은 오직 초인들만의 것이었다.
전장에 바친 평생의 신념이 전면으로 부정당했으니, 그 상실감과 회의감이 얼마나 클지 감히 짐작도 가지 않을 정도였다.
“사령관님….”
“그런 표정 짓지 말게. 나도 이번 전쟁을 통해 깨달은 게 많네.”
사령관은 이번 전쟁에 동원된 초인들의 운용은 사실상 낙제점에 가까웠다며, 앞으로는 초인들과 일반 병사들을 어떻게 조화롭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를 가를 거라 말했다.
“사령관님은 할 수 있으실 겁니다.”
그의 말에 맹스크 사령관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네. 나는 구시대의 잔재와도 같은 존재, 퇴물은 물러나고 앞으로 전쟁은 새로운 이들이 이끌어나갈 걸세.”
김선혁은 그제야 사령관이 진즉에 은퇴를 선언한 몸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한탄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사령관이 더없는 신뢰가 가득한 눈빛을 보내왔다.
“바로 자네 같은 사람이 말이야.”
마냥 대견해 한다기보다는 뭔가 생각이 깊어 보이는 말투, 그는 영문을 몰라 괜스레 고개만 갸웃거렸다.
**
이스테인 평원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힌 라파예트와 롤랑은 칼스테인 요새에 억류되었다. 그들은 본국이 자신들을 버리지 않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포로 생활이 길어지자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드높던 자부심은 온데간데없는 모습이었다.
사실 그들이 받는 대우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비록 왕도의 호화로운 침실과 식사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아덴버그는 비싼 몸값을 받고 반환할 포로들에게 꽤나 신경을 써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기사들은 과도할 정도로 낙심해 있었다.
“곧 돌아갈 텐데, 뭘 그리 의기소침해 계시나.”
그게 못내 이해가 가지 않아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비아냥인지 질문인지 모를 말을 던지고 말았다.
“드높던 이름이 우리 탓에 세간의 조롱거리가 됐으니, 어찌 내가 슬프지 않겠소.”
라파예트의 말에 그는 코웃음을 쳤다. 신의도 없는 자들이 명예 운운하는 모습이 같잖게 여겨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말이 그다지 진정성 있게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이 낙심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김선혁이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겨울이 거의 끝나갈 무렵쯤이었다.
“정 억울하면 언제고 다시 찾아와서 다시 결투를 신청하시든가. 언제든 받아줄 테니까.”
“아마 우리가 다시 그대에게 창공이라는 이름으로 결투를 신청할 일은 없을 거요.”
단순히 패배감에 절어 하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사연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라파예트는 그 이유를 말해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마 본국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창공의 이름을 박탈당하고, 그리핀 라이더의 자격도 빼앗길 겁니다.”
대답을 해준 것은 롤랑이었다.
“롤랑!”
라파예트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롤랑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김선혁이 그런 라파예트를 제지했다.
“그리핀을 뺏겨?”
창공이라는 이름이야 이미 시궁창에 처박힌 지 오래라 관심도 없었지만, 그리핀 라이더가 그리핀을 빼앗긴다는 말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창공의 기사는 일곱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창공은 기사단의 이름입니다.”
“계속해봐.”
라파예트의 눈치를 잠시 살핀 롤랑은 체념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김선혁의 기에 눌린 것인지 눈을 질끈 감고 더는 만류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상급자를 보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저와 라파예트 경은 수많은 기사들 중에 라이더 적성을 인정받아 라이더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런 우리가 기사단의 이름에 먹칠을 했으니, 라이더의 자격이 계속 유지될 거라고 기대할 수는 없지요.”
이건 또 새로운 이야기였다. 그저 일곱의 라이더들을 뜻하는 줄 알았던 창공의 기사라는 이름이 사실은 그리핀 라이더 후보생들로 이루어진 기사단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리핀이라는 놈은 한 번 주인을 정하면 죽을 때까지 주인을 바꾸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런데 무슨 수로 그리핀을 빼앗는다는 거지?”
창공의 기사들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어도 그리핀에 대해 알려진 것이라면 조금이나마 주워들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더욱 롤랑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애초에 저희는 그리핀의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영문 모를 롤랑의 말에 그가 의아한 얼굴을 해 보이니, 이번에는 라파예트가 나서서 말했다.
“일곱 그리핀의 주인은 모두 그리핀도르의 국왕 폐하요. 우리는 라이더의 자격을 얻어 잠시 폐하께 그리핀을 빌려 탔을 뿐이지.”
“지금쯤이면 본국에서 조치를 취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핀에 새겨진 각인은 거리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것이니까요.”
롤랑은 이미 본국에서 조치를 내렸다면, 자신들이 그리핀을 탈 수 있는 건 본국으로 돌아가는 귀환길 단 한 번뿐일 거라며 낙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본국에 돌아가면 당신들의 처지도 꽤나 처지가 고달파지겠군.”
상급 기사의 경지에 오른 이들이니만큼 홀대를 받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기존에 누리던 것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누리는 상실감과 치욕은 평생을 따라다니며 그들을 괴롭혀댈 것이다. 하물며 가뜩이나 허영심이 강하고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던 이들이 바로 이 두 기사가 아니던가.
“흠….”
김선혁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지.”
그렇게 입을 연 그의 눈매가 마치 뭔가 재미난 생각이라도 떠올린 것처럼 살짝 휘어져 있었다.
“당신들에게 중요한 건 고국에 대한 충성인가, 아니면 그리핀 라이더의 영광인가.”
“그게 무슨 뜻이요.”
라파예트는 무슨 뚱딴지같은 질문이냐며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만약 그리핀을 계속해서 탈 수 있게 해준다면, 어떻게 할 거지? 그래도 본국으로 돌아갈 건가?”
마치 자신이 그리핀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떠들어대는 그를 보며 창공의 기사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해봐. 당신들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그들의 대답을 다시 한 번 독촉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