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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128화 (128/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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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결투와 전쟁의 차이 (2)

동부지역을 상실하며 막대한 피해를 입은 녹테인이었지만, 최소한 이스테인 평원에서만큼은 아덴버그가 동원한 전력에 못지않은 병력이 집결해 있었다.

병력의 질과 양 모두 대등한 상황, 모두가 박빙의 전투를 예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아덴버그군이 녹테인을 압도하는 양상을 띠었다.

모든 게 사기의 차이로 일어난 결과였다.

불꽃의 라파예트와 드라흔이 처음 결투를 시작했을 때까지만 해도 양군의 사기가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비록 드라흔에 대한 두려움이 뼛속까지 새겨진 녹테인의 병사들이었지만, 창공의 기사들이 있는 이상 드라흔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여긴 것이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믿었던 창공의 기사들 중 둘째는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아덴버그의 마법사단이 펼친 마법에 발이 묶여버렸고, 셋째만 덩그러니 남아버렸다.

그 순간 녹테인의 병사들은 또다시 푸른 하늘이 자신들의 악몽이 될 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미 한 번 처참하게 패배한 전적이 있는 롤랑이 드라흔을 제대로 막아낼 수 있을 거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롤랑은 드라흔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첫 격돌부터 밀리는 모습을 보인다 싶더니, 나중에 가서는 맹금에 쫓기는 참새처럼 허둥대며 이리저리 쫓겨대느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상황이 그쯤 되니 녹테인의 병사들의 마음속에 다시금 드라흔에 대한 두려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언제 그리핀을 찢어발기고 자신들의 머리를 짓뭉갤지 모르는 괴수를 신경 쓰느라 눈앞의 상대에게 도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이니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어딜 보는 거냐!”

아덴버그의 병사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대로 밀어붙여!”

그들은 상대의 허점을 물고 늘어졌고, 맹렬하게 공격을 해댔다.

순식간에 무너지는 녹테인 보병대의 방진, 전세가 완전히 기울고 말았다. 패색 짙은 전장에서 모두가 녹테인의 패배를 예상했다.

그때 녹테인의 마법병대가 전면에 나섰다.

“파이어레인(Fire Rain)!”

“토네이도(Tornado)!”

이미 영창을 마친 그들이 주문의 마지막 단어를 외치는 순간 야금야금 전진하던 아덴버그군의 한복판에 불의 비가 떨어져 내리고 회오리바람이 솟아났다.

“녹테인의 전투 마법사들이 움직였다. 왕실 마법사단은 서둘러 대응하라!”

맹스크 사령관의 포효가 채 끝나기도 전에 왕실 마법사단의 마법사들이 상대의 마법을 요격에 나섰다.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 불의 비와 병사들의 사이로 반투명한 막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타오르는 불덩이들은 막을 뚫지 못하고 그 껍데기만 두들기다 스러졌고, 회오리바람 역시 어디선가 날아든 섬광에 그대로 흩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마법 공격은 한 번으로 끝이 나지 않았다. 이제껏 침묵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전투의 전면에 나서 대규모 살상마법을 마구잡이로 뿌려댄 것이다.

하나하나가 보병중대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키고도 남을 강력한 마법들이 연거푸 터져 나왔다. 마법이 한 번 펼쳐질 때마다 병사들이 술렁였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현상에 저도 모르게 몸이 굳고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다.

“아덴버그의 병사들아! 왕실 마법사단을 믿고 전진해라! 그들이 너희들을 지켜줄 것이다!”

맹스크 사령관이 겁에 질린 병사들을 독려했다.

“새끼들아! 네깟 놈들이 노려본다고 마법이 사라지냐!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밀어붙여!”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야 한 놈이라도 더 데리고 죽자!”

일선 지휘관들이 이내 사령관의 말을 복창하며 병사들의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때마침 아군 마법사들이 펼친 마법이 상대의 마법을 요격하고 더 나아가 적 진영을 향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용기를 얻은 병사들이 악에 받쳐 검과 창을 내지르며 녹테인의 병사들을 밀어붙였다. 이와 비슷한 광경이 녹테인군 사이에도 펼쳐졌다.

병사들은 각기 자신들의 마법사들을 믿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하지만 아무리 마법사들이 유능하다고 해도 적의 공격마법을 모두 막아낼 수는 없었다.

빗발치듯 쏟아져 내리는 마법에 전장의 이곳저곳이 터져나가고, 수많은 병사들이 휩쓸려 나갔다.

“지옥이군.”

흔들림 없는 얼굴로 전장을 지켜보고 있던 맹스크 사령관이 신음하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양측 모두 합쳐 70여 명에 달하는 마법사들이 동원된 전투는 평생 동안 전장에서 살다시피 한 맹스크 사령관조차도 본 적 없는 지옥을 연출했다.

사방에서 불꽃이 휘몰아치고 폭풍우가 쏟아져 내렸으며, 벼락이 번쩍였다. 그때마다 미처 아군 마법사가 걷어내지 못한 마법에 희생당한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수십 명씩 죽어 나갔다.

“이게 초인들의 진짜 힘인가.”

마법사들이 나선 순간 병사들의 운명은 자신의 손을 떠나고 말았다.

병사들이 살고 죽고는 오직 마법사들의 손에 달려있었으며, 그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이 전장은 초인들의 것이었다.

“허….”

허탈감에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전세가 아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마냥 기쁘지 않은 것은 마법사들의 손짓 한 번, 짧은 주문 한 마디에 쓸려나가는 병사들의 죽음이 너무도 허무하게 느껴졌던 탓이었다.

“사령관님! 중앙 기사단이 돌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사령관이랍시고 내 명령이 필요하다는 건가….”

“네?”

쓸개를 머금은 듯 쓰디쓴 혼잣말에 참모가 일순간 멍한 얼굴을 하고 말았다.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맹스크 사령관이 다시 예의 다부진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출격을 허락한다. 중앙 기사단은 아덴버그의 기사들이야말로 진짜 기사들임을 녹테인의 승냥이들에게 보이도록 하라!”

그의 명령에 진즉부터 돌격을 준비하고 있던 중앙 기사단이 검을 뽑아 들고 외쳤다.

“중앙 기사단 출지이인!”

기사들은 마법이 빗발치는 전장을 향해 달려드는 데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수천의 병사들이 혼전을 거듭하는 가운데, 기사들이 뛰어들었다. 그들은 그 어떤 기병대도 엄두를 내지 못할 무지막지한 돌격을 감행했고, 너무도 손쉽게 성공해냈다.

“우리 목표는 이깟 피라미들이 아니다! 마법사! 마법사를 찾아라!”

자신들이 찢어발긴 일백의 병사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기사들은 마법사들을 찾아 눈을 번뜩였다.

화악!

그 순간 그들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녹테인의 본진 이곳저곳에서 섬광이 솟구쳤다. 왕실 마법사단이 녹테인 마법사들의 위치를 찾아 마킹(Marking)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저기다!”

전장 어디에 있더라도 한눈에 들어오는 신호를 발견한 아덴버그의 기사들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제길! 막아!”

“마법사들을 지켜!”

녹테인의 지휘부에서도 연신 다급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끝났군.”

비등비등한 전력에 그 어떤 기략(機略)도 발휘될 수 없는 지형, 탁 트인 평원에서 치러지는 대규모 회전(會戰)은 달리 변수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오직 힘과 힘으로 맞붙어 상대를 깨부수는 것만이 승리로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필요한 건 피를 말리는 상황을 견뎌낼 부동심뿐이었다.

그리고 상대는 조바심을 이겨내지 못했다.

마법이 발현된 순간부터 시작될 마법사들의 위치추적, 녹테인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전황이 불리하게 흘러가는 것을 참지 못하고 마법사들을 먼저 전장에 투입했다. 그 순간 이미 승부는 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위치가 노출된 순간부터 적의 마법사들은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고, 아군 기사들의 그런 그들을 집요하게 쫓아 가열차게 공격을 해댔다. 마법사들을 호위하고 있던 녹테인의 기사들이 요격에 나서 실제로 살해당한 마법사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전황을 완전히 굳히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심약한 마법사들이 눈앞에서 자신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기사들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아군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던 적의 마법공격이 뚝, 하고 그쳤다.

그 순간, 방어를 전담하던 아군 마법사들이 공세로 전환하여 공격 마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의 비호를 받을 수 없게 된 녹테인의 병사들은 순식간에 불에 타고 벼락에 감전되어 죽어 나자빠졌다.

아덴버그의 승리가, 녹테인의 패배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콰앙!

끔찍한 마법의 난사 속에서 겨우 살아남은 병사들 위로 거대한 괴수가 떨어져 내렸다. 질풍의 기사 롤랑과 그의 그리핀이었다.

키에에엑!

기수는 이미 기절했는지 미동도 없었지만, 강인한 괴수 그리핀은 만신창이가 된 날개를 펼쳐들고 어떻게든 날아오르기 위해 안간힘을 다 했다.

콰악.

그 위로 떨어져 내린 자줏빛 그림자, 와이번이 억센 발톱으로 그리핀의 새하얀 머리통을 움켜잡고 내리눌렀다.

캭!

그리핀이 괴성을 치며 발버둥을 쳐댔지만, 이미 넝마가 되어버린 몸으로는 와이번의 억센 발톱을 뿌리칠 수 없었다. 결국 한참을 저항하던 그리핀도 투지를 잃고 고개를 꺾고 말았다.

빼애애애액!

와이번이 거칠게 포효하며 자신의 승리를 과시했다.

**

동원되었던 녹테인의 보병들 중 살아남은 자는 불과 2할이 채 넘지 않았고 그마저도 멀쩡한 이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녹테인의 초인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중앙 기사단의 맹공에 몇몇 마법사들만이 전사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전투가 완전히 끝이 나기 전에 전장을 이탈했고 아덴버그의 기사들은 그들을 추격하지 않았다.

이미 승리한 마당에 굳이 무리할 이유가 없었던 탓이다.

녹테인이 패배하는 바람에 창공의 기사들은 버림받고 말았다. 롤랑은 기절한 채 생포되었고, 라파예트는 한시적인 투항을 선언했다.

그렇게 전투는 마무리 되었다.

**

이스테인 평원에서 있었던 전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덴버그의 왕도에까지 전해졌다.

‘맹스크 사령관과 서부군 이스테인 평원에서 녹테인을 대파!’

‘길었던 전쟁의 종지부를 찍다!’

신문은 연일 자극적인 제목을 내걸고 이스테인 전투를 다루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것은 창공의 기사들과 드라흔 백작의 결투였다.

‘폭풍의 기사, 드라흔, 창공의 기사들을 상대로 두 차례 승리!’

‘창공의 기사들이 지닌 명성은 구시대의 유물에 불과, 이제는 드라흔이 진짜 창공의 주인!’

그들은 그리핀도르의 보물이자, 대륙에서도 명성 높은 그리핀 라이더들이 자국의 기사에게 처참하게 패배했다는 소식에 열광했다.

왕도 어디를 가도 라이더들 간의 전투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허어. 왕국의 경사요. 드라흔 백작 같은 이가 다른 곳에 소환되지 않고 우리 아덴버그에 소환되었다는 건 정말로 큰 행운이요.”

“이를 말이요! 왕국의 방패가 연로하여 서부가 허술해지지 않을까 염려했건만, 그보다 더한 방패가 생겼소.”

왕도의 귀족들 역시 이 세기의 대결이 드라흔의 승리로 끝이 났다는 사실에 놀라워했고, 또 감탄했다.

아데스덴 왕가의 수장이자 아덴버그 왕국의 정점에 선 테오도르 티베리우스 로 아데스덴 역시 이스테인 평원의 전투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드라흔이 더 강하니, 당연히 승리할 수밖에.”

하지만 테오도르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창공의 기사들을 꺾은 드라흔의 능력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러한 상황을 예상한 듯한 모습이었다.

“용기병을 상대로 그리핀 라이더는 격이 떨어지지.”

심지어 드라흔에 비해 창공의 기사들이 지나치게 격이 떨어진다고 폄하하기까지 했다. 실로 이상한 태도였다.

“다시 만나면 레벨이 몇이나 올랐을지 궁금하군.”

드라흔, 김선혁은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이후 단 한 번도 자신의 스테이터스와 레벨을 공개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오도르는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듯 여상스럽게 말했다.

“제가 부족하여 아직 폐하의 궁금증을 해소해드릴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으니, 그저 죄송할 뿐이옵나이다.”

제 일인 양 김선혁이 세운 전공을 늘어놓던 왕녀 오필리아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넌지시 물었다.

“만약 원하신다면 조사관을 대동하여 드라흔 백작의 능력을 알아보겠나이다.”

그 말에 테오도르가 고개를 저었다.

“조사관의 입을 통하는 것보다는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하다. 괜히 어줍지 않게 능력을 가늠하여 훗날의 즐거움을 망치고 싶지는 않구나.”

“제가 각성만 했더라면….”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왕녀는 마치 이방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각성을 입에 담았다.

“오필리아. 나의 사랑스러운 딸아. 조급해하지 마라.”

테오도르는 그런 오필리아를 보면서도 전혀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아데스덴의 피가 이어진 이라면 누구나 각성의 순간이 온다. 빠르냐, 늦느냐의 차이일 뿐이니, 너도 조만간 나와 같은 능력을 얻게 되리라.”

“부디 그 날이 조금이라도 빨리 오기를 바랄 뿐이나이다.”

“그때가 되면 드라흔, 김선혁이라는 이방인이 지닌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직접 네 눈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다.”

테오도르는 마치 제 눈으로 김선혁의 스테이터스를 확인해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오필리아는 그의 말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알게 될 것이다. 이 아비가 왜 그렇게 그를 중히 여기고, 특혜를 베푸는 것인지 너 역시 알게 되리라.”

그렇게 말하는 테오도르의 눈동자는 오필리아를 향해 있지 않았다. 그보다 조금 더 위편,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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