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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127화 (127/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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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결투와 전쟁의 차이 (1)

워낙 상황이 급해 끼어들었다지만, 전장까지 찾아와서 결투를 신청하는 이해 못 할 고고함을 지닌 창공의 기사들이니만큼 지난 과오가 수치스럽지 않다면 도리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김선혁의 예상대로 라파예트의 얼굴이 대번에 떫은 감이라도 씹은 것처럼 변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다잡고는 능글맞게 제안을 해왔다.

“두 번 약속을 어길 생각은 없소. 그렇지만 잠시 계산을 우리의 결투 이후로 미루어 두는 게 어떻겠소?”

뻔한 수작이었다. 어떻게든 자신이 승리를 거머쥐고 주도권을 가져가겠다는 말이었다. 김선혁으로서는 따라서 이득이 될 게 하나도 없는 제안이기도 했다.

“그렇게 하지.”

하지만 그는 흔쾌하게 라파예트의 제안을 따랐다.

“아….”

그의 대답에 롤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패배한 롤랑에게 있어 그의 요구는 차라리 선언에 가까웠으며, 반드시 들어줘야 하는 약속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헤어날 구멍이 생겼으니 어찌 안도하지 않을까.

물론 김선혁이 롤랑을 위해 라파예트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라파예트가 얄팍하게 잔머리를 굴린 것처럼 그 역시 나름대로 준비한 한 수가 있었다.

“음.”

자신의 얕은 수작이 먹혀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라파예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예상과는 달리 상대가 너무 쉽게 수락을 하자 찝찝한 기분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철컥.

김선혁은 라파예트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얼굴 가리개를 우악스럽게 내린 그가 결투의 시작을 선언했다.

“그럼 바로 시작하자고.”

바이저를 사이에 두고 흘러나온 답답한 음성에 라파예트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순식간에 검날에 오색찬란한 검광이 모여들었다.

지난번 롤랑이 보여주었던 결투 의식의 검세는 없었다. 시작부터 전력을 다할 것처럼 검력을 끌어올리는 라파예트의 태도가 남달랐다. 아무래도 지난 패배가 이 허영심 많은 기사들을 조금은 진지하게 만들어준 모양이었다.

콱.

거창을 세게 움켜쥔 김선혁이 겨드랑이 사이의 고리에 창을 고정시켰다.

“가자. 레드번.”

말이 끝나는 순간 레드번이 라파예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윈드 피어싱.”

전투는 언제나처럼 바람을 휘감은 돌격으로 시작되었다. 몇 번이고 승리를 가져다주었던 강력한 주문, 하지만 김선혁은 이번만큼은 큰 소득을 기대하지 않았다. 피할 곳이 좌우뿐인 땅 위에서와는 달리 하늘에서는 이 강력한 돌격을 피해낼 공간이 너무도 많았던 탓이다.

예상대로 라파예트와 그리핀을 날갯짓을 몇 번 하는 것만으로 강력한 돌격을 피해냈다.

지금부터다.

공격이 허무하게 빗나갔지만 실망하기에는 일렀다. 결투는 이제 시작되었고 자신은 준비한 무기 중 어느 하나도 꺼내 보이지 않았다.

김선혁은 배후를 잡고 따라붙은 라파예트를 힐끗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다.

**

곳곳에서 전투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 모든 전장의 가치가 같지는 않았다. 당연하게도 그중에서도 더 중요한 곳이 있고, 덜 중요한 곳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느 한쪽이 무게를 두었다고 해서 그곳이 상대에게도 반드시 중요한 전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녹테인과 아덴버그 양측 모두가 중요하게 여기는 전장들이 몇 군데 있었다. 이스테인 평원 역시 그중에 하나였다.

이동이 용이한 이 평원을 차지하기 위해 연대 규모의 보병들이 동원되었고, 3개 중대 이상의 기병대가 운집했다. 양측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기사와 마법사들 역시 이곳에 몰려들었다.

검병들이 감아쥔 검의 손잡이를 쥐락펴락하며 긴장을 풀었다. 창병들은 언제든지 창을 찌를 수 있도록 적당한 각도로 기울인 채 숨을 몰아쉬었다. 좌우 양익에 자리 잡은 기병들 역시 신호가 떨어지는 즉시 떨치고 나갈 것처럼 돌격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돌격의 나팔 소리도, 진군의 북소리도 들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들려온 것은 무언가가 찢어발겨지는 듯한 바람소리와 괴수의 포효소리뿐이었다.

빼애애애애액!

귀를 찢는 소리에 병사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집중해. 자세 흐트러트리지 말고.”

“들린다. 눈 굴리는 소리가.”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움직이지 마.”

병사들의 동요에 최전방에 배치된 중대장과 조장들이 호통을 치며 병사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하지만 퍼드득거리는 날개 소리와 귀청을 파고드는 굉음이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려왔을 때는 지휘관들도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헉.”

“으억.”

신음과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개중에 기가 약한 몇몇 병사들은 놀라 바닥에 주저앉기도 했다.

그렇게 소란을 떠는 병사들 위로 누런 빛 털에 새하얀 날개를 펼쳐 든 그리핀과 자줏빛 비늘을 번쩍이는 와이번이 스치듯 지나갔다.

“악!”

한발 늦게 광풍이 몰아치며 병사들을 할퀴고 지나갔다. 다소 몸이 가벼운 검병들과 창병들이 바람에 휩쓸려 휘청대다 자빠지고, 바람 소리에 놀란 전마들이 울부짖으며 난동을 부렸다.

“부상자가 없는지 확인하고, 대열을 정비해라.”

헤일로와 지휘부는 단지 스쳐간 것만으로도 대열의 일부가 무너지고 수천의 병사들이 동요하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들의 강박적인 두려움이 영 이해 못 할 것만도 아니었다. 저리 사나운 괴수들이 머리 위에서 난동을 피워대는데 평범한 병사들이 무슨 수로 버티겠는가.

다만 문제가 있다면 굳건히 버티며 병사들의 버팀목이 되어줬어야 할 기사들마저도 동요를 보였다는 것이었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차라리 허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헤일로는 동요하지 않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드라흔의 이름만 지우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리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질풍의 롤랑은 졌지만, 불꽃의 라파예트는 쉽게 질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온 하늘이 비좁다 누비며 창과 검을 부딪쳐대는 두 괴물들의 싸움에 다소 질린 어조로 부관이 말했다.

헤일로가 잠시 누렇고 붉은 두 라이더들의 그림자를 쫓았다. 부관의 말대로 라파예트는 녹테인의 수많은 병사들과 초인들을 집어삼켰던 드라흔의 무지막지한 돌격을 잘도 피해내고 있었다.

“과연 누가 이길지 궁금하군요.”

부관의 말에 헤일로는 차갑게 웃으며 전장을 나서기 전 창공의 기사들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혹시라도 내가 패배한다면 롤랑이 힘이 빠진 드라흔을 상대할 것이요.’

고고한 척이란 척은 혼자 다 해놓고 결국은 패배라는 이름의 치욕보다 다소 불명예스러운 승리를 선택한 그 행태가 지독스러울 정도로 위선적이었다. 하지만 헤일로는 라파예트를 비웃지 않았다.

애초에 드라흔만 제거하면 될 일, 창공이라는 이름이 시궁창에 처박히든 말든 그에게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기왕이면 양쪽 다 같이 죽어버렸으면 좋겠군.”

녹테인의 입장에서 보면 창공의 기사들이나 드라흔이나 전부 눈엣 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들이 한꺼번에 사라진다면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었다.

물론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만약 그게 힘들다면 라파예트와 롤랑을 꺾고 드라흔이 살아남는 게 낫겠지.”

그게 자신이 준비한 계획을 실행하기에 모양새가 좋았다.

“마법사들에게 알려라. 곧 기회가 올 테니, 망설이지 말라고.”

헤일로는 확신했다. 만약 계획이 틀어지더라도 오늘 이 자리에서 드라흔이 최후를 맞이할 거라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기회는 한 번 뿐이다. 절대로 놓치지 마라.”

아덴버그의 왕실 마법사단이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

붉은 머리의 기사는 질풍의 롤랑보다 모든 면에서 완숙한 기량을 지니고 있었고, 기수가 아닌 레드번을 노리는 집요한 공격은 상대하기가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롤랑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그리핀 역시 사납기 그지없었다.

예상대로 라파예트는 강적이었다. 만약 레드번이 허물을 벗고 성장하지 않았다면, 집요하게 달려드는 검격에 날개가 잘리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레드번은 성장했다. 또한 김선혁 역시 성장했다. 십수 차례에 달하는 돌격이 막혔다고 해서 그가 실망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언제까지 그 한심한 돌격만 시도할 참인가!”

돌격을 피해낸 라파예트가 타이밍 좋게 배후에 따라붙으며 그를 비난했다. 어지간한 기사였다면 자존심이 상해 대번에 머리를 돌려 달려들었겠지만, 김선혁은 기사 이전에 군인이었다.

알량한 자존심보다는 승리하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이게 무슨!”

갑작스레 휘몰아치는 마법력에 라파예트가 뒤늦게 이변을 알아차리고는 기겁을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아덴버그의 왕실 마법사단이 준비한 스타필드 마법이 발동하고 난 후였다.

퇴로조차 없이 빼곡하게 들어찬 마법구들을 본 라파예트는 바이저를 올리고 멍한 얼굴로 김선혁을 바라보았다.

“드라흔 경.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무슨 상황이기는. 함정에 휘말린 거지.”

그 덤덤한 대꾸에 라파예트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신성한 결투에 이게 무슨 비겁한!”

혐오를 넘어 경멸마저 담긴 음성에도 김선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 신성한 결투에 먼저 끼어들었던 게 누구지?”

애초에 결투의 룰 먼저 깬 것은 라파예트였지 자신이 아니었다.

“아니. 그 전에. 당신은 대체 전쟁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김선혁은 노골적으로 라파예트의 허영심을 비난했다.

“이곳에 모인 수많은 병사들은 네 얼빠진 기사놀이에 장단을 맞춰주기 위해 모인 들러리들이 아니다.”

“기사의 결투는 신성한 것! 대륙의 모든 기사들이 그대를 비웃을 것이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라파예트의 말에 그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라고 해. 난 군인이지 기사가 아니니까. 그깟 허울 좋은 명예 따위 나한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근본도 모르는 이방인 놈을 기사로 예우해주었더니 이 따위 수작을 부린다는 말인가! 수치도 모르는 놈!”

악에 받쳐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 라파예트의 모습 그 어디에도 고고하고 자존심 강한 기사의 위엄은 보이지 않았다.

이게 창공의 기사들 중 서열 두 번째, 불꽃의 라파예트가 지닌 민낯이었다.

새삼 놀라울 건 없었다. 만약 신의가 있는 자라면 결투에 난입하지도 않았을 테고, 약속했던 대가를 미루며 얕은 수작을 부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과오를 인정하고 명예롭게 나와 싸우자!”

김선혁은 더 이상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또 다른 창공의 기사 앞에 섰다.

“하나 묻지. 혹시 패배의 대가를 치를 생각이 있나.”

“라파예트 경을 어떻게 할 참이냐.”

롤랑은 대답 대신 욕설을 퍼부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래. 너희들은 처음부터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던 거지.”

김선혁은 마지막 기회마저 걷어차 버린 롤랑을 보며 창을 고쳐 잡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밟아주마.”

사실 그는 라파예트를 상대로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마법사라는 강력한 대공포들을 두고 굳이 자신이 힘을 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고조되는 아군의 군기를 느끼며 최대한 빨리 적을 제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번에는 제대로 힘을 발휘할 작정이었다.

“가자.”

그의 말에 레드번이 길게 울부짖으며 쏘아져 나갔다.

“진격하라!”

때를 맞춰 아덴버그 왕국군이 진격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쉽게 당하지 않는다!”

지난 패배를 떨쳐내기 위해서인지, 롤랑이 욕설을 내뱉으며 스스로를 북돋았다.

카아아악.

그런 롤랑을 향해 레드번이 목을 꿀렁거리다 입을 쩍 하고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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