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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126화 (126/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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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탈피(脫皮)(2)

아무래도 용기병대장에 오르며 아룡들의 상태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이 이렇게 메시지로까지 확인이 되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김선혁은 몸을 웅크리고 잠에 빠져든 레드번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레드번은 변태의 과정에 들어갔소. 아마 다시 깨어날 때쯤이면 전보다 한층 더 성장해 있겠지.”

아리아 아이젠은 자신이 만든 극독으로 인해 레드번이 성장하게 되었다는 말에 눈을 빛냈다.

“다음에는 조금 더 독한 걸로 준비해봐야겠네요.”

그녀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레드번이 성장하는 게 아니라 독살당할 판국이었다. 그만큼 그녀의 얼굴은 음험한 열의로 불타고 있었다.

“음….”

김선혁은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말해봐야 들어먹지도 않을 테고, 차라리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두는 게 조금이라도 덜 피곤해지는 길이었다. 게다가 한편으로는 그녀가 만든 독액으로 톡톡히 효과를 본 터라 내심 기대가 된 것도 그녀를 말리지 않는 이유였다.

설마 이렇게 한 번에 성장할 줄이야….

진즉부터 속성이 독이니만큼 독을 먹으면 성장하는 게 아닐까 짐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단박에 변태의 과정에 들어갈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뜻밖의 소득이라면 소득, 하지만 지금이 전시라는 게 문제였다.

“그나마 녹테인의 사정이 좋지 않은 게 다행이군.”

병참시설과 물자를 파괴당한 녹테인은 당분간 함부로 전선을 전진시킬 수 없을 것이다. 창공의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한 번 패배를 당하기는 했지만, 창공의 기사들이 수십 년간 쌓아온 자부심과 긍지가 당장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일반 병사들과 드잡이질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고고했고, 허영심이 강했다.

그런 그들이 적수도 없는 전장에 모습을 드러낼 리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상황이 꽤나 공교로웠다.

지칠 대로 지쳐 전선을 떠나려던 그가 전장에 남아야 했던 것은 창공의 기사들이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작 창공의 기사들이 타국의 전쟁터에까지 온 이유가 바로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떠나려던 자신을 붙든 게 바로 창공의 기사들이었고, 그들을 이곳을 불러들인 것이 자신이라니, 지독한 아이러니였다.

“아니, 악연인가.”

악연이라면 악연이었지만, 김선혁은 차라리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레드번이 깨어나기 전까지는 딱히 할 일도 없었다. 그는 두문불출하며 심상(心象)의 수련에 몰입했다.

“어디 보자… 전투기들이 어떻게 했더라….”

평면적이던 자신의 기동을 보다 입체적으로 바꾸기 위해 그는 이제는 가물가물해진 저쪽 세상에서의 기억까지 끄집어내야 했다.

영화, 게임 등 떠오르는 공중전 영상이 총동원되었고, 그는 단편적인 영상과 기억을 부여잡고 그 안에서 뭔가를 배우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물론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는 건, 지독할 정도로 스스로에 대한 계량(計量)이 필요한 훈련법이었다. 자신의 힘에 대한 면밀한 파악 없이는 그 어떤 상상도 그저 망상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본 스스로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힘을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입체적인 기동이니 공중전이니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였다.

“하… 바람, 물, 땅, 독 중 제대로 쓰는 건 바람뿐인가.”

자신은 주어진 힘을 반의반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지금은 스스로의 힘을 온전하게 끌어내는 게 급선무였다.

그는 아예 처음부터 자신의 문제점을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레드번이 그런 것처럼 그 역시 나름의 탈피(脫皮)과정에 들어간 것이다.

**

허물을 벗고 먼저 깨어난 것은 레드번이었다. 장장 닷새 만에 잠에서 깨어난 괴수는 얼핏 보기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물론 착각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레드번이 홰를 치듯 날개를 펼쳐들었을 때, 비로소 괴수의 변화가 드러났다.

무려 한 배 반 가까이 거대해진 날개, 단지 그것만으로도 레드번은 몸집이 두 배는 자란 듯했고, 전보다 훨씬 더 강인해진 느낌이었다.

빼액!

날개를 퍼덕이던 레드번이 빽빽거리며 울었다. 그 모습이 흡사 어미 새를 찾는 새끼새의 모습과도 같았다.

“드라흔 백작님을 모셔와라!”

레드번을 지키고 있던 선임 병사가 전령을 보내려는 찰나, 김선혁이 나타났다.

“백작님의 와이번이 깨어났습니다.

김선혁은 병사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오직 레드번만을 바라보았다.

빽.

주인을 발견한 레드번이 빽빽대며 날개를 펼쳐들고 제자리에서 겅중거렸다. 성장한 자신의 모습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너….”

그런 레드번을 바라보며 김선혁이 감탄을 토해냈다.

․ 와이번(레드번)(毒)(Lv. 09)

- 근력 58 / 민첩 159 / 맷집 37 / 지능 06 / 마법 저항력 52 / 복종도 51

: 상태 – 반가움, 의기양양

탈피하기 전보다 근력 수치가 4나 상승했고, 민첩은 무려 12가 올랐다. 맷집과 마법 저항력 역시 각기 3이나 올랐다. 성장하지 않은 것은 오직 지능뿐이었다.

“기왕이면 지능도 좀 올랐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을 담아 투덜거렸지만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번의 탈피만으로도 상급 병과의 이방인이 몇 번이나 레벨업을 거듭해도 모자랄 정도의 성장을 이루었다. 여기서 더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었다.

“흠….”

단지 스테이터스의 상승만으로는 당장 레드번의 변화를 실감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곧장 레드번의 위에 올랐다.

“그럼 한번 날아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드번이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상승속도였다.

변한 것은 상승속도뿐만이 아니었다. 레드번은 모든 면에서 성장해 있었다. 비행 속도, 선회력, 제동력, 그 모든 것이 예전의 레드번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너도 분했던 거구나….”

머리 나쁜 괴수라지만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래서 자신이 기수의 역량을 제대로 받쳐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했던 모양이었다.

빼애애액!

레드번이 길게 울부짖었다. 아직도 보여줄 게 남았다고 외치는 듯한 모습에 그가 레드번이 하는 양을 그대로 지켜보았다.

레드번이 목울대를 꿀렁거리더니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뱉어냈다.

카악!

척 보기에도 몸에 이로워 보이지 않는 녹빛의 액체가 전방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마치, 침이라도 뱉는 듯한 모습이었다.

빽빽.

하강한 레드번이 검게 타고 녹아버린 바위를 주둥이로 툭툭 쳐댔다. 바위가 두부처럼 으깨져 흘러내렸다.

“아….”

단단한 바위가 흐물거리며 녹아내리는 모습을 본 그는 그 모든 게 레드번이 만들어낸 광경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레드번은 꼬리뿐 아니라 입으로도 독 공격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써 레드번을 상대하는 적은 기수의 창 말고도 신경 써야 하는 게 많아졌다. 그리고 반대로 그는 적을 상대할 무기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었다.

“다 좋은데, 근데 왜 하필이면….”

레드번의 공격은 더러워도 너무 더러웠다.

**

다소 늦은 봄에 시작된 아덴버그와 녹테인의 전쟁은 여름이 다 가도록 끝나지 않았다. 맹스크 사령관이 이끄는 서부군은 녹테인의 동부지방을 여전히 점거한 채였고, 녹테인의 군대는 소실된 영토를 되찾기 위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투는 완전히 멎은 상태였지만, 그게 오래도록 지속될 거라 기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온다. 그리고 삭풍이 부는 혹한의 계절은 결코 전쟁을 하기에 좋은 시기가 아니었다.

녹테인의 입장에서는 그 전까지는 어떻게든 동부를 탈환해야 했다. 만약 해를 넘기도록 아덴버그의 병사들을 몰아내지 못한다면, 겨울 사이에 방비를 더욱 단단히 한 동부 영역을 돌려받기가 더욱 요원해지고 만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헤일로는 창공의 기사들을 닦달해댔다.

“본인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 무슨 수로 그를 끌어낸단 말이오.”

하지만 라파예트는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드라흔을 핑계로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않았다.

“이곳저곳을 들쑤시다 보면 제 놈도 모습을 드러낼 게 아니겠소?”

“나는 보병들을 상대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오. 내가 받은 명령은 오직 드라흔을 꺾으라는 것뿐이었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얄미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당신들이 드라흔을 꺾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이러는 거 아니요. 그때 드라흔을 처리했다면 이렇게 허송세월을 보내는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오.”

헤일로가 참지 못하고 노골적으로 창공의 기사들을 도발했다.

“사실은 드라흔이 두려운 거 아니오?”

정도를 지나친 도발은 차라리 모욕에 가까웠고 라파예트의 표정이 얼음처럼 냉랭해졌다.

“드라흔 하나가 두려워 웅크린 채 나아가지 못하는 건 녹테인이지 우리가 아니오. 애초에 우리 창공의 기사들이 왜 이곳까지 오게 된 건지, 잊지 않았으면 좋겠소.”

전에도 이런 논쟁이 몇 번이나 있어왔다. 그때마다 라파예트는 드라흔에게 발이 묶여 동부 탈환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녹테인의 사정을 꼬집었고, 헤일로는 번번이 분한 마음을 내리눌러야 했다.

“정 급하면 녹테인이 먼저 아덴버그를 휘저어보지 그러시오. 들쑤시다 보면 드라흔이든 뭐든 튀어나오는 게 있겠지.”

그런데 평소였다면 이쯤에서 씩씩거리며 물러났을 헤일로가 오늘은 어쩐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게 웃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라파예트는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움직여볼 참이었소.”

헤일로의 명령에 웅크리고 있던 녹테인의 병사들이 진군을 시작했다.

**

일시에 전선을 넘은 녹테인의 병사들, 아덴버그의 서부군은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대응에 나섰다.

“죽여! 아덴버그 새끼들을 몰아내라!”

“네놈들에게는 땅 한 뼘 내줄 수 없다!”

악에 받힌 병사들의 고함소리와 비명이 금세 전선 전체로 퍼져나갔다.

지거나 이기거나, 또는 죽거나 살거나. 하루에도 몇 번씩 승자와 패자가 뒤집히고, 땅의 주인이 바뀌었다.

엇갈리는 희비 속에서 전투는 날이 갈수록 격해졌다.

그 와중에도 양국의 기사와 마법사들은 전투에 나서지 않고 한발 물러나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진짜 전투는 하늘에서 승부가 나고 난 다음부터다.”

그들은 창공의 기사들과 드라흔의 승부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의 주인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향후 전쟁의 양상이 달라질 터, 그들은 웅크린 채 때를 기다렸다.

그들의 기다림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드라흔이 전선에 나타난 것이다.

창공의 기사들은 숙적의 등장에 지체 없이 그리핀 위로 올라탔다. 오늘이야말로 드라흔의 지난 패배를 설욕하고 창공이라는 이름을 우뚝 세울 것을 그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비장한 각오와 의욕이 꺾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 어떻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다시 재회한 드라흔의 와이번은 너무도 변해 있었다. 롤랑의 그리핀 드본보다 다소 작았던 덩치야 여전했지만, 활짝 펼쳐 든 날개만큼은 라파예트의 그리핀 미온테를 압도할 정도로 거대했다.

크르르르.

위기감이라도 느낀 것인지 그리핀들이 전에 없이 사납게 목을 울리며 갈기를 세우고 날개를 펼쳐들었다. 하지만 거대한 미온테조차도 날개를 펼친 와이번에게 미치지 못했으니, 과연 저 와이번이 전에 상대했던 그놈인지조차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그리핀이 으르렁거리자 와이번이 고개를 도전적으로 눈을 번뜩였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눈동자는 잔뜩 독이 올라 녹빛으로 번들거렸다.

“워, 워. 아직 아니야.”

만약 기수의 제지만 아니었다면 당장에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처럼 전투적인 눈빛이었다.

“대체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몸에 좋은 것 좀 먹였지.”

라파예트의 질문에 바이저를 올린 드라흔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오늘은 누가 먼저? 그쪽의 롤랑 경이 다시 도전할 건가, 아니면 이번에는 라파예트 경이 나설 건가?”

지독스러울 정도로 상대를 깔아보는 오만한 태도, 창공의 기사들이 발끈해서 입을 열려는 찰나 드라흔이 먼저 선수를 쳤다.

“아, 그 전에 계산부터 확실하게 해야지.”

드라흔은 얄밉게 실실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롤랑 경의 목숨값, 그리고 약속을 어긴 대가. 그것부터 먼저 청산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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