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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124화 (124/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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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공중전 (2)

검과 창을 맞부딪치며 서로의 힘을 견주어보고 각자 자신의 비기를 꺼내든다. 그리고는 전력을 다해 마지막의 일격을 주고받는다.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롤랑이 원했던 결투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얼빠진 기사 놀음에 어울려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진짜 싸움에서 그린 듯한 탐색전은 필요 없었다.

선빵 필승.

김선혁은 언제나 이 투박한 문장을 신념처럼 여겼고, 늘 승리해왔다. 그는 이번에도 자신의 신념대로 처음부터 윈드 피어싱 스킬을 꺼내 들었다.

화아아아악!

드높은 하늘을 야생마처럼 뛰어다니던 바람이 순식간에 그의 창끝에 모여들고, 하나의 거대한 쐐기가 되었다.

빼애애액!

흥분한 레드번이 이제껏 억누르고 있던 흉성을 터뜨리며 그리핀에게 달려들었다.

크아아아.

갑작스러운 돌격에도 그리핀은 지지 않고 마주 울부짖어왔다. 이 드넓은 창공에서 당황한 것은 오직 그리핀의 기수뿐이었다.

김선혁은 이 한 번의 공격으로 부디 저 정신 나간 기사를 거꾸러트릴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다급히 피워 올린 검광이 윈드 피어싱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 그리핀이 쑥, 하고 곤두박질 친 것이다.

이제껏 대지에 발붙인 채 좌로 우로 몸을 피해내는 게 고작이었던 자들을 상대하던 김선혁이 예상할 수 없었던 입체적인 기동이었다.

기습적인 첫 공격이 허무하게 빗나가자 그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쉽게 생각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군.

상대가 자신과 동등한 조건을 가진 라이더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다시 창을 고쳐 잡고는 그리핀을 찾았다.

순식간에 저만치 떨어져 내린 그리핀이 거세게 날갯짓을 하며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이이! 비겁한!”

결투 선언 전에 공격을 한 것도 아니고, 달리 수작을 부린 것도 아니다. 도대체 뭐가 비겁한 건지 이해할 수 없는 롤랑의 욕설에 그는 피식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질 것 같지 않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롤랑의 모습을 잠시 살펴본 그가 또 다른 창공의 기사를 찾았다. 라파예트는 처음의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어쩐다.

밑천을 전부 꺼내 들기에는 라파예트의 존재가 영 껄끄럽기만 했다. 하지만 가장 쉬운 길을 두고 멀리 돌아가는 건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아티야.”

김선혁은 하늘에서만큼은 절대적인 존재, 바람의 정령을 소환해냈다.

“꺾어.”

헌신적인 아티야는 순식간에 날아들어 그리핀의 날개를 잡아챘다.

까아아악!

그런데 그 순간 허공에서 머리를 튼 그리핀이 갑작스레 아티야를 공격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공격을 당해본 적도 존재를 들킨 적도 없는 정령이 처음으로 상대의 공격에 노출된 것이다.

“꺄아악!”

날카로운 부리에 씹혀 뜯겨져나간 여인의 허리, 김선혁은 눈을 부릅떴다.

“드라흔이 바람의 정령과 관계가 있을 거라는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던 바, 그리핀이야말로 바람을 지배하는 신수(神獸)이니 너의 힘은 이 결투에서 통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잠시 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허리가 뜯겨져 나간 아티야가 돌아왔다.

“주, 주인님….”

바람으로 이루어진 신체이니만큼 금세 그 흉물스러운 상처는 사라졌지만, 아티야는 여전히 고통스러워 보였다.

“사, 상처가 회복되지를 않아요….”

겁에 질린 그녀를 바라보던 김선혁이 고개를 돌려 롤랑을 노려보았다.

“너 이 새끼….”

“그 정도 정보도 없이 결투를 신청했을까.”

조롱기 가득한 음성에 활활 타오르던 분노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베일에 싸인 그리핀 라이더들에 비해 자신의 힘이 지나치게 많이 노출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하.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네.”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졌는데, 멍청하게도 밑천을 숨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거듭된 승리와 전공에 도취되어 자신도 저 얼빠진 기사만큼이나 멍청해졌던 모양이다.

“무슨 헛소리냐!

벌써 이겼다고 생각한 것일까. 승리를 거머쥔 듯 격앙된 음성에 김선혁이 차갑게 말했다.

“그리핀이야말로 바람을 지배하는 신수라고?”

이제는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어진 그는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럼 어디 한 번 지배해봐.”

그의 주변으로 사나운 바람이 모여들었고, 이내 광풍은 커다란 짐승이 되었다.

**

“끝났군.”

멀리 물러나 팔짱을 끼고 있던 라파예트는 바람의 정령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승리를 확신했다. 저 형체 투명한 정령이야말로 드라흔이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었고, 그의 적을 갈기갈기 찢어발긴 가장 날카로운 이빨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이빨은 그리핀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리핀은 바람의 정령을 잡아먹고 그 원천마저 지배하는 신수, 설령 상급 정령이 이 자리에 나타난다고 해도 그리핀의 먹이가 될 뿐이었다.

그러한 사정이 있었기에 그리핀도르의 왕실이 아끼고 아끼던 창공의 기사를 기꺼이 드라흔의 대적자로 내어준 것이다.

“롤랑 녀석. 와이번이 상하지 않게 적당히 해야 할 텐데.”

바람이라는 무기를 잃은 드라흔, 상급 기사의 경지에 이르러 검력을 자유자재로 수발하는 롤랑, 승부는 볼 것도 없이 롤랑의 것이었다. 애초에 드라흔은 검력을 깨닫지 못한 존재였으니까.

“생각보다 영 싱겁게 끝나겠어.”

사태 파악이 아직도 되지 않은 것일까. 그게 아니면 자신의 무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일까. 드라흔이 다시 한 번 바람의 힘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음?”

드라흔을 조롱하며 방관자의 입장을 취하던 라파예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주변에 모여드는 바람의 기세가 범상치 않았던 것이다.

“허. 오기인가.”

단지 그뿐이었다. 크건 작건, 날카롭건 무디건 간에 바람은 그리핀의 먹이에 불과했다. 그래서 라파예트는 롤랑을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이 오만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롤랑!”

끝도 없이 모여드는 바람의 기세, 라파예트가 비명처럼 동료 기사의 이름을 불렀다.

“맞서지 마라! 롤랑!”

안타깝게도 그의 외침은 휘몰아치는 바람의 포효에 집어 삼켜졌고, 롤랑에게 닿지 않았다.

“물러나!”

이건 그리핀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힘이 아니다. 이런 걸 먹어치우려고 했다간 그리핀은 배가 터져 죽고 말 것이다.

하지만 혈기왕성한 롤랑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라파예트의 눈에 거대한 바람을 향해 쏘아져 나가는 그리핀 라이더의 모습이 보였다.

“롤라아아앙!”

**

“어? 어?”

그리핀 라이더와 와이번 라이더가 격돌하는 희대의 순간을 숨죽인 채 바라보고 있었던 녹테인의 병사들은 뒤늦게 자신의 안일함을 후회해야했다.

“피, 피해! 휘말려든다!”

“도망쳐!”

까마득한 하늘에서 시작된 광풍이 벼락처럼 대지에 내리꽂힌 것이다.

쾅!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던 목책이 부러지고, 바닥에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났다. 광풍에 갈기갈기 찢겨나간 병사들의 시체가 사방에 즐비했다.

“끄아악! 누, 누가 좀….”

운 좋게 목숨을 건진 병사 하나가 잘려나간 다리를 부여잡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주둔지 그 어디에도 도움의 손길을 청할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너, 너무 아파. 제발….”

병사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상처 입은 괴수가 흐느끼는 병사 위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까아아아악!

묵사발이 된 병사의 시체 위에서 그리핀이 허우적거렸다. 몇 번이나 일어나려 했지만 꺾여버린 앞발 탓에 볼썽사납게 배를 깔고 엎어지기 일쑤였다.

“드본! 날아!”

평소라면 그 상처를 붙들고 난리를 피워댔을 롤랑이 드본을 다그쳤다. 짧게 울음을 토해낸 그리핀이 보기 흉하게 깃털이 빠진 날개를 휘적거리며 날아올랐다.

쾅.

그 순간 방금 전까지 그와 드본이 있었던 자리로 발톱을 세운 와이번이 떨어져 내렸다.

“이익!”

겨우 와이번의 강습을 피해냈지만,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여전히 와이번은 자신을 노리고 있었고, 상처 입은 드본은 와이번을 뿌리칠 정도로 빠르게 날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찢기고 베어져 나간 상처에서 울컥거리며 피를 쏟아내면서도 주인의 명령을 따라 필사적으로 날아오르는 드본, 롤랑은 이를 악물고는 드라흔을 노려보았다.

대체 그 무지막지한 힘은….

바람을 지배하는 신수 그리핀으로도 감당하지 못할 거대한 폭풍, 거기에 더해 지칠 줄 모르고 달려드는 공격, 롤랑은 드라흔이 도무지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쐐에에에엑!

다시금 창을 곧추세운 드라흔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짓쳐들었다. 최대한의 검력을 일으켜 반격을 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상대의 창에 비해 자신의 검은 너무도 짧았다.

결국 롤랑은 맞서 싸우는 대신 몇 번이나 그래왔던 것처럼 드본과 함께 달아나는 것을 택해야 했다.

살면서 이런 수모를 겪어보았던가. 치욕적인 도주를 거듭하면서 롤랑은 차라리 억울한 심정이 되었다.

저 자는 뭔가 정상이 아니다.

기사들 간의 전투란 으레 서로의 검력을 견주어 경지의 고하를 판가름하는 식이었다. 그리핀 라이더들 간의 전투도 마찬가지였다.

위치를 잡고 간격을 확보하는 데 그리핀이 큰 역할을 하지만, 결국 승부는 검력의 경지에 달려 있었다. 그건 일곱 그리핀 중에서도 가장 날래고 빠른 드본을 타는 롤랑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드라흔은 그런 상식이 도무지 통하지 않았다.

드라흔은 무식할 정도로 직선적인 공격만을 해왔다. 마치 기사가 아닌 기병이 돌격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처음에는 그 단순한 공격을 가벼이 여겼고, 돌격이 큰 효과를 보이지 못하자 곧장 도망치듯 빠져나가 재돌격을 시도하는 모양새를 비웃었다.

비록 말도 안 되는 바람에 드본이 다치기는 했지만, 곧 반전의 기회가 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롤랑은 이내 자신이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마치 기병처럼 돌격만을 고집하는 드라흔은 평범한 기병이 아니었고, 그가 올라탄 것은 그저 그런 전마가 아니었다.

그 위력이 같을 리가 없었다.

롤랑이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고 난 후였다.

쾅!

드라흔이 스치듯 달려들어 창을 때려 박고는 멀리서 선회하여 다시 속도와 무게를 실어 창을 찔러왔다. 그때마다 롤랑은 내장이 흔들리는 충격을 받아야 했다.

“크윽.”

그렇게 정신없이 두들겨 맞기를 한참, 어느 순간이 되자 롤랑은 상대의 종적을 놓치고 말았다. 사방팔방에서 휘몰아치는 공격에 이리저리 내몰리다 보니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잡았다.”

상대를 찾아 사방을 둘러보던 롤랑이 문득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섬뜩한 음성에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아….”

소리 없이 내리꽂히는 창끝을 본 롤랑이 죽음을 직감하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롤랑은 용기를 내어 슬며시 감았던 눈을 도로 떴다.

“결투에 끼어들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앞을 막아선 그리핀,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탄 거구의 기사를 본 롤랑은 자신의 결투가 끝이 났음을 깨달았다.

**

“아무래도 우리가 당신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모양이오.”

롤랑의 앞을 막아선 라파예트를 본 김선혁은 선선히 창을 거두어들였다.

애초에 라파예트가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내지른 공격이었다. 이제 와서 새삼 결투의 끝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아쉬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이제 당신이 날 상대할 건가.”

도발적인 말에도 라파예트는 시종일관 정중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결투에 끼어들지 않겠다던 스스로의 말을 지키지 못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상황이 영 껄끄러우니, 내 차례는 다음으로 미루어야 할 것 같소.”

김선혁은 라파예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공감을 표했다.

언제 몰려들었는지 녹테인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뭔가 수작을 부릴 것처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결투의 대가와 약속을 어긴 빚은 다음에 받도록 하지. 부디 그때 가서 모른 척하지 말라고.”

라파예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김선혁은 잠시 패배감에 젖은 창공의 기사들을 바라보다 유유히 자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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