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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공중전 (1)
“왜 이렇게 오랜만에 연락한 거야?”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금 말을 걸어온 용의 음성, 김선혁은 할 말이 참으로 많았다.
페어리 드래곤이 깨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대체 얼마나 더 성장해야 용과 직접 만날 수 있게 될지, 그는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흐를 것이니, 그대의 의문 역시 때가 되면 모두 온데간데없이 될 것이리라.]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던 용은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두루뭉술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여전하네.”
답답할 만도 하련만 김선혁은 그 변함없는 음성에 차라리 안도했다.
“그에 반해 나는 꽤 많이 변했는데 말이지.”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중에 자신의 손으로 해한 사람들의 수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모든 것이 그를 변하게 만들었고, 이제는 아무것도 몰랐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전혀 변하지 않은 용의 목소리가 그토록이나 반가웠던 것은 그래서였으리라.
[전보다 한층 더 굳건해졌고, 더욱 깊어졌으니 그대의 변화는 실로 바람직하다.]
“이야. 별일이네. 네가 칭찬도 다 해주고.”
얼마나 고고한지 칭찬 한 번 한 적이 없던 용이 처음으로 그를 추켜세워 주었다.
“이제 그럼 우리 만날 수 있는 건가?”
조금은 기대하는 마음이 되어 물었지만, 아직 때가 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용은 다시 한 번 자격이 부족하다며 그 시기를 뒤로 미루었다.
“와, 너 진짜 비싸게 구는구나.”
김선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는 이제껏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멈춤 없이 나아갈지어다. 그리고 그때야말로 약속된 미래, 창대한 영광을 맞이하게 되리라.]
용은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제 할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때가 그대와 내가 만날 순간이니, 그대는 용의 아종들을 전부 굴복시켜 진정한 자격을 얻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대는 또 한 번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 또 할 일을 주네.”
괜스레 심술이 났다. 일방적으로 통보할 뿐인 용의 태도에 배알이 꼴린 것이다.
어차피 진짜 용과 만나지 않더라도 지금 이룩한 힘만으로도 앞가림을 하기에는 충분했다. 굳이 고생을 해가며 용을 만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혁은 오기가 생겼다. 대체 얼마나 잘난 존재기에 이렇게 비싸게 구는 것인지 확인해 보고픈 심정이었다.
“좋아. 까짓거, 해보지 뭐. 어차피 아룡들을 완전히 길들이는 건 내가 원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김선혁은 마뜩잖은 내심을 숨기고, 선선히 용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근데 말이야.”
다만 단서가 붙었을 뿐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고생하는데 너도 뭔가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겠어? 너무 불공평하잖아. 나는 벌써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모든 보상은 약속된 그날….]
“외상은 사절이야.”
용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돕는 것은 그로 인해 뭔가 얻는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사정을 숨긴 채 마치 일방적으로 혜택만을 베푸는 것처럼 구는 용의 태도는 그다지 솔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대와 나 사이에 놓인 약속은 그런 삿된 기준으로 재단할 수 없는 것, 하지만 그대가 인간이기에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하노라.]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풍 속성을 선물해준 용이라면 기꺼이 거래에 응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대의 바람은 이루어질 것이다.]
“뭐?”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용은 보상을 약속했지만, 그 보상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아니, 언제 어떻게 보상을 얻게 될 것인지도 말해주지 않았다.
“용아?”
인사조차 없이 사라진 것을 보니, 자신이 신성시하는 무언가에 대해 세속적인 관점을 들이댄 것이 여간 기분이 상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 그래도 말은 해주고 가야지.”
역시나 용은 대화하기에 그다지 좋은 상대가 아니었다.
**
결국 용이 줄 보상이 무엇인지는 끝까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김선혁은 안달 내지 않았다.
용은 자격이 부족하다 했지만 지금 가진 힘만으로도 그는 험난한 전장에서 살아남았고 혁혁한 공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뭔지도 모를 보상에 목을 메달 필요는 없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용이 무엇을 주느냐가 아닌, 창공의 기사들을 어찌 상대하느냐였다.
“우, 우웩.”
허리를 접고 토악질을 해대는 아리아 아이젠을 본 김선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무리인가.”
허약한 마법사는 단순한 이동은 몰라도 전투를 목적으로 한 과격한 기동을 견뎌내지 못했다. 마법을 통해 창공의 기사들을 견제한다는 발상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결국 남은 것은 단신으로 그들을 상대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물론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창공의 기사와 그리핀은 충분히 강해 보였지만, 자신과 레드번이 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하나가 아닌 둘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을 뿐이었다.
“흠….”
최악의 경우 동시에 둘을 상대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아티야가 있는 이상 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모험을 할 필요는 없었다.
꽤나 오만해 보이던데….
도전적으로 턱을 치켜들고 자신을 바라보던 곱상한 기사를 떠올린 김선혁은 어쩌면 그 기회가 생각보다 쉽게 올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핀도르에서도 최고의 대접을 받았을 창공의 기사이니만큼 그 자부심이 하늘을 찌를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는 오만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기사들을 상대하는 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도발해볼까.”
그들의 호승심에 작은 불씨를 던지고 자존심에 미세한 상처를 내는 것만으로도 자존심 강한 기사들은 금세 눈이 뒤집어져 달려들고 말 것이다.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맹스크 사령관은 그를 붙잡는 대신 가급적이면 아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곳에 머물 것을 당부했다. 그는 ‘그러마.’하고 대답하고는 레드번 위에 올랐다.
**
“하….”
김선혁은 허탈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창공의 기사들을 꾀어낼 생각에 머리를 싸맸던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창공의 기사들은 굳이 하나씩 따로 떼어 꾀어낼 필요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애초부터 그를 협공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질베르 실베인 라파예트. 창공의 기사들 중 두 번째요.”
전선을 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그리핀도르의 기사들은 한가롭게 인사를 건네 왔다.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듯 시종일관 웃고 있었다.
“장 마리 드 롤랑. 반갑소.”
첫 만남에서 죽일 듯이 자신을 쫓던 기사들이라고는 상상조차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끙. 선혁 라인펄 김 드라흔이요….”
저쪽에서 인사를 건네니 마냥 무시하기도 찝찝했다. 마지못해 마주 통성명을 해주니 그들이 웃어댔다.
“경계하지 않으셔도 된다오. 비록 왕실의 명령으로 이곳에 왔지만, 사실 남의 전쟁에 핏대를 세우고 달려들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점입가경, 그들이 하는 말이 갈수록 가관이었다.
“그럼 대체 왜 여기까지….”
창공의 기사들을 상대하기 위해 영지로 돌아가는 것조차 미루고 전선에 남은 김선혁이다. 그런데 상대가 이리 온화하게 나오니 대체 그 저의를 알 길이 없었다.
“누가 진짜 창공이라는 이름을 가져갈 자격이 있는지 겨뤄보기도 하고, 뭐, 겸사겸사 왔다고 칩시다.”
“아….”
김선혁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이들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설마 결투를 원하는 거요?”
“바로 그렇소.”
황당하게도 이들은 전쟁이 아닌 결투를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미친….
욕설이 절로 나왔다.
아무리 왕도에서 온갖 보살핌을 받으며 고고하게 살아온 기사들이라고 해도 정도가 있다. 수백 수천의 생목숨이 스러지는 전장에서 한가롭게 결투를 운운하는 그 머릿속이 궁금할 지경이었다.
“혹시 지금의 자리가 격에 맞지 않다 생각하는 거요?”
표정이 굳은 그를 보고 오해를 했는지, 라파예트라 자신을 소개한 머리 붉은 기사가 물었다. 그는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고,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따로 자리를 마련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경이나 우리나 왕국의 보배가 아니요? 지금이 아니면 언제 어디서 우리가 자웅을 겨루겠소. 또한 이 드넓은 하늘이 우리의 전장이 될 테니, 그 또한 낭만적이지 않소?”
라파예트의 장황한 말에 롤랑이란 기사도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미쳤다.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쳤다.
전장에서 낭만을 찾고, 격을 찾는 그 행태가 도무지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 넓고 높은 하늘이야말로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신성한 결투장이 될 것이고, 저 아래에서 우리를 올려다보는 수많은 병사들이 결투의 증인이 되어줄 것이오.”
김선혁은 더 이상 들어줄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게 당신들이 이곳에 온 이유의 전부요?”
그의 질문에 롤랑이 나섰다.
“경이 진다면 우리와 함께 그리핀도르로 갑시다.”
“만약 싫다면?”
삐딱하게 대꾸를 하니, 롤랑과 라파예트가 처음으로 전장에 어울리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경을 꺾고 경의 와이번만 따로 데려가야겠지.”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어 보이는 두 기사를 보니 결투라는 황당한 제안 너머에 숨겨진 진짜 목적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내가 이긴다면 당신들은 뭘 들어줄 거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우리가 진다면 뭐가 됐든 경의 처분을 따르도록 하겠소.”
자신이 질 거라 여기는 기색 따위는 터럭만큼도 보이지 않는 기사들의 태도에 김선혁이 차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 진짜 어지간히 건방지군.”
더 이상은 정신 나간 기사들의 놀이에 어울려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건방이라. 며칠 전 그렇게 꼬리를 말고 도망치던 경이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마치 연회에서 마주치기라도 한 듯 훈훈했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허울 좋은 예의 너머에 숨겨져 있던 광오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핀도르의 장 마리 드 롤랑이 아덴버그의 드라흔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롤랑이 나서자 라파예트가 슬그머니 뒤로 물려났다. 자신의 말대로 일대일 결투를 위해 자리라도 비켜줄 생각인 모양이다.
“걱정 마시오. 말했다시피 난 협공하려고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오.”
“어련하시겠소.”
차갑게 쏘아붙인 김선혁이 까마득한 아래에 있는 대지를 살펴보았다. 이쪽을 올려다보는 수많은 병사들이 보였지만, 딱히 위협이 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라파예트의 말대로 이 창공은 이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라이더들의 전장이었다.
“하….”
김선혁은 한숨을 내쉬며 창을 잡았다. 굳이 이렇게 일대일로 싸울 기회를 준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철컥.
롤랑이 독수리의 부리를 닮은 얼굴 가리개를 내리고, 2미터에 육박하는 기형 장검을 뽑아 들었다. 순식간에 오색찬란한 검광이 검날에 모여들었고, 롤랑은 빛에 휩싸인 장검을 가슴 앞에 세워 들었다.
착.
그리고는 마치 의식이라도 치르듯 검을 보기 좋게 이리저리 휘두르다, 도로 제 가슴 앞에 세웠다.
가지가지 하는구만.
하지만 그에 맞서는 김선혁은 아무 말 없이 바이저를 내리고 겨드랑이에 달린 고리에 거창의 고리를 끼웠을 뿐이었다.
“그럼 시작….”
“윈드 피어싱.”
상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선혁이 승리의 주문을 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