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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창공의 기사 (4)
칼스테인 요새로 복귀 중이던 김선혁은 문득 기이한 감각을 느끼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오랜만에 시원스레 마법을 난사한 덕에 녹초가 되어버린 아리아 아이젠이 그의 알 수 없는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말없이 허공 저 뒤를 노려보았을 뿐이다.
“너무 빠른데?”
풍령의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저 너머의 하늘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기척이 둘이었다. 그런데 그 속도가 범상치 않았다.
그 어떤 준마보다도 빠르고 거침없는 속도는 절대로 녹테인의 궁기병 따위가 아니었다.
“창공의 기사님들이로군.”
김선혁은 잠깐의 생각 끝에 따라붙은 추적자들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창공의 기사, 그들이 전선에 당도한 게 틀림이 없었다. 그들을 제외하고는 레드번을 추격할 존재가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구만.”
그리핀 라이더들이 곧 당도할 때가 됐다 생각했지만, 그게 하필이면 오늘일 줄은 몰랐다. 그는 빠르게 아리아 아이젠의 상태를 확인했다.
“무리예요. 작은 마법이라면 모를까.”
그녀는 지나친 마법력의 사용으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그는 그녀가 전투를 수행할 상태가 아님을 파악했고, 레드번 역시 체력이 떨어진 상태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오늘만 날이 아니지.
그는 굳이 둘씩이나 되는 창공의 기사를 이 자리에서 상대하는 것을 대신, 빠르게 도주하는 것을 선택했다.
“좀 더 빨리 가자. 레드번.”
지친 마법사의 상태를 고려해 다소 느긋하기까지 하던 레드번의 비행이 한층 과격해졌다.
하지만 추격자들은 여전히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조심!”
그는 아리아 아이젠에게 짧게 경고하고는 레드번을 더욱 재촉했다.
빼애액!
레드번이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속도를 올렸다.
그 사이 상당한 거리를 좁힌 그리핀 라이더들이 이제는 까만 점처럼 보일 지경이 되었다. 그는 뒤를 힐끗 바라보고는 잠시 망설였다.
레드번이 빠르긴 하지만 그리핀도 만만치 않았다. 하물며 이쪽은 두 명이나 되는 기수를 태우고 있었다. 어쩌면 요새에 도착하기도 전에 꼬리를 잡힐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와서 맞서 싸우기에는 레드번도 아리아 아이젠도 지쳐 있었다. 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굳이 준비도 부족한 상태로 맞서 싸울 이유가 없었다.
그는 칼스테인 요새와의 거리를 가늠해보고는 아티야를 불러냈다.
“도와줘. 아티야. 레드번이 많이 지쳤어.”
“저런. 가엾어라. 내가 도와줄게.”
혀를 빼물고 필사적으로 날갯짓을 하는 레드번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아티야가 이내 바람으로 화해 사라졌다. 그리고 다소 떨어졌던 레드번의 비행에 금세 가속도가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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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거의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빨라졌어.”
질베르 실베인 라파예트는 꽁지까지 따라붙었다 생각했던 와이번 라이더가 금세 시야에서 사라지자 인상을 찌푸렸다.
“와이번이란 놈이 설마 그리핀보다 빠른 건가?”
“그럴 리가요. 이 녀석보다 빠른 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창공의 거센 바람 속에서도 용케 라파예트의 혼잣말을 들은 장 마리 드 롤랑이 자존심이 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라파예트 경의 미온테는 너무 느려요. 덕분에 드본이 제 속도를 낼 수가 없잖아요.”
그러고 보니 라파예트가 탄 그리핀과 롤랑이 탄 그리핀의 덩치가 판이하게 달랐다. 라파예트의 미온테가 덩치가 크고 사나워 보인다면, 롤랑의 드본은 훨씬 더 작고 날렵해 보였다.
“먼저 갈 테니까, 천천히 따라오세요.”
승부욕이 발동한 듯 롤랑이 서서히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잊지 마. 오늘 우리의 목적은 인사일 뿐이다. 아무리 전날 충분히 쉬었다고 하지만 미온테와 드본도 피로가 쌓였을 거다.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
라파예트의 잔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롤랑이 멀찌감치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성질 급한 거 하고는.”
금세 거리가 벌어져 까만 점처럼 보이는 롤랑을 바라보던 라파예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겠지.”
말과는 달리 라파예트는 그다지 걱정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승부욕이 발동한 롤랑이 아덴버그의 와이번 라이더를 덮치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거라 여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창공의 기사들은 애초에 아덴버그의 와이번 라이더를 상대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창공에서만큼은 최고라 여겼고, 그중에서도 롤랑은 공중전에서만큼은 상위에 꼽히는 기사였다. 패배는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씩이나 되는 창공의 기사들이 이곳에 온 것은 따로 노린 것이 있었던 탓이다.
**
김선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티야의 도움을 받아 겨우 추격을 뿌리치는가 싶더니, 개중 하나가 갑작스레 속도를 올리며 뒤를 따라잡았다.
“저게 그리핀….”
이제는 육안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 그는 독수리와 사자를 섞어둔 듯한 그리핀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토해냈다.
강인하면서도 날렵한 그리핀은 생김새만 보면 레드번에 못지않았다. 거기에 더해 화려한 갑주를 차려입은 기수까지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올라타 있으니 신화 속에서 갓 튀어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음.”
왼쪽 어깨에는 독수리가, 오른쪽 어깨에는 사자가 조각된 갑주를 차려입은 화려한 기사가 독수리의 머리를 본뜬 투구의 면갑을 들어 올렸다. 선 고운 얼굴이 오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뭐 어쩌라고.”
그 도전적인 시선에 괜스레 기분이 상한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작전상 후퇴라 생각했는데, 눈을 마주하고 나니 자신이 겁을 집어먹고 달아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새삼 이제 와서 레드번의 머리를 돌릴 생각이 없었다. 이제 곧 칼스테인 요새가 코앞이다. 굳이 무리해서 저들을 상대하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음….”
당장에라도 레드번의 머리를 돌려 그리핀을 들이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래도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하늘에서만큼은 자신이 최고라는 자부심이 생기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런 기분이 든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는지, 얌전히 거리를 두고 따라오던 추격자가 바짝 기세를 올려 레드번의 배후를 잡았다.
이제는 언제 창공의 기사와 얽혀 허공에서 드잡이질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그때 아리아 아이젠이 짧게 주문을 내뱉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 하늘에 불꽃이 튀었다.
“마법사단의 마법사들과 정한 신호예요. 곧 화답이….”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칼스테인 요새 쪽에서 수도 없이 마법구가 솟구쳤다.
“왔군요. 벌써.”
각기 화염과 냉기, 전격의 기운을 담은 마법구가 하늘을 수놓자, 뒤를 따르던 창공의 기사가 잠시 주변을 선회하다 하늘 저 멀리 사라졌다.
“드라흔 백작!”
갑작스레 일어난 소란에 바깥의 동정을 살피던 맹스크 사령관이 레드번과 함께 하강하는 김선혁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
“괜찮은가!”
사령관은 그와 아리아 아이젠, 그리고 레드번까지 터럭만 한 부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안심이 된 얼굴을 해 보였다.
“설마 창공의 기사들이 벌써 전선에 당도했을 줄이야.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구먼.”
“근데 이게 대체….”
김선혁은 그리핀 라이더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늘을 가득 메우고 사라지지 않는 마법구를 바라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아아. 어떻소? 저게 바로 우리 마법사단이 준비한 창공의 기사들에 대한 대비책, 스타 필드(Star Field)요.”
언제 나타난 것인지 노마법사가 고개를 껄껄거리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최소한 하루 동안은 창공의 기사가 아니라 그리핀 떼가 몰려와도 뚫지 못할 거라 내 장담하오.”
“혹시….”
크기도 작고 기운도 더 다양하긴 하지만, 언젠가 보았던 녹테인 마법병대의 마법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느낌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으니 노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드라흔 백작께서 상대한 녹테인 마법병대의 마법을 토대로 개량한 마법이지. 애초에 그들의 마법도 크게 특별할 것은 없는 마법의 배열일뿐, 이쪽은 추적, 요격 기능이 있는 고유 마법이라오.”
역시나 예상대로 자신의 증언을 토대로 그들이 마법을 재현했다는 사실에 김선혁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마법사들이 마법에 관한 한 천재에 가까운 이들이라는 이들을 알고는 있었지만, 한 번 들은 것만으로 마법을 따라 해낼 줄은 상상도 못한 것이다.
“사실 스타 필드도 크게 대단할 건 없지만, 정말 대단한 건 마법의 유지에 필요한 마법력이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 사단에는 마법력에 관한한 독보적인 존재가 있지.”
그렇게 말한 노마법사가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영문을 알 수 없어 그가 의아한 얼굴을 해 보이니 마법사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이은서라고 아시오? 백작과 같은 이방인 출신의 마법산데.”
이은서라면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존재였다. 말단 기병에 불과하던 시절 주둔지의 보수를 위해 귀한 대접을 받으며 초빙되었던 마법사이자, 그로 인해 마법이 실패하여 경력에 치명적인 오점이 생긴 상급 병과의 이방인이었다.
또한 멋대로 자신을 연회에 불러놓고 별다른 특이점을 발견할 수 없자 아예 없는 사람 취급했던 여인이기도 했다.
“알고 있죠. 그녀가 여기에 있었군요.”
마법사라는 족속들이 원체 로브로 몸을 꽁꽁 싸매고 있는지라 그녀가 이곳에 있는지도 몰랐다.
“역시 알고 있었구먼. 그녀가 이번 마법의 가장 큰 공로자라오.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런 비효율적인 마법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테니.”
자신과는 달리 처음부터 중앙에서도 귀하게 대접을 받았던 이은서였다. 과연 기대대로 성장한 것인지 노마법사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꽤나 대견해 하는 눈치였다.
“아마도 우리 왕국에서는 그녀가 최초로 2차 전직을 한 이방인이지 싶소. 그녀는 마법사를 거쳐 마도사(Wizard)로 전직했거든.”
“아….”
김선혁은 화들짝 놀랐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방인들 중에도 추가적으로 전직을 한 이가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 것이다.
“비록 진짜 경지를 이루어 마도사에 오른 것은 아니라, 여러모로 부족한 면이 많지만 그거야 차차 시간이 해결해줄 일. 어쨌건 먼 훗날 드라흔 백작과 어깨를 견줄 이가 나온다면 그건 필시 그녀일 거요.”
놀라움도 잠시였을 뿐, 그는 웃는 것도 웃지 않는 것도 아닌 애매한 얼굴이 되었다.
과연 눈앞의 노마법사가 자신이 2차 전직을 넘어 3차 전직까지 마친 상태라고 하면 어떤 표정을 지어 보일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말이오….”
“아, 네….”
하지만 굳이 자신의 능력을 속속들이 까발릴 생각이 없었던 김선혁은 건성으로 맞장구를 쳐주었을 뿐이다.
역시 마법사들은 늙고 젊고 간에 상대하기 꽤나 피곤한 족속들이었다.
그나마 노마법사의 경우에는 단순히 말이 많을 뿐이었지만, 그게 온통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뿐이니 듣는 게 보통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노마법사는 한참이나 떠들어대다가 반응이 영 시원치 않자 다음을 기약하고 사라졌다.
“그래. 창공의 기사를 만나보니 어떻든가.”
말 많은 마법사가 사라지자 맹스크 사령관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창공의 기사를 만난 감상을 물었다.
“꽤나 아슬아슬하게 쫓기고 있던 걸로 보였는데.”
“그렇게 보였습니까?”
김선혁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되물었다. 하지만 속마음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레드번은 하루 종일 과격한 기동을 거듭했고, 기수를 둘씩이나 태우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뒤를 잡혔다고 해서 레드번이 그리핀만 못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스스로가 창공의 기사만 못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음에 만날 때는….”
다시는 자신을 그런 오만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지 못하게 만들고 말리라.
[이제야 제법 봐줄 만하게 됐구나.]
그 순간 한동안 들려오지 않던 반가운 음성이 말을 걸어왔다. 저도 모르게 환호가 튀어나올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매번 전직 때마다 말을 걸어왔던 용이다. 그러니만큼 이쯤이면 연락을 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리고 기대대로 용은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상황이 영 껄끄러웠다. 그는 현재 맹스크 사령관에게 오늘의 전적을 보고하는 중이었고, 용과 대화를 나누기에는 주변의 시선이 너무도 많았다.
“일단 저도 돌아가서 쉬도록 하겠습니다.”
맹스크 사령관은 갑자기 안절부절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그를 보며 의아한 얼굴을 해 보였지만, 이제 막 전장에서 귀환한 그를 붙잡지는 않았다.
“이거 참, 내가 피곤한 사람을 붙들고 있었구먼. 그만하면 상황은 알았으니 돌아가서 쉬게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대강 인사를 한 그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아직 있어?”
혹시라도 자리를 피하는 사이에 용이 침묵하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되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없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용을 찾았다.
[나는 언제나 이곳에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아….”
다행스럽게도 용은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