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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창공의 기사 (3)
“남겠습니다.”
하루를 꼬박 고민한 끝에 김선혁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당연히 그의 잔류를 반길 줄 알았던 맹스크 사령관의 태도가 기대했던 것과는 영 달랐다.
“나는 자네가 더 이상 홀로 큰 짐을 떠안기를 바라지 않는다네.”
사령관은 마법사단과 기사단이 창공의 기사들을 상대할 방법을 찾았다며, 굳이 무리하지 말라 그를 설득하려 했다.
“하늘을 난다는 건 단지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상대를 공격할 수 있다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비행의 진짜 무기는 기동력이었다. 전선을 철통같이 지키고, 성벽을 높게 세운다 한들 하늘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핀 라이더들은 김선혁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 어떤 방해도 없이 창공을 누비며 아군을 괴롭혀댈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피해를 보는 건 초인들에게 보호받지 못하는 일반 병사들이었다.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저는 오직 창공의 기사들을 막는 데만 전념할 생각입니다.”
그 확고한 태도에 맹스크 사령관이 의아한 얼굴을 해 보였다.
“대체 갑자기 생각이 변한 이유가 뭔가.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떠나려던 자네가 아닌가.”
“그때는 정말 지쳤었거든요. 더는 전장에 남아있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김선혁은 씨익 웃어 보였다. 피로에 지쳐 간신히 지어 보이는 웃음이 아닌, 진정으로 생기가 넘치는 미소였다.
“1년은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군요.”
“그게 무슨….”
맹스크 사령관은 끝내 이해하지 못했는지,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불과 하루 사이에 사람이 이렇게 달라졌으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김선혁은 사령관의 의문에 굳이 대답해주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 스스로가 꾸준히 누적되어 왔던 심신의 스트레스를 말끔히 털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창공의 기사들은 제가 맡겠습니다.”
그의 온몸에 새로운 활기가, 그리고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그 모든 것이 바로 레벨업의 효과이자 전직의 혜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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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병과 용기병장(Dragon Chief Rider)에서 3차 병과 용기병대장(Dragon Master Chief Rider)으로 전직합니다.
- 용기병대장으로 전직하시겠습니까?
강도 높은 훈련 끝에 맞이한 레벨업의 순간, 김선혁은 망설임 없이 전직을 받아들였다.
- 병과가 용기병장((Dragon Chief Rider)에서 용기병대장(Dragon Master Chief Rider)로 전직되었습니다.
- 병과가 용기병대장으로 전직됨으로써 스테이터스의 몇몇 항목이 추가되거나 변경되었습니다.
- 전직 효과로 각 능력 수치가 소폭 추가 상승하였습니다.
- 전직에 따라 분대 지휘(Command Squad)가 부대 지휘(Command Platoon)로 변경되었습니다.
- 부대 지휘 스킬의 영향으로 아룡들의 복종도 하락 속도가 둔화됩니다.
- 부대 지휘 스킬의 영향으로 아룡들의 능력에 통솔력 수치가 반영됩니다.
- 용기병대(Dragon Platoon)에 속한 아룡들이 근거리에 있을 경우 서로의 속성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 스킬 항목에 미약한 압도(Weak Fear)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미약하게나마 용의 기세를 빌려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스킬 항목에 콜 드래곤(Call Dragon)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먼 곳에 있는 아룡을 호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병과의 등급이 한 단계 오르며 일어난 변화가 계속해서 메시지를 통해 들려왔다.
- 용기병대장으로 전직하여 부대에 소속된 아룡들의 능력치를 조금 더 속속들이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한 번의 성장, 지칠 대로 지쳐 떠나려 했던 스스로가 전장에 남을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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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레드번 위에 오른 김선혁은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 와이번(레드번)(毒)(Lv. 08)
- 근력 54 / 민첩 147 / 맷집 34 / 지능 06 / 마법 저항력 49 / 복종도 42
: 상태 – 반가움
용기병대장으로 전직하며 얻은 새로운 힘이었다.
이전까지는 막연하게 가늠했을 뿐이었던 아룡들의 능력치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고, 이를 통해 아룡들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었다.
레드번은 창공을 쾌속으로 질주하는 아룡답게 민첩이 높았고,
“너 진짜 돌머리구나?”
지능이 몹시도 낮았다.
“골디보다 머리가 나쁘다니….”
이곳에는 없지만 골드레이크의 능력 역시 스테이터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고, 그 능력치가 레드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 드레이크(골드레이크)(地)(Lv. 17)
- 근력 96 / 민첩 42 / 맷집 153 / 지능 17 / 마법 저항력 142 / 복종도 100
: 상태 – ?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맷집과 마법 저항력이었다. 골드레이크는 무지막지할 정도로 몸이 튼튼했고, 마법에 대한 내성 역시 어마어마했다.
하도 전장에서 두들겨 맞아대서 맷집이 늘어난 것인지, 그도 아니면 타고난 것인지 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골드레이크야말로 마법사를 상대하기 좋은 아룡이라는 것만큼은 그도 알 수 있었다.
강력한 마법 저항력과 단단한 몸뚱어리는 마법사들의 막강한 화력을 견뎌내기에 충분해 보였다.
“끙. 이놈이 무서워하지만 않았어도 골디도 데려오는 건데….”
테이밍의 과정에서 하도 호되게 당한 탓인지 레드번은 골드레이크의 누런 비늘만 봐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였다. 만약 그런 사정만 아니었다면 골드레이크를 이용해 조금은 수월하게 마법사들을 공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쉬움은 아쉬움일 뿐, 지금 전장에 함께 있는 것은 레드번과 블루곤이었다.
․ 씨 서펜트(블루곤)(水)(Lv. 03)
- 근력 107 / 민첩 61 / 맷집 87 / 지능 33 / 마법 저항력 67 / 복종도 57
: 상태 – 수면
강줄기 어딘가에서 오가는 배들을 노리고 있을 블루곤은 전반적인 능력치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아룡들 중 레벨이 가장 낮으면서도 전체적인 능력치의 총합은 가장 높은 축에 속했으니, 뭍으로 나올 수 없다는 페널티가 새삼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가만히 다른 아룡들의 능력치를 확인하던 김선혁이 뒤늦게 레드번을 어루만져 주었다. 기분 좋은 듯 삑삑거리는 아룡의 모습이 꼭 어미 새를 만난 새끼새 같았다.
“하기야, 네 대단함은 다른 게 아니지.”
지시만 떨어지면 언제든 펼쳐 들 것처럼 바짝 힘이 들어간 레드번의 날개, 피막으로 만들어진 그 한 쌍의 날개야말로 레드번의 진짜 힘이었고, 가장 큰 무기였다.
삐이익.
유달리 말귀가 어두운 레드번이 그의 말에 삑 하고 턱을 덜그럭거렸다.
“늦어서 죄송해요.”
로브자락을 휘날리며 아리아 아이젠이 나타났다. 그간 그가 출격하지 않은 만큼 그녀 역시 충분한 휴식을 취한지라 피로 따위는 말끔히 날아간 모습이었다.
“준비됐어요.”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 레드번에 오른 아리아 아이젠이 말했다.
“갑시다.”
그의 말에 레드번이 몇 번인가 날갯짓을 하다 힘차게 날아올랐다.
**
조용하던 녹테인의 주둔지가 소란스러워졌다.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붉은 악마가 다시금 전선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비상! 비상! 드라흔이다!”
댕댕거리며 비상종을 쳐대는 초병은 비명을 질러댔고, 목책에 바짝 붙어있던 궁병들이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하지만 덜덜 떨리는 손은 화살을 놓치기 일쑤였고, 제대로 시위를 건 궁병들도 하늘을 감히 올려다보지 못했으니 위협이 될 리 없었다.
김선혁은 그 부산스러운 모습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렇게까지 과민하게 반응하니 차라리 미안할 지경이었다.
“쯧.”
혀를 한 번 찬 그가 레드번을 몰아 다른 곳으로 향했다. 물론 인정 따위에 휩쓸려 적의 사정을 봐준 것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그의 목표는 병사들이 바글거리는 주둔지가 아니었다.
**
그날 김선혁은 식량창고와 병참기지를 비롯한 주요시설들을 순회하며 폭격을 해댔다. 아리아 아이젠은 그간의 공백을 만회라도 할 것처럼 신이 나서 마법을 퍼부어댔고, 그 과정에서 적의 식량창고와 병참기지가 완전히 박살이 났다.
뒤늦게 나타난 녹테인의 마법사들이 방어 마법을 펼쳐 창고를 보호했지만, 이미 그때는 창고도 물자도 모두 불타오르고 난 뒤였다.
“망할 드라흔!”
“빌어먹을 아덴버그!”
전선에 도착한 뒤로 줄곧 드라흔에게 시달려왔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신경쇠약에라도 걸린 것 같은 목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대체 온다던 창공의 기사들은 언제 온다는 거야!”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병사가 외쳤다.
“차, 창공의 기사들이 왔습니다!”
헤일로 단장과 기사들은 기다리고 기다렸던 그리핀 라이더들의 도착에 반색을 했다.
“드디어 왔는가.”
하지만 아무리 드라흔을 상대하는 게 급하다고 해도, 적국의 요인을 너무 반기는 것도 문제가 있다 여긴 것인지 헤일로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오긴 왔는데 문제가….”
말끝을 흐리는 병사의 태도에 눈살을 찌푸린 기사 하나가 버럭 성질을 냈다.
“문제는 무슨 문제!”
“그, 그게 아군 기병들과 시비가 생겼습니다.”
**
병사의 안내를 받아 마구간에 도착한 헤일로와 기사들은 악취에 인상을 찌푸렸다.
으레 짐승들의 우리라는 게 좋은 냄새가 나는 법이 없다지만, 이건 심해도 너무 심했다. 마치 오물통에 들어선 듯 온 사방에 악취가 진동을 했다.
“이게 무슨….”
폭격이라도 맞은 듯 무너진 마구간의 지붕, 그 아래로 거대한 괴수 두 마리가 떡하니 말을 깔고 앉아 주둥이를 놀려대는 모습이 보였다.
피가 덕지덕지 묻은 노란 부리, 하얀 머리통과 날카로운 앞발은 독수리의 그것을 쏙 빼닮았고 근육질의 몸통과 뒷발은 하얀 날개만 빼면 영락없는 사자였다. 어지간한 황소 두 마리를 합쳐놓은 듯 거대한 덩치의 괴수는 바로 그리핀이었다.
으적, 으적.
그리핀이 부리를 놀려댈 때마다 억센 전마의 근육이 찢기고 피가 튀었다.
“아….”
기사들은 그제야 악취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마구간에 난입한 두 마리의 괴수들을 보고 겁에 질린 전마들이 사방에 똥오줌을 갈겨 놨다. 냄새가 나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이거 미안하게 됐소. 이놈들이 말이라면 눈이 뒤집히는 놈들이라 말릴 수가 없었다오.”
전혀 미안하지 않은 듯 뻔뻔한 음성, 그리핀의 과격한 식사장면에 시선을 빼앗겼던 헤일로와 기사들이 뒤늦게 창공의 기사들을 발견했다.
온갖 장식이 들러붙은 화려한 갑주에 붉은 망토까지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기사가 거만하게 고개를 꺼떡였다. 붉은 머리에 사내다운 인상을 한 자였다.
“반갑소. 질베르 실베인 라파예트요. 그리고 이쪽은 장 마리 드 롤랑 경이지.”
판에 박은 듯 똑같은 복장이었지만, 거구의 라파예트와는 상반되게 롤랑은 선이 가는 몸을 가진 기사였다. 얼굴마저도 기사라기보다는 음유시인처럼 고운 이목구비, 하지만 오만한 눈빛만큼은 라파예트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창공의 기사들 중 서열 2위, 불꽃의 라파예트, 서열 3위, 질풍의 롤랑….”
그리핀 라이더들이 온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그중에서 누가 올지는 헤일로도 따로 언질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짐작하기를 여섯째와 일곱째가 오지 않을까 했는데, 막상 도착한 면면을 보니 무려 둘째와 셋째였다.
상위 서열의 그리핀 라이더들이 올 줄은 몰랐던 헤일로가 떨떠름하게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서둘러 온다고 왔는데, 벌써 한바탕 한 모양이오? 주둔지 꼴이 말이 아니더군.”
조롱인지 위로인지 모를 말에 헤일로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그보다 이게 무슨 짓이오. 아국의 전마는 그 품종의 우수성이 널리 알려진 바, 이리 가축 배 가르듯 할 수는 없소.”
“말했다시피 이놈들이 말이라면 아주 환장을 한다오. 게다가 오는 길에 너무 굶주린 탓인지 도통 통제를 따르지 않지 뭐요. 나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소. 주인에게는 내 친히 보상토록 하지.”
그 말에 마구간 밖에 서 있던 기병들 중 몇이 이를 갈아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하기야 말이라면 끔찍이 여기는 기병의 앞에서 말을 먹이로 삼았으니, 얼마나 원통하고 분할까. 아마 상대가 창공의 기사만 아니었으면 달려들었어도 벌써 몇 번은 달려들었으리라.
“일단 나와서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이곳은 대화를 하기에는 그다지 좋은 장소는 아니군.”
“잠깐만 기다려주시겠소? 기왕 이리됐으니 이놈들이라도 배를 채웁시다.”
아무리 종전 협정을 맺고 필요에 의해 서로 협력하는 관계가 되었다지만, 이곳은 바로 얼마 전까지 피가 터지도록 싸워대던 적국의 주둔지였다. 그것도 내로라하는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건만 라파예트와 롤랑은 지독할 정도로 여유가 있어 보였다.
“끙. 기다리겠소.”
라파예트의 뻔뻔한 말에 헤일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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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의 식사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잠깐 사이에 말 한 마리를 뚝딱 해치운 그리핀들은 방금 전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러웠다. 그 뻔뻔한 모습이 제 주인을 닮아 헤일로는 영 마뜩찮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파예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만 해댔다.
“어디 보자. 대충 시간을 계산해보니, 지금 가면 따라잡을 수도 있겠군.”
라파예트와 롤랑이 다시 그리핀 위에 올라탔다.
“지금 뭐하는 거요.”
“뭐, 와이번 라이더에게 인사라도 할까 해서.”
헤일로가 미처 만류할 새도 없이 그리핀들이 날개를 펼쳤다.
“그럼 다녀오겠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리핀이 훌쩍 날아오르고 창공의 기사들이 저 멀리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