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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창공의 붉은 악마 (3)
용권풍에 휘말려 종적도 없이 사라진 드레이크 나이트를 본 헤일로는 환호했다.
“잡았군.”
비록 자신의 손으로 푸른 늑대들의 복수를 하지 못했다는 점은 아쉬웠지만, 눈엣가시 같던 드레이크 나이트를 처리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지금쯤이면 우쭐거리기 좋아하는 노마법사의 성격상 신이 나서 입을 놀려댔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입을 꾹 다문 탈리스만의 표정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있었고, 수인을 맺는 손은 마법을 발현하기 전보다 더욱 분주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헤일로는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탈리스만 경?”
노마법사를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탈리스만은 주문을 외우는 데 열중한 모습이었다.
“큭.”
탈리스만의 잇새로 피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탈리스만은 피를 닦아내기는커녕 파랗게 변한 입술을 달싹이며 더욱더 필사적으로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워댔을 뿐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뒤늦게 다른 마법사들을 떠올린 헤일로가 상황을 물으려다 도로 입을 다물었다. 노마법사와 똑같은 모습으로 눈을 질끈 감고 주문을 외우는 마법사들의 모습을 그제야 발견했던 탓이다.
“뭔가 조짐이 좋지 않다. 혹시 모르니 기사들은 만약을 대비하라.”
그의 지시에 기사들이 검광을 줄기줄기 뽑아내며 각자 최악의 상황을 대비했다.
“뭐, 뭐야. 어떻게 돼가는 거야.”
“잡은 거 아니야?”
위장을 위해 끌려왔던 보병들이 수군거렸다. 믿었던 기사와 마법사들이 주춤거리는 모습에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그들은 불안한 얼굴로 굉음을 토해내며 난동을 부리는 회오리바람을 바라보았다.
“어?”
“저거 아까보다 가까워진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마법사들이 소환한 회오리바람이 조금 전보다 부쩍 가까워진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기분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무언가가 끌어당기듯 몸이 자꾸만 앞으로 기울었다. 몸에서 힘을 뺐다간 광풍에 휘말려 저 끔찍한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갈 것만 같았다.
“조심해! 끌려 들어간다!”
“으아아아!”
병사들이 난동을 부려댔다. 하지만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빌어먹을. 최악의 경우 마법사들을 안고 달린다.”
“하지만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헤일로의 말에 선임 기사 하나가 무거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
회오리바람을 피해내기에는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장벽은 너무도 비좁아 보였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대답이라도 해보시오!”
답답한 마음에 버럭 소리를 지르니, 탈리스만을 도와 주문을 외우던 마법사 하나가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컥!”
“쿨럭!”
그걸 시작으로 다섯의 마법사들이 차례로 피를 쏟아냈다.
“당장 피해야 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오!”
마법사의 말에 헤일로가 다그쳤다. 마법사는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내며 대답했다.
“마, 마법의 통제권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던 탈리스만이 피 섞인 기침과 함께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마법이 놈에게 넘어갔네.”
헤일로는 도대체가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
“이제 저 끔찍한 폭풍은 드레이크 나이트의 것이란 말일세!”
피를 토하는 듯한 경고, 그 순간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악! 살려줘!”
“으아아!”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광풍에 휩쓸렸다.
“제길! 그러게 내가 뭐랬소! 방심하지 말라 했잖소!”
그 아비규환의 사태를 보던 헤일로가 길길이 날뛰어댔다.
“이제 와서 잘잘못을 따져 뭘 하겠는가! 지금은 저 폭풍을 파괴하는 게 더욱 중요하네!”
탈리스만이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아직까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던 마법사들에게 명령했다.
“모두 디스펠 매직(Dispel Magic, 주문 무효화)을 준비해라!”
마법사들이 주문 무효화 마법을 외기 시작한 그 무렵, 회오리바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디스펠 매직!”
과연 고르고 고른 마법사들답게 주문 무효화 마법은 금세 완성이 되었다.
“어, 어째서!”
하지만 연달아 펼쳐진 마법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완전히 흩어낼 수는 없어도 최소한 위력이라도 약화시킬 수 있을 거라 여겼던 생각이 빗나간 것이다. 바람은 기세가 약해지기는커녕 도리어 더욱더 사납게 휘몰아쳤다.
“이, 이럴 수는 없어. 이건 말도 안 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탈리스만의 표정을 본 순간, 헤일로는 그들이 이번 일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이 안 될 건 또 뭐요. 현실이 이러한데.”
차갑게 탈리스만을 일별한 그가 검을 뽑아 들었다. 완벽한 위장을 위해 평소 사용해왔던 애검마저 두고 왔던지라, 손바닥에 감기는 손잡이의 느낌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경지에 오른 그에게 이 정도 이질감은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기사들은 마법사들을 챙겨 퇴각해라.”
디스펠 매직의 영향인지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장막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지금이라면 몸을 빼내는 게 영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헤일로는 몸을 돌려 달아나는 대신 회오리바람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푸른 늑대들에 이어 붉은 늑대들마저도 패배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달아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마법사를 둘러업고 빠르게 이탈하는 부하들의 모습을 확인한 그가 고개를 돌렸다.
비록 시작은 마법사들의 주문이었다지만, 지금의 회오리바람은 이미 대자연 그 자체나 다름이 없었다.
할 수 있을까.
순간적으로 망설였지만,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검을 뽑아든 이상 망설임은 필요치 않았다. 지금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적을 분쇄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비록 그 적이 항거하지 못할 거대한 자연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언정 기사에게 물러섬이란 있을 수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는 바람에 무릎 아래가 허전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럴수록 무게 중심을 아래에 두고 자세를 낮췄다. 어느새 완벽한 자세를 잡은 헤일로가 칼을 들어 올렸다.
고오오오.
줄기줄기 피어오른 검광이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검이 되었다.
콰아아아아.
그는 그 상태로 숨을 몇 번이나 들이쉬고 내뱉었다.
“후읍!”
어느 순간 그는 더 이상 바람에 흔들리지 않게 되었고, 빛에 둘러싸인 검이 벼락처럼 내리 그어졌다.
스윽.
허공에 생겨난 비스듬한 선, 경지에 오른 기사의 검격이 만들어낸 이적(異蹟)을 중심으로 회오리바람이 분리되었다.
그리고 위 아래로 분리된 바람의 몸통 중 아래쪽 절반이 기세를 잃고 그대로 흩어졌다.
거대한 폭풍을 반으로 갈라내는 위업을 달성했다. 어느 누가 이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검 한 자루로 이런 힘을 보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 강렬한 공격을 성공시킨 헤일로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너무 쉽다.
변변한 저항조차 느끼지 못했던 그는 문득 소스라치며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보았다.
잘려나간 몸뚱이는 내버린 채 자신을 스치듯 지나쳐간 바람이 퇴각중인 기사들을 그대로 덮쳐드는 모습이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이 비겁한!”
처음부터 바람은 최고조까지 검력을 끌어올린 그를 상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
장난 아닌데?
기사의 검력이 솟구친 순간 김선혁은 정면으로 부딪쳤다간 아무리 마법사들의 주문을 역으로 흡수한 자신이라고 해도 무사하지 못할 거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다는 말인가. 애당초 그가 이 자리에 선 것은 허울 좋은 결투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기사가 아닌 군인이었고, 승리를 위해서라면 적에게 아주 작은 영광 정도는 기꺼이 허락할 생각이었다.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그는 기사에게 절반의 바람을 내주었다. 그리고는 기사를 무시하고 그대로 지나쳐, 도주 중이던 마법사와 또 다른 기사들에게 창을 겨누었다.
윈드 피어싱.
이제는 승리의 주문이나 다름없게 되어버린 스킬명이 잇새로 흘러나온 순간, 휘몰아 치던 광풍이 창끝에 모여들었다.
크윽.
마치 태풍이 불었던 그날 감당하지 못할 힘을 창끝에 그러모았었던 그때처럼 손이 덜덜 떨려왔다. 이대로라면 원하는 곳에 공격을 꽂아넣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만큼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광풍의 위력은 막대했다.
하지만,
“아티야.”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레드번.”
바람의 정령이 함께 했고, 그리고 레드번이 함께 했다.
“가자.”
다급하게 검광을 피워 올리는 기사들의 모습과 때 늦은 주문의 영창을 시작하는 마법사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그 공포에 질린 눈동자들을 응시하며 창을 때려 박았다.
**
녹테인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전력이 비등한 국가를 동시에 동과 서에서 상대하느라 막대한 병력의 손실을 입었고, 동부는 완전히 영토와 영향력을 상실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호전적으로 주변국들을 괴롭혀댔던 녹테인답게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았다.
한날한시에 이루어진 대대적인 반격, 그 과정에서 그리핀도르의 정예부대들이 수도 없이 와해되었다. 과연 대륙 동부의 늑대다운 저력이었다. 그날 이후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서부 전선은 완전히 전세가 기울었고, 주력을 상실한 그리핀도르는 연전연패했다. 그리고 녹테인은 마침내 원래의 국경선을 다시 회복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핀도르는 서둘러 종전의 의사를 표명했고, 서부뿐 아니라 동부까지 신경 써야 했던 녹테인은 종전 협정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전쟁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그리핀도르를 몰아냈지만, 아덴버그가 아직도 동부를 휘저어대고 있었다.
“처음부터 서부가 아닌 동부로 주력을 보냈어야 했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만만한 아덴버그보다는 그리핀도르가 위협적이라며, 주력을 서부로 파견하자고 먼저 말했던 건 당신들이 아니오!”
양국을 동시에 상대하느라 필사적으로 감수해야 했던 전력의 분산에서 녹테인은 서부에 주력할 것을 선택했다.
동부군이 지리멸렬하긴 했지만 추가로 파병된 병력만으로도 능히 동부를 지켜낼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어차피 부족한 보병 전력은 궁기병과 기병 전력으로 충분히 메꿀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치명적인 실패가 되어 돌아왔다. 파병된 병사들은 태반이 전사했고, 기사와 마법사 전력에서까지 끔찍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동부에서만 전사한 마법사의 수가 서른여섯이고 기사들 역시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고도 동부 지역을 지킬 수가 없었으니 이보다 큰 치욕은 없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서부에 파견나간 주력을 되돌려 동부로 보내면 잃었던 영토를 수복할 수 있을 것이요.”
“멍청한 소리! 그걸 그리핀도르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겠는가! 그쪽이야말로 우리가 동부에서 입은 것 이상의 피해를 입은 터, 주력이 빠져나가는 순간 종전 협상이고 뭐고 좋다고 달려들 텐데, 그건 또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허면 이렇게 동부를 두고 볼 겁니까! 지금 우리가 아덴버그에게 빼앗긴 영토만 해도 나라 전체의 2할에 육박할 정도요. 그대로 두었다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덴버그와 차이가 벌어질 거요. 그렇지 않아도 테오도르 국왕의 치세 하에 나날이 강성해지는 아덴버그가 아니오.”
귀족들은 갑론을박하며 빼앗긴 영토를 두고 어찌해야 할지를 궁리했다.
“허, 어쩌다 우리 초원의 늑대들이 이런 지경이 되었는지….”
귀족 하나가 한탄을 하니, 다른 이들도 금세 참담한 얼굴이 되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귀족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빌어먹을 붉은 악마놈….”
이제는 드레이크 나이트라는 호칭보다 붉은 악마 드라흔이라는 이름이 더욱 유명해진 아덴버그의 이방인이야말로 동부 전선의 뼈아픈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동부에서 상실한 기사 전력과 마법사 전력의 9할이 드라흔에게 당한 것이다. 사실상 동부에 진출한 초인들은 드라흔을 쫓아다니느라 아덴버그의 초인들과 제대로 싸워볼 기회도 없었다. 게다가 드라흔에게 당한 보병들과 기병들의 피해 역시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필이면 그때 보급선들이 몬스터의 난동에 습격을 당하지만 않았어도….”
설상가상으로 반격을 준비하던 동부군은 보급이 끊기는 바람에 굶주린 채로 적을 맞아야 했다. 연전연패하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다.
“아직도 그때 출몰했던 몬스터가 어떤 놈인지 파악을 못했소?”
“순찰대가 백방으로 뒤져보고 있지만, 물속까지 들여다볼 수는 없어 영 소득이 없다고 하오.”
보급선을 수십 척이나 침몰시킨 괴물은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치 질 나쁜 악몽이라도 꾼 듯한 기분이었다.
“그 역시 드라흔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있소. 보급부대가 습격을 받은 그 무렵, 하필이면 드라흔이 전선에서 사라졌다니 꽤나 그럴듯하지 않소?”
“그놈의 드라흔, 드라흔. 이제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군.”
“드라흔만 없었어도 동부 전선이 이렇게까지 밀리는 일은 없었을 거요.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그깟 이방인 하나가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그냥 이방인이 아니라 하늘을 나는 이방인이지.”
금세 또 불이 붙은 귀족들의 몰가치한 논쟁, 가만히 왕좌에 앉아 듣고만 있던 녹테인의 국왕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드라흔만 없으면 동부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내가 맞게 들은 건가.”
묵직한 음성에 귀족들은 눈치만 볼 뿐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호전적이다 못해 폭군에 가까운 국왕의 말에 잘못 대답했다가는 무슨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던 탓이다.
“패배한 전투에 드라흔의 이름이 끼지 않은 곳이 없으니, 드라흔이 사실상 동부의 수복에 가장 큰 난관인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귀족들의 눈총을 받은 고위 귀족 하나가 마지못해 대표로 나서 국왕의 말을 받았다.
“그럼 드라흔만 없애면 되겠군.”
“하지만 하늘을 날아다니는 드라흔을 잡을 방법이 없습니다. 마법사들이 드라흔을 잡을 수 없다는 건 이미 증명이 되었지요.”
귀족의 설명에도 국왕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듯 다시 말했다.
“그럼 똑같이 하늘을 나는 놈이 상대하면 될 거 아닌가.”
“애석하게도 저희 쪽 이방인들 중에는 드라흔과 같은 자가 없습니다.”
하지만 알아듣지 못한 것은 국왕이 아니었다.
“없으면 다른 데서 빌리면 그만이지.”
녹테인의 국왕은 사나운 얼굴에 어울리는 짐승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핀도르에 사자를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