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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창공의 붉은 악마 (2)
“음?”
김선혁이 조짐을 알아차린 것은 이동 중이던 보병 중대의 뒤를 잡았을 즈음이었다. 신경 쓰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위화감에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흠….”
숨을 곳 하나 없는 황야, 일개미처럼 꾸물거리며 이동하는 보병대의 대열, 그 어디에도 위협이 될 만 한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온몸을 간질이는 위화감을 무시하지 않았다.
오늘은 뒤를 든든히 받쳐주던 아리아 아이젠도 없었다. 살인적인 비행 스케줄을 견디기에는 마법사의 육신은 너무도 나약했고, 그는 오늘만큼은 그녀에게 휴식을 주고 홀로 비행에 나선 참이었다. 홀로 적진을 파고든 이상, 조금의 이상이라도 간과해서는 안 됐다.
그냥 돌아가자.
애초에 무리할 이유가 없었다. 공이라면 이미 넘칠 정도로 세웠고, 보병 중대 하나를 처리하지 않는다고 해서 전황이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올라가자. 레드번.”
잠시 보병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레드번의 목가를 툭툭 치며 고도를 높일 것을 명령했다.
내가 과민해졌나.
지면과 멀어지자 옅어져 가는 위화감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안전한 하늘에서 적들을 괴롭혀댔을 뿐이라지만, 전투의 피로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짧은 시간 동안 수십 차례에 걸쳐 폭격을 해댔으니 스스로도 못 느끼는 사이에 스트레스가 쌓였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뒤늦게 자신이 적진 너머, 아군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에 홀로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얼굴이 바짝 굳어버렸다.
휴우.
지면이 까마득하게 멀어지자 그제야 그는 긴장으로 참았던 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하지만 안심을 하기에는 너무 일렀던 모양이다. 내뱉었던 숨을 다시 들이키기도 전에 완전히 사라졌다 여겼던 위화감이 더욱 강렬하게 그를 덮쳤다.
그렇게 다시 불쑥 고개를 쳐든 이질감은 차라리 불길함이라도 좋을 정도로 영 느낌이 좋지 않았다. 마치 턱 끝에 비수가 겨누어지기라도 한 듯한 기분, 그는 레드번을 더욱 더 다그쳤다.
“레드번 빨리….”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길함이 실체를 갖고 모습을 드러냈다.
텅.
한창 날갯짓을 하던 레드번이 무언가에 부딪친 것처럼 튕겨져 나갔다.
빼액?
레드번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날개를 퍼덕였다.
텅.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레드번은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더 이상 나아가지도 솟아오르지도 못했다.
“이게 무슨….”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방금 전에 레드번이 부딪친 허공이 출렁거리며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
“잡았다.”
곤두박질치는 와이번을 보며 탈리스만이 교활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렇게 괴소를 흘리는 그의 복장이 말단 보병의 그것과도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의문이오.”
검을 뽑아들며 불평을 토해내는 붉은 늑대 기사단의 단장, 헤일로 역시 탈리스만과 차림이 다르지 않았다.
“방금 보지 않았는가. 놈이 강하 직전에 다시 몸을 빼내는 것을.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저 약삭빠른 놈을 절대로 잡지 못했을 걸세.”
탈리스만의 말마따나 기척을 죽이고 접근하던 드레이크 나이트가 갑작스레 몸을 빼냈을 때, 그대로 목표물을 놓치는 건 아닌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헤일로다.
“놈이 이곳을 벗어날 수 없는 건 확실한 거요?”
지금도 드레이크 나이트가 훨훨 날아 도망칠까 봐 우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를 말인가. 애초에 창공의 일곱 기사를 상대하기 위해 만든 마법일세. 일곱도 아닌 하나를 막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지.”
그런 그의 말에 노마법사가 확신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일단 결계 마법이 발동한 이상, 최소한 하루 동안은 어느 누구도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없을 거라 장담하네.”
의심 많은 마법사가 저리 확언을 할 정도면 믿어도 되겠다 싶었던 헤일로가 투구를 벗으며 손짓을 했다. 그의 손짓에 보병들 사이에 숨어있던 선임 기사 여섯이 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나섰다.
“워낙에 종잡을 수 없는 놈이니, 빨리 끝내도록 합시다.”
“허. 보채지 않아도 이제 막 시작하려던 참일세. 그러니 붉은 늑대들은 잠시 구경이나 하고 있으시게.”
주름진 얼굴에 어울리는 흉물스러운 웃음을 지은 탈리스만이 자신의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사냥을 시작해라.”
노마법사의 지시에 마법사 다섯이 일제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
김선혁은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유달리 요란스럽게 전투를 하던 녹테인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의 행동은 모두 지금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빌어먹을.”
그 기막힌 연극에 완전히 놀아나버린 자신은 새장 속의 새였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연이은 승리에 지나치게 도취되었던 것일까. 그도 아니면 상대의 손이 닿지 않는 하늘을 너무 의지했던 것일까.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이 있다면 적이 처음부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과 사방을 가로막은 투명한 막을 당장 뚫고 도망치는 것은 어려울 거라는 것뿐이었다.
김선혁은 저 멀리 일백의 보병들 사이에 슬그머니 나선 자들을 보았다. 왜 이제야 알아챈 것인지 그들에게서 익숙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과 같은 기세는 분명 혹독하게 검을 단련한 기사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살벌한 것이었다. 그것도 그 예기를 보아 저들은 최소한 선임 기사 이상의 강자들이 분명했다.
그보다, 지금 중요한 건 기사들이 아니야.
그들이 강력한 존재인 것은 분명하나, 까마득히 높은 곳에 위치한 자신을 해코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달랐다. 그들은 치명적인 저격수였고, 더없이 강력한 대공 병기였다. 아리아 아이젠도 없는 이상, 마법사들은 자신을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들이었다.
“어디냐.”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보병들 틈에 숨어 있을 마법사를 찾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모조리 찾아낼 수 있었다. 아니. 그가 찾은 게 아니었다. 마법사들이 스스로를 드러낸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알 수 없는 손짓을 하며 입술을 달싹이는 마법사들을 본 김선혁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 순간 마법사들의 저격이 시작되었다.
“레드번!”
그가 이름을 부르자, 레드번이 활짝 폈던 날개를 접으며 속도를 올렸다.
펑!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폭음, 그는 온몸을 훑어가는 기이한 감각에 레드번의 고삐를 잡아챘다. 확, 하고 레드번이 몸을 뒤집었다. 그 짧은 순간 무려 여섯 개나 되는 마법 화살이 그와 레드번을 스치고 지나갔다.
“흡.”
빗나간 여섯 발의 마법 화살이 방향을 틀어 다시 따라붙었다. 거기에 더해 시뻘건 불기둥이 날아들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레드번을 뒤집으며 솟구치는 불기둥과 마법 화살들을 피해냈다.
마법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하나를 피하면 둘이 날아들었고, 둘을 피하면 그게 넷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자 하늘 그 어디로도 몸을 피해낼 수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마법이 들어찼다.
그는 창을 뽑아 들고 몸을 피할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이리저리 찔러댔다. 속성의 힘을 두른 창이 순식간에 몇 개의 마법을 분쇄하고 공간을 열었다. 그는 재빨리 그 틈으로 레드번을 몰았고, 그런 그를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마법이 뒤따랐다.
점점 마법을 피해내는 것보다 막아내는 빈도가 높아져갔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그마저도 힘들 지경이 되었다.
언제 이렇게….
스치기만 해도 폭발하는 마법구들이 온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쾅, 쾅.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레드번의 몸에 닿은 마법구들이 연달아 폭발했다.
빼애애액!
벌써 몇 번이나 마법에 직격당해 가뜩이나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던 레드번이 더욱 만신창이가 되었다. 비명을 지르는 레드번을 보며 그가 이를 악물었다.
“제발 버텨내.”
마음 같아서는 스킬이고 뭐고 있는 대로 쏟아 부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그 충동을 참아냈다.
딱, 한 번. 마법사를 처리하는 데 필요한 건 단 한 번의 기회면 족하다. 그는 그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오직 그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날아드는 마법을 찌르고 피하고 버텨냈다.
그렇게 얼마나 쏟아지는 마법을 피하고 버텨냈을까. 김선혁은 문득 위화감을 느끼고 소스라쳤다.
“설마….”
인식하지 못하던 사이에 까마득하기만 하던 대지가 훌쩍 가까워져 있었다.
“제길. 노렸군.”
김선혁은 자신이 몰이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노골적인 속내를 알았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는 알면서도 계속해서 조금씩, 조금씩 고도를 낮춰야 했다.
**
“이게 바로 창공의 일곱 기사를 상대하기 위해 만든 마법들이라네. 어쩌다보니 그리핀이 아니라 와이번을 상대로 먼저 시연을 해보게 됐구먼.”
쫓기듯 이리저리 내몰리는 드레이크 나이트를 보는 탈리스만은 완전히 기고만장해 있었다. 오랜 시간 연구해온 마법이 첫 실전에서 큰 위력을 보이니 기분이 썩 좋은 모양이었다.
“적당히 하시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오.”
헤일로는 그런 탈리스만과 마법사들의 행동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시종일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쯧. 자네들이야 서로 검 한 자루만 있으면 신명나게 놀아볼 수 있겠지만, 우리 마법사들은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네. 그러니 너무 그렇게 보채지 말게.”
“상대는 기사단이 호위하는 마법병대 하나를 통째로 잡아먹은 드레이크 나이트요. 방심하다가는 일을 그르치는 수가 있소.”
자꾸만 딴지가 걸리자 탈리스만도 신경질이 나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헤일로의 말이 일리가 있다 여긴 것인지 더는 툴툴대지 않고 마무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모두 준비하라. 마법이 실패할 경우, 우리가 직접 놈을 마무리해야 한다.”
그 말에 자존심이 상한 것인지 탈리스만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했다.
“저 자는 감히 하늘을 전장으로 삼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이네.”
탈리스만은 자신에 차 있었다.
녹테인은 늘 아덴버그보다 호전적인 그리핀도르와의 전투를 대비해왔고, 마법병대 역시 그러했다. 그들은 왕성에 처박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창공의 기사들마저 상대할 방법을 완벽하게 준비한 상태였다.
“아니. 그럴 기회도 없겠군. 놈은 오늘 이 자리에서 그 명이 다할 테니까 말일세.”
그리고 공교롭게도 와이번에 올라탄 드레이크 나이트는 창공의 기사들을 상대하기 전에 마법을 시험해보기에는 더없이 좋은 상대였다.
“셋은 몰이를 계속하고 나머지 둘은 나를 도와 마법을 완성하라.”
탈리스만의 지시에 마법사 둘이 앞으로 나서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꽤나 강력한 주문이었는지 그들의 영창이 끝이 난 것은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하울링 거스트(Howling Gust, 울부짖는 돌풍)!”
두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마법을 완성한 탈리스만이 가장 강력한 마법을 세상에 현신시키는 마지막 한마디를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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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낮아져 가는 고도, 이제는 기사들이 조금만 무리하면 닿을 정도로 대지가 가까워져버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기회고 나발이고 마법에 쫓겨 기사들 한가운데로 내몰릴 판국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이제는 정말 선택해야 했다.
지금이라도 최대한의 힘을 모아 마법사들을 노려보는 게 그나마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는 자꾸만 흔들리는 자신을 다잡고는 때를 기다렸다.
마법사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기운이 그를 마지막까지 인내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순간, 기다렸던 순간이 찾아왔다.
“하울링 거스트!”
승리를 예감하듯 확신에 찬 음성,
콰아아아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폭풍이 불쑥 솟아났다.
그 압도적인 마법을 본 김선혁은, 거대한 폭풍 앞에서 몸을 떠는 대신 환호했다.
“바로 이거야!”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나운 폭풍을 향해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