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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창공의 붉은 악마 (1)
기사들은 분명 초인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강인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저들도 인간이었다. 초월적인 힘을 얻었다고 해도 자지 않고, 먹지 않으면 죽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말려 죽일 셈이군요?”
처음에는 뾰로통했던 아리아 아이젠도 금세 계획에 흥미를 보였다. 그녀는 신이 나서 그의 계획에 앞장섰고, 자잘한 마법을 뿌려대며 기사들을 괴롭혀댔다.
“빌어먹을 드레이크 나이트! 내려와서 정정당당하게 나와 생사를 결하자!”
“가만두지 않겠다!”
밤이고 낮이고 가리지 않고 떨어지는 온갖 마법 공격에 기사들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죽어!”
그들은 닿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투창용 단창을 허공에 던져댔고, 검력을 줄기줄기 뽑아대며 힘을 낭비하기 일쑤였다.
생각보다 빠르게 무너져가는 기사들의 모습에 김선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예상대로 기사들은 강인한 육신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의 정신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기야 무리도 아니었다. 왕실의 지원과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어떤 어려움도 없이 검만을 갈고 닦아왔을 그들이 언제 이런 극한의 상황에 처해보았겠는가.
“차라리 사스테인이 더 강했어.”
잡초처럼 전장을 전전했던 사스테인 기병단에 비교하면 기사들은 차라리 온실 속의 화초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시시때때로 날아드는 마법은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였다.
“아주 그냥 피를 말려 죽여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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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뒤늦게 전선에 합류한 붉은 늑대 기사단의 단장 헤일로는 오랜 시간 함께 고련해온 검우(劍友) 록슈타트 단장의 몰골에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번쩍거리던 기사의 갑주는 검붉게 녹이 슬고 이리저리 깨져 나간 상태였고, 수려하던 얼굴은 흉물스러운 상처로 가득했다.
총기와 자신감으로 번뜩이던 눈동자는 허옇게 백태가 껴 노인의 그것처럼 변해 있었다.
“면목이 없네.”
녹아버린 입술 탓에 잔뜩 새는 발음을 들은 순간 헤일로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견습기사 스물여섯이 전사했고, 평기사 여섯이 죽었네. 선임 기사 하나는 폐인이 됐지.”
단장이 그 모양인데 다른 이들이라고 멀쩡할 리가 없었다.
“으으.”
동상에라도 걸린 듯 손발이 썩어버린 기사는 오뉴월 날씨에도 몸을 떨어댔다.
바로 그 곁에 선 기사는 반대로 일사병에라도 걸린 듯 그을리고 물집이 잡힌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게 대체….”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헤일로는 지금이 혹한의 겨울인지 폭염의 여름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보다시피 우리는 지쳤네.”
기사들이 입은 상처 종류와 경중은 제각각이었지만, 딱 하나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이 지독한 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건가.”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강력한 기사단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인지 헤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
록슈타트 단장이 푸들푸들 떨리는 입술로 경기하듯 말했다.
“악마가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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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네. 기사들이 취침하던 막사가 몇 번이나 불타올랐고, 그 위로 돌덩이가 떨어진 적도 있었지. 어떨 때는 곯아떨어졌다가 일어나보니 주변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던 적도 있었다네.”
록슈타트 단장은 그간의 일을 전부 설명해주었다. 드레이크 나이트의 강습을 받아 마법사들이 전멸했던 일과 그 뒤로 시도 때도 없이 이어진 마법 폭격에 어떻게 시달려왔는지를 한참동안이나 설명했다.
“병력을 나누어도 보고, 생각나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보았지. 하지만 피해만 더 커졌을 뿐이네. 최선을 다 해보았지만, 악마는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마음껏 농락했네.”
생각만 해도 끔찍한지 록슈타트 단장은 이따금씩 경기하듯 몸을 떨었다.
“나도 부하들도 지금은 쉬고 싶은 마음뿐일세.”
기사로서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상급 기사에 오른 인물이 하는 말이 마치 노쇠한 노인의 하소연과 다르지 않았다.
“음.”
그 충격적인 모습에 부하들이 동요하는 기색이 보이자, 헤일로는 서둘러 푸른 늑대들을 숙소로 돌려보냈다.
“저건 마법에 당한 상처들이군. 누군지는 몰라도 아주 독하게 손을 썼어.”
록슈타트 단장과 푸른 늑대들이 사라지자, 제 4 마법병대의 수장 탈리스만이 혀를 차며 한마디를 했다.
“치료할 수 있겠소?”
“마법의 잔재만 거두어내면 알아서 새살이 돋고 상태가 호전되겠지. 하지만 몸이 낫는다고 한들 저들의 꺾여버린 마음이 다시 바로 서겠는가?”
같은 기사된 도리로 차마 하지 못했던 말, 하지만 마법사에게 동료애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한 일이었다.
마법사는 지독한 현실주의자였고, 탈리스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들은 이미 부러진 검이나 다름없는 상태네. 저들과 함께 전장에 나설 바에야 나와 마법사들은 차라리 왕성으로 돌아가겠어.”
멀쩡할 때도 마법사들을 지키지 못해 전멸 당하게 만든 전적이 있는 푸른 늑대 기사단이다.
그런데 가뜩이나 미덥지 않은 자들이 저리 폐인 같이 변해버렸으니, 이제 와서 믿음이 생기는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탈리스만은 강한 불신을 표했고, 헤일로도 그 꼬장꼬장한 태도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도 푸른 늑대 기사단은 더 이상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없어 보였다.
“드레이크 나이트라. 익히 명성은 들어왔지만 생각보다 더 대단한 모양이오. 푸른 늑대들을 저 지경으로 만들다니….”
“이제까지 그 활약이 대단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다시는 하늘이 제 세상인양 설쳐대지 못하게 될 거네. 하필이면 우리와 마주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라 내 장담하지.”
헤일로의 한탄에 탈리스만은 강한 자신감을 표했다.
“방법이 있소?”
“우리 병대의 주특기가 뭔 줄 아는가.”
늙은 마법사가 그렇게 말하며 손끝을 슬며시 뻗쳤다.
“바람을 다루는 것일세. 드레이크 나이트가 저 바람 거센 황야의 하늘을 전장으로 삼은 순간, 그는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이 없네.”
헤일로는 감탄을 했다. 그 말이 꽤나 그럴 듯하게 들렸던 탓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드레이크 나이트가 이곳을 노리고 있을지 모르겠군. 나는 차라리 그자가 알량한 승리에 기고만장해 당장에라도 달려들기를 바라네. 내 친히 그자의 장례를 거행해줄 것이니.”
당장에라도 드레이크 나이트를 요절낼 듯 자신에 찬 음성이었다.
**
정작 그 시각 김선혁은 동부의 전장에 있지 않았다.
상황이 변해 더는 전처럼 전장을 휘젓고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대공 능력이 탁월한 마법사가 보충된 이상 몸을 사려야 했다.
“자네가 훌륭하게 녹테인 기사단의 발을 묶어준 덕에 아군 기사단이 합류할 때까지 큰 피해 없이 버틸 수 있었네.”
전력이 보강된 건 적뿐만이 아니었다. 왕도를 출발한 아덴버그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전선에 도착했고, 그는 그들에게 전장을 맡기고는 또다시 레드번의 등 위에 올랐다.
“어디 보자.”
강줄기를 따라 비행하던 김선혁은 낯익은 기운이 느껴지자 곧장 하강을 시작했다.
“블루곤.”
무려 2주에 걸쳐 강줄기를 거슬러온 블루곤이 마침내 전선에 합류했다.
오는 길에 대체 뭘 주워 먹은 것인지 전보다 더 비대해진 씨 서펜트의 모습을 보며 그는 먼저 복종도부터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복종도는 그다지 많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자.”
그는 블루곤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곧장 날아올랐다.
그런데 그렇게 그가 향하는 방향이 칼스테인 요새가 아닌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김선혁은 강줄기를 따라 전선을 넘었고, 녹테인의 동부와 중부의 경계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부터 그는 이곳을 꽉 틀어막을 생각이었다.
이곳은 전선에 진출한 녹테인 병사들의 생명줄이었다. 그리고 이곳이야말로 블루곤이 활약할 전장이기도 했다.
“블루곤. 단 한 척의 배도 통과시키지 마라.”
그동안 잔인하고 포악한 해룡의 본능을 억누르고 있었던 해룡의 흉성이 폭발했다. 해룡은 기꺼이 주인을 위해 적의 생명줄을 물어뜯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크아아아!
“모, 몬스터다!”
“사, 살려줘어!”
원양을 항해하던 거대한 범선도 버티지 못했던 해룡의 습격, 기껏해야 강이나 오고 가는 보급선들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보급선들은 병사들의 배를 채워줄 식량과 부러진 창칼을 대신해줄 무기들을 실은 채, 그대로 수장되었다.
“보급부대가 몬스터의 습격을 받아 전부 침몰했습니다!”
“뭣이라!”
하염없이 보급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던 녹테인의 동부군은 뒤늦게 병참선이 적에게 습격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수십 척에 달하는 보급선들이 블루곤의 습격에 침몰하고 난 후였다.
보병과 기병, 거기에 더해 기사와 마법사의 수까지 부족한 상황에서 보급까지 문제가 생기니 동부 전선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전황이 악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종적을 감췄던 하늘의 악마가 다시금 전선을 활개치고 다니기 시작했다.
“와라. 그날이 네놈의 마지막이 될 테니.”
아군 기사들을 폐인으로 만들고 서른의 마법사를 전멸시킨 강적, 붉은 늑대들과 마법병대는 칼을 갈며 아덴버그의 악마와 일전을 치를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악마는 그들을 비웃듯이 철저하게 보병과 기병들만을 공격했다.
가장 발 빠른 말로도 쫓을 수 없는 가공할 이동속도에 동부군은 그 어떤 대비책도 마련할 수 없었다.
피해는 계속해서 늘어갔고, 동부군 전체에 공포가 전염됐다.
병사들은 와이번에 올라탄 끔찍한 적을 붉은 악마라 부르며 두려워하였고, 하늘을 나는 새만 보아도 경기를 일으켰다.
그런 상황에서 제대로 전선이 유지가 될 리가 없었다. 하늘을 신경 쓰느라 병사들은 전투에 집중할 수 없었고, 전력이 대등한, 심지어 더 우세한 전장에서마저도 무력하게 패배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빼앗긴 영토의 수복은커녕 이제는 동부를 넘어 중부의 안위까지 염려해야 할 상황이었다.
결국 녹테인의 동부군은 전쟁이 발발한지 불과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동부를 완전히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
전쟁이 국경 너머에서만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미 총력전을 펼친 녹테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요인에 대한 암살 시도마저도 주저하지 않았다.
“부질없는 짓을 하는군.”
왕족은 물론 왕도 내의 요인들의 경호를 도맡은 레인하르트 후작은 녹테인의 발악에 코웃음을 쳤다.
애초에 동부와 서부 양쪽으로 전력을 분산하여 투입해야 할 녹테인의 기사 전력으로는 효과적으로 공작을 펼칠 수가 없었다.
그에 반해 아덴버그 왕국은 전력에 여유가 있었고, 가용 가능한 기사들이 넘쳐났다.
그들은 레인하르트 후작의 명을 받아 진즉부터 요인의 경호에 투입된 상태였다. 당연하게도 녹테인의 암살 시도는 대부분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운 없는 몇몇 영주들이 암살당했을 뿐,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대국에 영향을 줄 정도로 크지 않았다.
그렇게 녹테인의 암살자들이 기승을 부리는 과정에서 라인펄 영지 역시 적의 습격을 받았다.
영주가 자리를 비운 마당에 뭐 중요한 게 있어 이런 시골 영지를 습격했겠냐마는 그간 김선혁에게 당한 원한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보니 복수라도 할 모양이었다.
“각자 맡은 바 임무 완수하고, 다음 목적지에서 만나자.”
영지에 잠입한 녹테인의 기사들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자신들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강자가 영지에 상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어찌 알았으랴.
“상급 기사씩이나 되는 인물이 왜 이런 변방에….”
하필이면 이곳에 무려 그라두스 46위에 빛나는 아샤 트레일이 있었고, 녹테인의 정보부가 왕녀의 변덕 탓에 옮겨진 임지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게 습격자들에게는 더 없는 불행이었다.
“컥.”
아샤 트레일은 대답 대신 도주의 기미가 보이는 상대를 앞질러 깔끔하게 목을 베어냈다.
“가, 감사합니다. 트레일 경. 경이 없었다면….”
영주 대행을 맡고 있었던 안토인 몽테뉴가 반쯤 정신이 나간 얼굴로 감사 인사를 표했다.
“제 임무일 뿐이니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그녀는 겁에 질린 노학자를 뒤로 하고 저택 밖으로 향했다. 방금 전에 무려 둘씩이나 되는 기사를 상대했다고는 상상도 가지 않을 정도로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침입자가 다섯 있었지만, 전원 처리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나서기도 전에 나머지 습격자들 역시 제압되었다.
창고에 불을 지르기 위해 침입했던 습격자는 어둠속에 웅크리고 있던 골드레이크에게 산채로 찢어발겨졌고, 다른 곳을 습격했던 자 역시 잭슨과 줄리앙, 그리고 트리스탄의 협공을 받아 분전 끝에 절명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전쟁이 곧 끝나려나 보다.”
“네?”
아샤 트레일의 말에 줄리앙이 반색을 했다.
“벼랑 끝까지 몰리지 않았다면, 귀한 전력을 이 따위 공작에 소모할 리가 없다. 전선의 아군이 꽤나 잘 싸우고 있는 모양이다.”
그녀의 말 대로였다.
녹테인은 더욱더 심화되어 가는 서부 전선을 지키기 위해 차라리 동부를 포기하는 것을 선택했고, 종전 협상을 위한 특사를 파견했다.
그리고 그들은 협상을 맺기 전에 조금이나마 영토를 수복하여 국경을 전진시키기 위해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드레이크 나이트, 그놈만큼은 반드시 목을 베고 말리라.”
그간 아덴버그의 기사들과 크고 작은 전투를 펼치느라 쌓인 피로가 꽤나 컸지만, 복수를 천명하는 헤일로의 눈빛은 형형하게 빛났다.
“장담하건대 감히 내 앞에서 날개조차 제대로 펴지 못할 걸세.”
탈리스만이 그런 헤일로를 돕겠다며 나섰다.
“갑시다.”
오직 선임 기사급 이상의 강자들과 경지에 오른 마법사들만을 추려 드레이크 나이트를 노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