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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115화 (115/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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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하늘을 지배하는 자가 전장을 지배한다. (4)

허무하게 마법 전력을 잃었다는 사실이 녹테인의 기사들을 벼랑 끝으로 몰았다. 왕실의 문책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마법사들도 잃은 마당에 왕실이 전선의 기사들까지 사기가 꺾이게 만들 가능성은 전무했다. 실제로 보고를 올렸을 때, 왕실은 푸른 늑대들을 질책하지 않았다.

“이미 붉은 늑대들과 제 4 마법병대가 동부로 향하고 있다. 마법사들의 복수와 상처 입은 그대들의 자존심은 그들이 당도한 즉시 만회되리라.”

뼈아픈 손실에 안타까움과 분노를 표했지만, 그보다 남은 기사들의 전력이 손상될 일을 우려했다.

“빌어먹을 드레이크 나이트.”

지원군의 합류 소식, 왕실의 변함없는 애정, 그런 것들은 기사들에게 조금도 위안거리가 되지 않았다. 푸른 늑대의 기사들은 자신들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 상황에서 서른이나 되는 마법사들을 잃었다는 사실에 분노했고, 자존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그들은 실추된 명예와 자존심을 만회하기 위해서 더욱 날뛰어대기 시작했다.

“전부 죽여라! 포로 따위는 필요 없다!”

아덴버그의 보병들은 분노한 초인들을 막아낼 수 없었다. 방패로 막으면 방패 채로 몸이 두 동강이 났고, 검을 내지르면 검이 닿기도 전에 목이 달아났다. 아덴버그의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갔다.

그리고 불과 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전장에서 살아 움직이는 아덴버그의 병사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4개 중대 규모의 보병대를 전멸시켰습니다. 도주하던 자들도 전부 죽였습니다.”

수백의 보병을 학살하고도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듯 독기가 오른 부하의 보고에 록슈타트 단장이 차갑게 명령했다.

“다음 전장으로 이동한다!”

복수는 이제 시작이었다. 록슈타트 단장은 허무하게 잃은 마법사들의 핏값을 아덴버그의 모든 병사들에게 물을 작정이었다. 푸른 늑대 기사단과 궁기병대는 빠르게 다음 전장을 향해 이동했다.

**

김선혁은 평원에 즐비한 시체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시체를 처음 본 건 아니었다. 아군의 죽음이라면 수도 없이 겪었고, 이런 걸로 흔들릴 정도로 전장의 경험이 적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빌어먹을….”

그것도 그럴 것이 죽어 나자빠진 시체들 중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던 탓이다. 바로 얼마 전에 기사단에 쫓겨 주둔지를 버리고 달아났던 보병대의 지휘관과 병사들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차라리 말해주지 말걸….

적이 걸음을 돌렸다는 사실을 알려준 게 실수였다. 동료를 후퇴시키기 위해 제 목숨마저 내놓겠다던 병사들이라면 전선에 복귀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차라리 칼스테인 요새까지 후퇴하게 두었다면 이렇게 이틀 만에 목숨을 잃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게 자신의 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마음이 복잡해졌을 뿐이었다. 친분이라고는 그날 나눈 짧은 대화가 전부였지만, 안면이 있는 자의 죽음은 늘 더 무겁게 느껴졌다.

이래서 전쟁이 싫다.

죽음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바로 직전까지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누군가가 사라진다는 것은 정말로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김선혁은 마냥 슬퍼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언젠가 동료들의 무덤 앞에서 소리 내어 울었던 신병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끔찍한 증오의 고리, 그 한가운데 선 괴물들 중 하나였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저들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가해자의 입장에 서는 것도 주지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편히 쉬십시오.”

불쑥 일어난 대지가 병사들의 시체를 깊이 안아주었다. 그것만으로 수백에 달하는 병사들의 무덤이 완성되었다.

“괜찮아요?”

돌아선 그가 레드번의 등에 오르니, 어지간해서는 타인의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아리아 아이젠이 물었다.

“전혀 괜찮지 않소.”

그는 차갑게 대꾸했다.

“그래서 이렇게 만든 놈들도 괜찮지 않게 만들어줄 생각이오.”

경지 높은 검력에 그대로 반 동강이 난 시체들, 흉수가 누구인지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

세상의 그 어떤 준마도 하늘을 나는 레드번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하물며 중갑 입은 기사들을 태운 녹테인의 기병대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김선혁은 뿌옇게 먼지를 일으키며 내달리는 푸른 늑대 기사단을 보고는 눈을 빛냈다.

“속도가 너무 빨라요. 지금 이 상태로는 가장 작은 주문도 실패하고 말 거예요.”

이미 그녀와 몇 번 호흡을 맞춰보았던지라, 그 정도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레드번의 속도를 올려 녹테인 기사단을 추월했다.

“멈춰.”

그의 명령에 레드번이 날개를 확 펼쳐 들고는 허공에 자리를 잡았다. 적과의 거리를 가늠하던 그가 아리아 아이젠을 돌아보았다.

“아이젠 경.”

“그럼 시작할게요.”

로브자락을 걷고 손을 내뻗은 그녀가 조용히 입술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

록슈타트 단장은 갑작스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정체 모를 불길함에 그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땅에도 하늘에도 그가 걱정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예민해진 건가.”

“뭔가 문제라도 있으신 겁니까?”

바로 뒤에서 말을 달리던 부관이 물었다.

“아니.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드레이크 나이트가 신경 쓰이시는 겁니까?”

단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간 자신이 드레이크 나이트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일까 저어된 것이다.

“모든 기사들이 배후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뒤를 잡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와이번이 아니라 뭐든 간에 접근했다 하면 온몸을 분해해버리겠다며 기사들이 호언장담을 했다. 평소라면 그 기개 높은 모습에 록슈타트 단장도 껄껄거리며 웃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한 번 불안감이 들기 시작하자 마치 턱 끝에 비수가 닿은 것처럼 영 껄끄럽기만 했다. 불길함은 아무리 털어내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이 되자 불길한 예감이 실체를 갖고 온몸을 옥죄기 시작했다.

“이건….”

왜 이제야 알아차린 것인지, 이질적인 기운이 온몸에 끈적끈적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생경한 감각, 하지만 그는 이런 감각이 언제 느껴지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마법!”

마법사가 대상을 선정했을 때 일어나는 타겟팅 현상이었다. 그는 단숨에 검을 뽑아 들며 검력을 바짝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가 검을 뽑아들었을 때는 이미 마법이 발현되고 난 후였다.

화아악!

첫 번째 마법은 폭발적인 섬광과 함께 사방을 경계하던 기사들의 시력을 앗아갔다.

콰지직!

두 번째 마법은 내달리던 말의 발목을 잡아챘다. 시각을 잃은 기사들이 속절없이 말에서 떨어져 나뒹굴었다. 하지만 인간을 초월한 힘을 손에 넣은 초인들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 무섭게 몸을 벌떡 일으키며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때 세 번째 마법이 발현되었다.

쐐에에에에엑!

귀를 찢는 파공성과 함께 무언가가 날아들었고, 록슈타트 단장은 그게 당연히 드레이크 나이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는 감각에 의지해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잔뜩 검력을 실어 검을 내던졌다.

콱.

검이 무언가를 꿰뚫고 파고드는 소음에 주먹이 불끈 쥐어지고 저도 모르게 환호가 튀어나왔다.

쨍그랑.

하지만 짜릿한 희열은 오래가지 않았다. 비명소리 대신 들려온 날카로운 소음이 생경했다. 마치 유리조각이 깨어져 나가는 듯한 소리, 드레이크 나이트는 유리로 만들어진 조각상이 아니었다. 그 말은 자신의 검이 관통한 것이 드레이크 나이트의 육신이 아니라는 의미나 다름이 없었다.

콰드득.

뭐가 잘못된 것인지를 채 깨닫기도 전에 이변이 일어났다.

“조심!”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가 부하들을 향해 경고하는 순간 작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갑주를 긁고 스쳐갔다. 충격도 고통도 없었다. 정체불명의 물체는 그저 갑주에 생채기를 냈을 뿐이었다. 다급히 경고했던 스스로가 우스워질 만큼 하찮은 공격이었다.

콰득, 콰드득.

하지만 몸을 두들긴 것은 하나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하나둘이었던 무언가가 이내 무더기로 쏟아지며 갑주를 두들겨댔다.

“크윽.”

그리고 그중에 몇 개인가가 드러난 맨살을 파고들었다. 록슈타트 단장은 뒤늦게 방패를 들어 올려 몸을 가리려 했다. 하지만 방패는 말에 메어두었고 그는 이미 말에서 굴러떨어지고 난 후였다.

“아….”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정체불명의 물체가 소나기처럼 그의 온몸을 적셨다.

“끄아아아악!”

“악! 내 눈!”

곳곳에서 수하들이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어떤 고통도 능히 견뎌낼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단련한 기사들이 계집아이처럼 비명을 지르며 고함을 쳐댔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그는 마구잡이로 눈을 비벼대며 눈을 부릅떴다. 극심한 통증을 참고 한참을 눈에 힘주고 있자니, 암흑뿐이던 세상이 조금씩 밝아져갔다.

“이게 대체….”

시각을 되찾은 그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흉물스럽게 살점이 녹아버린 말들이 사방을 날뛰어대고, 무거운 마갑을 두른 전마들이 피우는 난동에 휘말린 기병들과 기사들이 질러대는 비명에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그는 뒤늦게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검붉게 녹슬어버린 갑주 사이로 보이는 맨살이 온통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변색된 피부 사이로 군데군데 녹색 액체가 얼룩처럼 묻어 있었다.

“독?”

심상치 않은 빛깔에 손가락을 슬쩍 대니, 맞닿은 손끝의 감각이 순식간에 사라져갔다. 그리고는 이내 썩어버린 살과 마찬가지로 검게 변색되었다.

**

아리아 아이젠이 발현한 베놈 스피어(Venom Spear)는 적 기사의 칼에 맞아 산산조각이 나며 오히려 효과가 더욱 극대화되었다. 허공에서 부서진 창의 조각들이 사방팔방으로 튀며 죽음의 비가 되어 기사들을 덮쳤다.

하지만 그렇게 온몸에 마법의 파편을 뒤집어썼음에도 정작 기사들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끝까지 일어나지 못한 기사들의 수는 고작해야 스물이 되지 않았고, 그나마도 대부분이 견습기사로 보이는 자들이었다. 화려한 갑주를 입은 진짜 기사들 중에 절명한 자는 고작 둘이었을 뿐이었다.

과연 육신을 극한까지 단련한 기사다운 맷집이었다.

“진짜 효과는 지금부터예요.”

다소 실망한 얼굴이 된 김선혁에게 아리아 아이젠이 자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

“산(酸)에 가까운 극독을 온몸에 맞았으니 피부가 녹아내리고 썩어 갈 거예요.”

그녀는 애초부터 단숨에 기사들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겼고, 차라리 독에 중독시켜 천천히 죽일 작정이었다고 말했다.

“운이 좋은 자들은 피부를 도려내는 정도로 살아날 것이고, 제대로 파편을 맞은 자는 아마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테죠. 그리고 살든 죽든 간에 평생 잊지 못할 고통에 시달리게 될 테죠.”

키득거리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최소한의 죄책감이나 회의감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오직 마법의 성공과 고통 받을 적들에 대한 상상으로 즐거워 보일 뿐이었다.

“음.”

평소 보여 왔던 나사 풀린 모습과는 상반된 모습, 꺼림칙한 기분에 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마법사라는 족속들이 전부 그녀와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인간이 아닌 꺼림칙한 무언가를 등 뒤에 태우고 다니는 듯한 기분이 든 것이다.

“돌격하실 건가요. 제 몸이 견딜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겪어보고 싶군요.”

마치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듯한 이질적인 음성에 그는 가만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몸을 일으킨 기사들 중 태반이 마법의 발원지를 찾아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지금 강습을 시도했다간 스킬을 채 쓰기도 전에 독이 오른 기사들에게 사지가 절단나기 십상이었다.

“다음 기회에.”

김선혁은 다음을 기약하며 레드번을 몰아 전장을 벗어났다. 하지만 그는 한 번으로 습격을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날 이후로 작정하고 기사단만을 노리고 뒤를 따라다녔다. 그렇게 한참을 따라다니다 기사들이 조금이라도 방심을 할라치면 곧바로 마법을 퍼부어댔다.

“마법이 타겟팅 됐다!”

“선임 기사들은 요격하고, 평기사들은 견습기사들과 연계하여 스스로를 보호하라!”

아리아 아이젠이 개발한 기기괴괴한 마법이 기사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녀는 마법의 연계에 관한한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고, 기사들은 혹한의 냉기와 폭발적인 화염을 번갈아 맛보며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으. 바퀴벌레 같은 놈들.”

하지만 온몸이 그을리고 얼어붙으면서도 그들은 끝내 마법을 견뎌냈다. 애꿎은 전마들만 계속해서 죽어나갈 뿐이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뒤를 따르며 폭격을 가하다 보니 어느 순간이 되자 기사들이 도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기병 전력이 풍부한 녹테인이라고 해도 전마의 소모를 감당하기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진짜 단단하네.”

김선혁은 감탄을 토해냈다. 쉽지 않을 거란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기사들의 맷집은 그의 예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의 목표는 기사단을 전멸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적들이 폭격을 경계하느라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는 것만 해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최소한 저들이 전멸시킨 보병대에 대한 핏값만큼만은 이자까지 톡톡히 쳐서 받아낼 생각이었다.

“이제 방법을 바꿔봐야겠군.”

김선혁은 강력한 한 방보다는 자잘한 마법을 여러 번에 걸쳐 사용할 것을 당부했다. 한창 마법을 쓰느라 신이 나 있던 아리아 아이젠은 딴지가 걸리자 입을 비죽 내밀고 이유를 물었다.

“잘 때 못자고, 먹을 때 못 먹는 게 사람을 제일 미치게 만드는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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