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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114화 (114/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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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하늘을 지배하는 자가 전장을 지배한다. (3)

마치 온몸의 무게가 제로가 된 듯 기묘한 감각, 하강 직후에 느껴지는 부유감 속에서 김선혁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흡.”

하나도 아닌 수십이나 되는 초인들의 틈바구니 속으로 돌진하는 것은 정말로 미친 짓이었다. 아주 작은 실수만으로도 자신은 끔찍한 검력의 폭풍과 마법의 향연 속에서 시체조차 온전히 남기지 못하게 될 것이다.

멈추려면 지금 멈춰야 한다. 이 기이한 부유감이 사라지고 나면 늦어버린다. 그때는 이미 속도가 붙을 대로 붙은 레드번을 절대로 멈춰 세울 수 없을 테니까.

긴장과 두려움 속에서 그는 깊게 들이마셨던 숨을 도로 내뱉었다.

“후우.”

폐 속의 공기가 빨려 나가며 머릿속의 잡념도 함께 사라져갔다. 그는 거창을 움켜잡은 손가락에 꽉, 하고 힘을 주었다.

“흡.”

서서히 속도를 올려가는 레드번 위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들숨이 충분히 모였다 싶은 순간, 레드번이 폭발적으로 가속하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부유감이 완전히 사라지고, 무지막지한 중력이 그를 짓눌렀다. 오장육부가 전부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끔찍한 고통, 하지만 신음을 내뱉을 수조차 없었다. 마지막으로 들이마신 이 한 줌 호흡만이 이 무모한 돌격이 끝나는 순간까지 그를 지탱해줄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는 신음 대신 이를 까드득, 깨물었다.

쐬에에엑.

까마득하기만 했던 대지가 순식간에 눈을 가득 채웠다. 그 너머에 아무것도 모른 채 다그닥 다그닥 말을 몰아가는 기병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꽉 잡은 창을 내지르기만 하면 저 가엾은 기병들은 갈기갈기 찢겨져 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는 창을 내지르는 대신, 더욱 더 자세를 낮췄다.

그의 목표는 흔하디흔한 궁기병 따위가 아니었다. 그 너머, 강력한 기사들과 기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하는 마법사들이 바로 그의 목표였다.

그리고 마침내 로브자락 속에 몸을 숨긴, 마법사들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윈드 피어싱.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극한의 환경 속에서 김선혁은 속으로 자신이 지닌 가장 강력한 스킬의 이름을 외쳤다.

화악!

그를 감싸고 있던 바람의 베일이 걷히고, 장막 속에 갇혀있던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콰르르르르르르

태풍에 깃발 나부끼는 듯한 거북스러운 굉음, 말을 몰아가던 녹테인의 모든 병사들이 일제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어?”

얼빠진 소리와 동시에 레드번이 울부짖었다.

크아아아아!

그 순간 흉악한 날짐승이 마법사들을 덮쳤다.

콰앙!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리며 내지른 윈드 피어싱은 그야말로 재앙 그 자체였다.

마치 솟구치는 용권풍을 거꾸로 뒤집어 대지에 내리꽂은 듯한 공격은 날카롭다기보다는 묵직했고, 그 무지막지한 공격의 한가운데 있었던 서른 명의 마법사는 문자 그대로 압살당하고 말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성과, 하지만 기뻐할 여유는 없었다. 당장 내장이 흔들리는 끔찍한 충격과 고통은 둘째 치고서라도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지 않으면, 수십의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살해당하게 된다.

“칵!”

김선혁은 거하게 피를 한 번 토해내고는 레드번의 고삐를 잡아챘다. 충돌의 여파로 머리통을 이리저리 흔들어대던 레드번이 반사적으로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기사 하나가 욕설을 내뱉으며 검광을 피워 올렸다. 하지만 이미 비상을 시작한 레드번에게 날 짧은 검은 닿지 않았고, 그저 허무하게 허공을 한 움큼 베어냈을 뿐이었다.

**

쾅!

록슈타트 단장은 순간적으로 얼이 빠지고 말았다. 갑작스레 무언가가 짓쳐든다 싶더니, 대열의 한가운데를 완전히 짓이겨버렸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위치가 마법사들이 뭉쳐있는 곳이었다. 마법사들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고, 주변에 있던 기병들 수십 기가 충격에 휘말려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검광을 날렸지만, 괴수는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유유히 날갯짓을 하며 드높은 창공으로 도망쳤다. 그리고는 잠시 이쪽을 내려다보다 하늘 너머 어딘가로 사라졌다.

“이게 대체….”

록슈타트 단장의 눈에 형체도 없이 짓이겨진 고깃덩이들이 보였다. 그들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었으며, 왕실에서 애지중지하던 귀한 재원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형체도 없이 짓이겨진 서른 구의 시체에 불과했다.

왕실에서도 애지중지하던 마법병단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으아아아아아!”

록슈타트 단장이 괴성을 지르며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러댔다. 분노한 상급 기사의 검력이 온 사방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 바람에 가뜩이나 상태가 좋지 않던 마법사들의 시체가 넝마가 되고 말았다. 기겁을 한 부관과 선임 기사들이 그를 막아섰다.

“단장님!”

“진정하십시오!”

하지만 잠깐 사이에 서른 명이나 되는 마법사를 잃은 그의 분노는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았고, 그를 만류하기 위해 나섰던 기사들은 한동안 진을 빼야 했다.

“후우.”

한참이나 날뛰어댄 록슈타트 단장은 뒤늦게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살아남은 마법사는 없는가.”

“전원 절명했습니다.”

흥분과 분노 대신 절망이 강인한 사내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록슈타트 단장은 귀하디귀한 마법사를 허무하게 잃었다는 사실에 절망했고, 요새를 손에 넣을 가장 강력한 무기를 잃었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적의 정체는?”

“와이번입니다. 그 위에 기수가 타고 있는 것까지는 확인했지만, 그게 누구인지 어디 소속인지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무려 서른이나 되는 마법사 전력을 잃고도 습격자가 누구인지 파악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겨우 진정시켰던 분노가 다시금 끓어오를 지경이었다.

“와이번이라니! 대체 누가 무슨 수로 와이번을 길들였다는 말인가!”

의문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감이 예민한 기사들조차도 와이번의 접근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와이번이 바로 머리 위까지 당도하고 나서야 겨우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때는 이미 손을 쓰기에는 너무 늦은 상태였다.

“혹시 그리핀도르의 그리핀 라이더들이 아닐까요? 만약 와이번을 길들이는 데 누군가 성공했다면, 그들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리핀도르에는 ‘창공의 일곱 기사’라 불리는 그리핀 라이더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리핀도르의 의심 많은 군주는 창공의 기사들을 왕성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 없었고, 설령 그리핀도르가 그리핀 라이더들을 출전시켰다고 한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낼 곳은 이곳 동부가 아닌 서부 전선이었다.

자국의 귀한 전력을 엉뚱한 곳에 보낼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리핀 라이더들은 하나같이 검으로 경지에 오른 자들이라고 들었다. 그들 중 창을 쓰는 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인접 국가들과 워낙에 사이가 좋지 않은 녹테인은 각국의 기사들에 대한 정보라면 어지간히 사소한 것이라도 전부 정탐을 마친 상태였다. 그렇기에 그는 상대가 그리핀 라이더가 아니라 확신했다.

“하지만 적은 분명 창을 썼다. 비록 제대로 휘두른 것을 본 것은 아니나, 그렇게 특이한 창을 단지 장식용으로 들고 다닐 리가 없지.”

“아….”

그의 말에 부관이 침음을 내뱉었다.

“5미터가 넘는 기형창을 쓰는 기사라면 떠오르는 자가 있습니다.”

“그게 누구지?”

“드레이크 나이트, 아덴버그의 이방인 백작이 딱 그런 무기를 쓴다고 들었습니다.”

와이번에게서 기수로 초점을 옮기자 적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물론 드레이크를 타고 전장을 누비던 자가 갑작스레 와이번을 타고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의외였으나, 지금으로서는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딱 맞아떨어지는군.”

만약 이 사실을 조금만 일찍 알았다면 그토록이나 허무하게 마법사들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날아들기도 전에 마법사들의 마법에 곤두박질치는 드레이크 나이트를 볼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봐야 늦는 법, 이제 와서는 전부 부질없는 가정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무리 아덴버그의 기사들이 참전하지 않았다고 해도, 마법사도 없이 요새를 공격하는 건 무리한 일입니다.”

수수께끼는 풀렸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적의 정체를 알았다고 해서 죽어버린 마법사들이 다시 살아나는 건 아니었다.

“시체를 수습해라. 주둔지로 돌아간다.”

칼스테인을 점령하겠다며 호기롭게 나섰던 푸른 늑대 기사단은 마법전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피해만 입고 말머리를 돌려야 했다.

“음.”

그들은 시시때때로 하늘을 노려보았다. 언제 다시 또 습격을 해올지 모르는 적의 존재가 강박적으로 하늘을 경계하게 만든 것이다.

**

레드번 위에 엎드린 채 축 틀어져 적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김선혁은 적들이 수시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경계하는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두 번은 힘들겠어.”

이미 적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오늘과도 같은 성과를 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독이 오른 기사들이 검광을 줄기줄기 뽑아 수십 조각을 내려고 들 테니까.

“그래도 이 정도면 훌륭하지.”

단 한 번의 돌격으로 서른 명이나 되는 마법사들을 전멸시켰으니, 소기의 목적을 달성시키다 못해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아군 보병대가 퇴각할 시간을 벌겠다고 나섰던 게 아예 적이 발을 돌리게 만들었으니, 그야말로 눈부신 쾌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혁은 웃을 수가 없었다. 단 한 번의 차징으로 온몸의 기력이 소진되었고, 충돌의 여파로 흔들린 내장이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듯 속이 울렁거렸다.

설령 적들이 또 한 번 틈을 내준다고 해도 이 무모한 돌격을 다시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후. 돌아가자.”

**

“지금 뭐라고 했나?”

김선혁의 보고를 들은 맹스크 사령관은 어울리지 않게 멍청한 얼굴을 해보였다.

“녹테인의 마법병대는 전멸했습니다.”

“대체 어떻게….”

다시 설명을 해주었지만, 사령관은 여전히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그만큼 그가 세운 전공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제껏 그가 크고 작은 전투에서 세운 모든 공을 다 합쳐도 비교가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적들은 저와 레드번의 존재를 몰랐으니까요.”

만약 기사들을 노렸다면 이 정도로 큰 공을 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주문이 준비된 마법사들은 기사 이상 가는 힘을 발휘하는 초인들이었지만,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한 마법사들은 차라리 일반 병사들만도 못한 존재였다. 그가 마법사를 타깃으로 돌격을 강행한 것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미치겠군.”

감탄을 넘어 실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맹스크 사령관을 보며 김선혁은 어깨를 당당히 폈다.

“당장 폐하께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해드려야겠네.”

사령관은 연락석을 이용해 왕실과 통신을 연결했다. 워낙에 거리가 멀고 마법사의 실력이 좋지 않아, 음질도 감도도 엉망이었지만 짧게 상황을 보고하기에는 충분했다.

[정말로 놀랍군. 설마 녹테인이 자랑하는 마법병대를 전멸시킬 줄이야.]

보고를 받은 테오도르 국왕도 맹스크 사령관과 그 반응이 다르지 않았다.

[대체 이번에는 그대에게 무엇을 줘야 할까. 벌써부터 고민이구나. 나를 이리 골치 아프게 만들다니, 참으로 고얀 자로다.]

말과는 달리 웃음기 가득한 음성 그 어디에도 질책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고민이라면 앞으로 얼마든 해도 좋다. 그러니 그대는 앞으로도 나를 고민토록 하여라. 내 기꺼이 머리를 싸매고 몇 날 며칠을 밤을 세우리라.]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승작이라도 시켜줄 듯한 목소리였다.

[전쟁이 끝나는 날 그대는 왕국 역사상 기사된 자로 가장 창대한 영광을 누릴 것이라 약속하겠노라.]

급기야 국왕은 거창한 보상을 약속하고는 통신을 마쳤다.

“허. 폐하께 드릴 말이 있었는데, 어지간히 기쁘셨던 모양이로군. 그토록이나 철저한 분이 할 말만 하고 통신을 끊으실 줄이야.”

맹스크 사령관은 난색을 표했지만 그게 정말로 곤란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입 꼬리가 잔뜩 치켜 올라가 있었을 리가 없었다.

“하기야 저리 기뻐하시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네. 녹테인의 마법병단은 오로지 전투 마법만을 연마해온 자들이네. 그런 그들이 제대로 된 활약을 해보기도 전에 전멸했으니, 아군의 피해가 줄어들 건 불 보듯 뻔한 일, 인재를 아끼시는 폐하이시니만큼 기쁘실 만도 하네.”

마법사들이 전멸하며 아군의 부담만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원거리 공격에 능한 마법사들을 처리했으니, 앞으로 김선혁 스스로도 기사단을 상대하는 데 상당한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창공에 머무는 동안은 기사들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를 해할 수 없었다.

잔뜩 독이 오른 기사들을 상대로 전과 같은 돌격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준비한 무기는 강력한 돌격뿐만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준비됐어요.”

그라두스를 지닌 마법사이자 레드번의 비행에 미친 마법사 아리아 아이젠 역시 그가 준비한 한 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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