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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하늘을 지배하는 자가 전장을 지배한다. (2)
“현재 모든 전선, 아군이 유리한 상황입니다.”
푸른 늑대 기사단과 왕실 마법병대가 참전한 이후로 녹테인의 기세는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푸른 늑대가 수놓아진 깃발이 전장에 나섰다 하면, 아덴버그 왕국군은 싸우기도 전에 줄행랑을 쳤다. 덕분에 7할에 가깝게 상실했던 동부의 영토를 상당부분 수복할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늦어도 나흘이면 칼스테인 요새까지 아덴버그 놈들을 밀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관의 보고는 시종일관 낙관적이었고, 또 그만큼 전황은 녹테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도 상급 기사 로우베인 암릿처 록슈타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현재까지 적 피해 상황은?”
“아군 기사단이 전멸시킨 보병대가 1개 연대 규모고, 마법병단 역시 비슷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 외에도 아군이 와해시킨 적의 수가 보병 8개 중대이며, 적 경기병대에도 상당한 피해를 입힐 수 있었습니다.”
“부족해. 부족해.”
“이미 아군이 개전 직후 입었던 피해와 비슷한 피해를 적에게 안겨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부족하단 말씀이십니까?”
부관은 보름도 안 되는 시간동안 이렇게 놀라운 전과를 세우고도 부족하다 말하는 록슈타트 단장의 말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기색이었다.
“기사단과 마법병단이 전선에 뛰어들었어. 그런데도 적은 아직도 건재하다.”
“아군이 거둔 크고 작은 승리만 해도 보름간 20회가 넘습니다. 또한 잃었던 영토를 이 정도까지 수복한 건….”
“아직도 내 말을 못 알아듣겠나?”
부관의 보고에 록슈타트 단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기분이 영 좋지 않은 것인지 그 기세가 마치 날 벼린 칼처럼 예리했다.
“스무 번을 싸워 스무 번을 승리했다. 이쯤이면 국경을 넘은 아덴버그의 서부군을 괴멸시켰어도 이상하지 않지. 그런데 지금 상황은 어떤가.”
단장의 손가락이 넓게 펼쳐진 지도의 이곳저곳을 가리켰다.
“아직도 이곳 동부에는 아군보다 적의 수가 더 많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나?”
부관은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듯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
“요란하게 깨져서 도망친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적이 입은 피해는 우리 예상보다 훨씬 더 적다는 말이다.”
그 말은 무질서해 보였던 퇴각마저도 모두 의도된 것이라는 의미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분오열해서 도주했던 적 연대와 부대들이 며칠 지나지 않아 당당하게 깃발을 내걸고 전선에 복귀할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설마….”
“그 설마가 맞겠지. 적은 우리를 끌어들이고 있다.”
“그럼 전 부대에 알려 진격속도를 조절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대가 맹스크의 여우라 불리는 비텐펠트 로이엔 맹스크이기에 부관은 더욱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정작 전황에 대해 비관적인 견해를 늘어놓았던 록슈타트 단장은 웃고 있었다.
“아니. 우리는 더욱더 속도를 올린다. 전 부대에게 알려 공세를 강화하도록 하라.”
녹테인 군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이미 이쪽에서 기사 전력을 투입했다는 소식이 들어갔을 테니, 적의 정예 기사단도 지금쯤이면 죽어라 달려오고 있을 게 분명했다.
“맹스크의 여우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빠르게 칼스테인 요새로 진격한다.”
록슈타트 단장의 손가락이 일직선 상으로 지도를 거슬러 올라갔다. 손가락이 지나는 곳에 놓인 말들이 자빠지고 튕겨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거치적거리는 보병대와 기병대는 박살내면 그만.”
초인들이 무서운 이유는 그들에게 전선과 국경이 아무런 저지력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록슈타트 단장은 적의 종심부를 관통하듯 전선을 넘어 곧장 칼스테인 요새를 타격할 것이라 선언했다.
“나흘도 길다. 늦어도 모레, 아군은 칼스테인에서 저녁을 먹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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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다.”
기사단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직 아덴버그의 기사단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금 그들은 적수가 없었고, 당당하게 자신들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황야를 훑으며 비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김선혁은 유달리 무장이 화려한 적 기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서 그들을 지켜보고 싶었지만, 자칫 잘못하다가는 유달리 감각이 예민한 기사들에게 발각될 수도 있었다.
그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그들의 규모를 확인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음.”
그런데 그렇게 확인한 녹테인의 기사들이 어쩐지 부산스러웠다. 갑주를 걸치고 말에 올라 대열을 갖추는 게 당장에라도 어디론가 말을 내달릴 것 같았다.
“어디로 가는 거지?”
가만히 그들이 주둔지를 나서는 것을 본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도처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으니 그들의 행선지를 짐작하는 게 영 어려웠다.
조금 더 지켜볼까.
일단 어디로 향하는지만 알면, 아군에게 알릴 생각이었다.
말에 올라탄 기사들을 과연 보병대가 떨칠 수 있을지는 둘째 치더라도,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는 알고 대비는 것이 조금이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길이었다.
적이 자신들의 움직임을 속속들이 염탐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녹테인의 기사단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일백의 중무장한 기사들 뒤로 다시 서른 남짓한 로브 뒤집어쓴 인물들이 합류했다. 그리고 다시 녹테인 특유의 궁기병 복색을 한 기병, 3개 중대가 따라붙었다.
일백에서 사백으로 늘어난 적의 전력이 빠르게 이동을 시작했다. 그는 가만히 그들의 뒤를 쫓으며 방향을 가늠하다가 이내 목적지를 깨닫고는 그들을 앞질렀다.
“아티야. 저들을 놓치지 말고 지켜봐 줘.”
‘맡겨 두세요.’
“너무 접근하지 말고, 그냥 위치만 놓치지 않으면 되니까.”
혹시 몰라 몇 마디 당부를 남긴 그가 빠르게 아군의 주둔지를 향해 레드번을 몰았다.
갑작스러운 와이번의 출현에 혼비백산한 아덴버그의 병사들이 소란을 떨었다. 뒤늦게 그 위에 위명이 자자한 드레이크 나이트가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도리어 환호했다.
“적 기사단이 이쪽을 향해 접근 중이다.”
하지만 환호는 길지 않았다. 압도적인 전력을 지닌 기사단이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전 부대 퇴각 준비!”
그대로 남아 있어 봐야 기사단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교전을 피하고 최대한의 전력을 보전하라는 맹스크 사령관의 지시까지 있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막사고 뭐고 전부 버리고, 무기와 필요한 식량만 챙기도록!”
“중대 퇴각!”
보병대의 지휘관은 빠르게 퇴각을 준비했고, 김선혁은 그들이 완전히 주둔지를 벗어날 때까지 녹테인 기사단의 동향을 살폈다.
“아슬아슬한데?”
보병대가 주둔지를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녹테인 기사단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텅 비어버린 주둔지를 보고 잠시 주변을 살피다 이내 다시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는 지체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길.”
그런데 그 방향이 하필이면 또 아군 보병대가 사라진 방향이었다. 그대로 두면 금방 뒤를 따라잡힌 아군 보병대가 몰살을 당할 상황, 그는 고민했다.
아직까지 녹테인은 레드번을 길들이는 데 성공한 자신의 존재를 몰랐다. 만약 지금 기습을 한다면 방심한 적들은 꽤나 당황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리아 아이젠 없이는 적들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정령을 이용해 적을 공격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고, 그렇다고 해서 대책 없이 육탄전을 벌일 수도 없었다. 그 과정에서 어쩌면 적들이 레드번의 존재를 눈치채게 될지도 모른다.
잠시 발을 묶어두는 이상의 효과는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수해야 할 위험과 변수가 너무도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민을 길지 않았다.
김선혁은 더 큰 전공과 효과를 위해 아군이 죽어가게 내버려둘 정도로 모질지 않았다. 다소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그는 아군을 구원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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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도망치다 죽어야 한다면, 차라리 이 자리에서 결사항전 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사단이 뒤에 달라붙었다는 소식을 들은 보병대의 지휘관은 절망적인 얼굴로 말했다. 아마도 운이 좋다면 방향이 갈려 기사단을 뿌리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내가 시간을 벌겠다.”
“위험합니다!”
드레이크 나이트의 위명이야 의심할 나위도 없는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 무적의 이름도 옛말이었다. 진짜 초인이라고 할 수 있는 기사들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이상, 그에게 무적과 전승을 기대하는 병사들은 없었다.
“차라리 자원자를 뽑아 부대를 반으로 나누겠습니다. 반이 남아 시간을 끌면, 나머지 절반은 살 수 있겠지요.”
지휘관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하급 장교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든 목숨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벌써부터 자신이 남겠다며 소란을 떠는 병사들을 보던 그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대견함을 느끼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 말았다.
지난 22연대 주둔지의 보병들이 민간인들을 위해 결사항전을 결심했던 것처럼, 이들 또한 그런 상황이 온다면 필시 자신을 희생할 진짜 군인들이었다. 과연 맹스크 사령관이 오랜 세월 공들여 육성해온 서부군은 위험을 감수하고 지켜낼 가치가 있었다.
내 결정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그나마 남아있던 약간의 망설임마저 완전히 털어낼 수 있었고, 그래서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어차피 너희들이 남아서 시간을 벌어봐야 얼마 벌지도 못해. 그러니 쓸데없는 소리 말고 당장 이동해. 이럴 시간이 없다.”
4개 중대의 보병을 둘로 나누어 적을 막아서 봐야 촌각의 시간도 벌지 못하고 전멸당할 게 빤했다. 그리고 그렇게 반이 전멸하고 나면 나머지 반도 금세 따라잡혀 몰살당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명령이다.”
김선혁은 지금 이 시각에도 시시각각 다가오는 기사단의 존재를 상기시켜주며 보병대를 쫓아 보냈다. 그리고는 자신은 보병들이 사라진 방향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레드번을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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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슈타트 단장은 비어버린 주둔지를 보고도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기사단의 목표는 칼스테인 요새와 맹스크 사령관의 목이었지, 이런 시시껄렁한 보병대가 아니었다. 부수적인 전공 따위 적 총사령관의 목에 비하면 하찮기만 했다.
“맹스크의 여우가 깜짝 놀라는 모습이 벌써부터 기대되는군.”
아덴버그의 방패로 오랜 세월동안 국경을 지켜온 비텐펠트 로이엔 맹스크는 분명 유능한 자였다. 잠깐의 패배는 있었을지언정 어떻게든 국경을 지켜내고, 전선을 유지해온 백전의 노장, 하지만 맹스크의 여우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이번 전쟁에서 전선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철벽같은 대비를 한다고 해도 기사와 마법사들에게는 무의미했다. 강력한 마법 한 번, 힘주어 뿌린 검광 한 번이면 벽은 무너지고 수문장은 목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맹스크의 여우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자신의 목이 떨어지고 난 후가 될 것이다.”
아무리 유능한 지휘관이라고 해도 초인들을 상대로 싸울 곳을 골라낼 수는 없었다. 전장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초인들만의 특권이었다. 그리고 적 기사단이 전선에 나타나지 않은 지금, 동부 전선에 존재하는 초인은 자신들만이 유일했다.
상급 기사 로우베인 암릿처 록슈타트가 결정한 전장은 칼스테인 요새였다.
하지만 록슈타트 단장의 생각과는 다르게 이곳 동부 전선에는 또 하나의 초인이 존재했다. 무려 그라두스 50의 순위에 랭크된 기사이자 아덴버그의 창이라 불리는 드레이크 나이트가 바로 그 초인이었다.
“슬슬 시작해볼까.”
김선혁은 저 아래 먼지구름을 피워 올리는 기사단의 이동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슬며시 레드번을 몰아 배후를 잡았다.
“아티야. 부탁해.”
‘네. 주인님.’
아티야가 허공에 떠오른 순간, 이따금씩 들려오던 레드번이 날갯짓을 하는 소리마저 사라졌다.
그 완벽한 침묵의 세계 속에서 그는 안장에 매어져 있던 용기병 전용 기형창의 고리를 풀어냈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하고는 겨드랑이에 창을 끼워 넣고 자세를 낮췄다.
“가자. 레드번.”
바람의 정령이 그 작은 속삭임마저 먹어치웠지만, 날개 달린 용의 아종은 마치 그의 말을 들은 것처럼 날개를 접고 하강하기 시작했다.
기회는 딱 한 번.
기사들이 하늘을 경계하지 않는 것은 이번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