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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하늘을 지배하는 자가 전장을 지배한다. (1)
평소대로였다면 녹테인은 동부에 입은 피해를 빠르게 복구하여 다시금 국경을 든든히 다졌을 것이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그리핀도르의 침공으로 서부가 어지러워지자, 동부로 향했어야 할 예비 병력들이 전부 서부 국경으로 급파되었다.
그 바람에 녹테인의 동부군은 지난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지 못했다. 동부 국경을 지키는 것은 정원의 절반도 제대로 채우지 못한 반쪽짜리 연대들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또다시 국경을 넘은 아덴버그군의 전격적인 공세는 동부군에게 재앙 그 자체였다.
“진격! 철저하게 적을 박멸하라!”
칼스테인 요새에서 쏟아져 나온 맹스크 보병들과 국경을 넘은 아덴버그 서부군이 동부 일대를 휩쓸었다. 그나마 동부군의 명맥을 이어왔던 잔존 부대들이 순식간에 와해되었고, 종전 이후로 고착화되었던 전선이 단숨에 밀려났다.
녹테인은 필사적으로 전력을 재정비하여 전선을 전진시키려고 했지만, 이미 시작부터 기울어 있던 힘의 균형을 다시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덴버그의 정예병들을 상대하기에는 녹테인의 동부군은 힘이 쇠락해 있었다.
그나마 아덴버그군이 점령지를 안정화시키는 것을 우선시하지 않았다면,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동부 전체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만큼 전황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아덴버그 왕국군으로부터 다시 동부를 되찾기에는 요원해 보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녹테인도 총력을 다한 게 아니었다. 왕국의 진짜 힘이라고 할 수 있는 기사단과 마법병대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녹테인은 마침내 서부뿐 아니라 동부 전선에도 기사 전력을 투입하기로 결정 내렸다.
그리핀도르의 침공에 이어 협정마저 파기하고 국경을 넘은 아덴버그의 행보를 국가의 총력을 다 해 막아내기로 천명한 것이다.
“푸른 늑대 기사단이 전선에 도착했다!”
“왕실 마법병대가 왔다!”
아주 오래도록 동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초인들이 마침내 동쪽 국경에도 나타났다.
상급 기사 둘, 선임 기사 다섯, 평기사 서른, 견습기사 서른여섯.
불과 일개 중대 규모에 불과한 기사단과 서른 명의 마법사들이 전투에 참가한 것만으로 전황이 급변했다. 느리지만 꾸준히 전선을 밀어붙이던 아덴버그 왕국군이 초인들의 참전 소식에 전진을 멈췄고, 기세가 꺾였다.
“적 기사 전력과 전투는 최대한 피하고, 전력을 보존하는 데 우선하라!”
무려 왕국의 방패라 불리던 비텐펠트 로이엔 맹스크 사령관마저도 긴장할 정도였다.
하지만 전투라는 게 한쪽이 피하고 싶어 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결국 퇴각 중이던 보병 연대가 꼬리를 잡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푸른 늑대의 깃발이 보이면 무조건 전장을 이탈하라! 칼스테인으로 복귀한다면 탈영의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
초인들의 습격으로 연달아 피해를 입은 맹스크 사령관이 급기야 무조건적인 퇴각을 명령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단과 마법병대로 인해 생기는 피해를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었으니, 아덴버그는 그 짧은 시간동안 여태까지의 교전으로 얻은 피해를 다 합친 것보다 몇 배는 큰 피해를 입고야 말았다.
왜 왕국들이 기사와 마법사를 그토록이나 애지중지 아껴온 것인지 여실히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기사와 마법사는 말 그대로 일인 군단이었다. 그 압도적이고 초월적인 무력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초인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초인뿐이었다.
그렇게 녹테인의 초인들이 전장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을 그 무렵, 김선혁이 영지에서 출발했다.
“서쪽에서 보자.”
굽이진 강줄기를 따라 블루곤이 먼저 출발했다. 아마 늦어도 일주일이면 칼스테인 요새 서쪽을 통과하는 강 어딘가에서 다시 블루곤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동안 블루곤의 복종도가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레드번의 등에 올랐다.
“백작님. 부디 조심하시기를.”
“영주님. 절대로 무리하지 마십시오.”
종자와 기병들의 배웅을 받으며 그는 짧게 인사를 남겼다.
“다녀와서 보도록 하지.”
그리고는 아리아 아이젠과 함께 칼스테인 요새를 향해 떠났다. 원래대로라면 밤낮없이 말을 달려도 며칠은 걸렸을 거리였지만 레드번을 타고 날아가니 불과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요새의 가장 높은 망루조차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잠시 선회하던 김선혁이 레드번을 천천히 하강시켰다.
“어? 어?”
성벽 위에서 평원 저 너머를 노려보던 병사는 퍼덕거리는 날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모, 몬스터다!”
김선혁이 미처 뭐라고 대처하기도 전에 댕댕댕 비상종이 울리고 성벽 위의 궁병들이 쏘아 올린 수십 발의 화살이 레드번을 향해 날아들었다.
화악.
아티야를 부를 것도 없었다. 레드번의 날갯짓 한 번에 수십 발의 화살이 힘을 잃고 고꾸라졌다.
“쏘지 마! 아군이다!”
궁병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다시 시위에 살을 재는 것을 본 김선혁이 서둘러 외쳤다. 바람 소리 날카로운 성벽 위에서도 유달리 또렷한 그의 음성에 궁병들이 순간적으로 멍한 얼굴을 해보였다.
“드라흔 백작이다! 맹스크 사령관께 드라흔이 왔다 알려라!”
다행스럽게도 그의 정체를 알아본 중대장 하나가 궁병대의 공격을 제지했고, 그는 요새의 공터에 안전하게 내려앉을 수 있었다.
“이번에도 꽤나 요란스럽게 등장하는구먼.”
까맣게 몰려들어 그를 구경하겠다고 고개를 쭉 뺀 병사들을 본 맹스크 사령관이 웃으며 그를 반겨주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드레이크가 갑자기 날개가 돋았을 리는 없고, 이번엔 또 뭔가.”
“와이번이라는 놈입니다. 레드번이라 이름을 지어주었지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을 해주니 사령관이 감탄을 토해냈다.
“처음 봤을 때까지만 해도 용기병이라고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병과로 전직한 이방인에 불과했는데, 이제는 당당한 왕국의 백작이요, 용기병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기사가 되었군 그래.”
오랜만에 만난 맹스크 사령관은 김선혁의 성장을 진심으로 대견하게 여기는 듯했다. 그 진심 어린 말투에 그도 뒤늦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탁.
그가 사령관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아리아 아이젠이 흐느적거리며 레드번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저 아가씨는 또 누군가. 오! 왕실 마법사단의 로브로군.”
사령관이 아리아 아이젠의 로브에 새겨진 문장을 알아보고 반색을 했다. 하지만 창백한 낯빛을 한 그녀는 사령관에게 인사를 건네는 대신 허리를 꺾고 토악질을 해댔다.
“우웩!”
“왕실 마법사단 소속이었지만, 이제는 저희 라인펄 영지 소속이 된 마법사 아리아 아이젠 경입니다.”
김선혁이 민망한 얼굴로 아리아 아이젠의 등을 두들겨주며 소개를 대신 해주었다.
“이놈이 어지간히 흔들려서 말입니다.”
귀한 마법사가 어디 아픈 건 아닌지 우려를 표하는 사령관에게 그가 변명처럼 한마디를 주워섬겼다.
“저, 저는 잠깐 쉴게요.”
단순 비행만으로도 완전히 지쳐버린 아리아 아이젠은 휴식이 필요해 보였고, 사령관은 기꺼이 휴식을 허락해주었다.
“자네도 혹시 휴식이 필요한가?”
“괜찮습니다.”
그간의 훈련으로 과격한 기동만 아니면 거뜬히 견딜 정도가 된 그는 사령관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사령관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그를 지휘소로 안내했다.
“그럼 바로 가도록 하지. 전황이 썩 좋지만은 않거든.”
**
개전 직후 얻었던 점령지의 태반을 상실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은 아군의 상황은 생각 이상으로 좋지 않았다.
“최대한 전투를 피하고는 있지만, 이제는 여기서 더 물러나면 칼스테인 요새까지 적에게 내어주어야 할 판이네.”
“그 정도입니까?”
“기사들이 괜히 왕국 전력의 총화(總和)라 불리는 게 아닐세. 그들은 가히 단신으로 잘 훈련된 보병 중대 하나를 상대할 정도의 강자라네. 그런 초인들이 하나둘도 아니고 무려 수십이나 이곳에 몰려들었어. 전황이 좋은 게 도리어 이상한 게지.”
태산처럼 굳건하던 맹스크 사령관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정도의 존재들, 녹테인의 초인들이 가장 큰 문제였다.
“우리 쪽에서는 왜 아직도 기사들을 투입하지 않는 겁니까.”
이미 여러 차례의 결투를 통해 김선혁은 진짜 기사들의 힘을 겪어보았다. 그렇기에 그는 초인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초인밖에 없다는 사실을 요새 내의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직까지 전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아덴버그의 기사들에 대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중앙 기사단의 기사들과 왕실 마법사단의 마법사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네. 아마 늦어도 일주일이면 전선에 도착할 걸세.”
“늦군요. 조금 일찍 출발시켰다면 피해를 많이 줄일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리핀도르를 끌어들이고 전쟁을 주도한 것이 아덴버그 왕국이니만큼 다소 늦은 기사 전력의 투입이 아쉬웠다. 하지만 맹스크 사령관은 처음부터 기사 전력을 움직였다면, 녹테인이 바로 눈치를 챘을 거라며 이 또한 감수해야 할 과제라 말했다.
“일단 자네도 중앙 기사단이 오거들랑 그들과 합류하여 움직이게. 혁혁한 전공을 세운 자네의 실력이야 의심할 나위가 없지만, 자네가 상대해야 할 적은 하나가 아니니까.”
하나도 아니고 수십 단위로 뭉쳐 있는 기사들을 상대하는 것은 비슷한 수의 기사들뿐이었다. 아무리 지난 전쟁에서 눈부신 성장을 이룩한 그라고 해서 그들을 홀로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때까지 기다리기에는 아군의 피해가 너무 클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앙 기사단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대신, 먼저 움직이는 것을 선택했다.
“제가 시간을 벌어보도록 하죠.”
“전선의 모든 기병들을 끌어모아도 적 기사단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아무리 자네라고 해도 저렇게 한데 뭉친 적들을 상대로는 살아 돌아오기 힘들 걸세.”
사령관은 그를 만류했다.
“기병들은 필요 없습니다. 이번에는 혼자 움직일 생각입니다.”
애초에 홀로 움직이기로 작정했기에 아샤 트레일이라는 믿음직한 우군마저 영지에 남기고 온 그였다.
“위험할 텐데. 혹시 따로 생각이 있는 겐가?”
단호한 그의 태도에 사령관이 기대하는 얼굴로 물었다.
“혹시 이런 말 못 들어보셨습니까?”
김선혁은 그런 사령관의 기대에 호응이라도 하듯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하늘을 지배하는 자가 전쟁을 지배한다는 말,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전장에서 뼈가 굵은 맹스크 사령관도 단번에 그의 말을 알아듣기에는 무리였던 모양이다.
하기야, 땅 위에 발붙인 채 싸우는 게 미덕인 이곳 세상에 현대적 공중전의 개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있다고 한들 그걸 실행에 옮기는 건 또 별개의 문제였다. 와이번과 같은 비행형 몬스터를 길들인 그가 아니고서는 시도조차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김선혁은 회의 테이블에 올려진 지도를 고정해두었던 무게추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적 기사단일거라 짐작되는 말 위에서 손바닥을 펼쳤다.
콰직.
내던진 것도 아니고 그저 살포시 손을 풀었을 뿐임에도 무게추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지도 위의 말들을 박살냈다.
“저는 적들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서 폭격을 할 생각입니다.”
마침 그에게는 꽤나 쓸 만한 폭탄이 있었다. 아리아 아이젠, 쓰기에 따라서는 저쪽 세상의 그 어떤 폭탄보다 효과가 좋을 폭탄이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제가 적 기사단을 저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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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에라도 적 기사단을 향해 날아갈 것처럼 호언장담한 김선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바로 전장으로 향할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했던 폭격의 가장 중요한 요소, 아리아 아이젠이 꼬박 하루에 걸친 비행 끝에 완전히 뻗어 일어날 생각을 안 했던 것이다.
결국 기다리던 그는 아리아 아이젠을 요새에 남겨두고는 홀로 레드번 위에 올랐다.
레드번의 장점은 비단 높은 고도에서 적들을 폭격할 수 있다는 점뿐만이 아니었다. 레드번은 이곳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폭격기이자 강습 전투기였으며, 정찰기이기도 했다.
“어디 적 기사단이라는 놈들, 얼굴이나 구경해볼까.”
그리고 지금은 정찰기로서 임무를 수행해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