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111화 (11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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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처녀비행

“일단 왕실 마법사단 쪽으로 신호를 보냈어요. 식별이 끝나면 저쪽에서 채널을 개방할 거예요.”

어지간한 마법사라면 짧은 전문 하나를 보내는 게 고작이었을 연락석이 아리아 아이젠의 손을 거치자 장거리 통신 마법의 매개체가 되었다. 과연 왕실 마법사단에서도 촉망받던 마법사다운 능력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능력에 마냥 감탄만 하기에는 사안이 지나치게 중대했다. 김선혁은 다소 초조한 얼굴로 통신이 연결되기를 기다렸다.

“연결 됐어요.”

뭐가 달라진 건지, 전혀 차이점이 보이지 않았다. 연락석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였다. 그래도 그는 그녀의 말을 믿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오필리아 라우렐 로 아데스덴 왕녀께 백작 드라흔이 인사를….”

[인사는 생략하도록 하지.]

왕녀를 지목해 연락을 넣었으니, 당연히 왕녀가 응답을 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연락석을 통해 들려온 음성은 굵직한 남자의 음성이었다. 단지 목소리만 들었을 뿐임에도 주변의 공기가 달라지는 듯한 압도적인 카리스마, 김선혁은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리고는 황급히 인사했다.

“테오도르 티베리우스 로 아데스덴 폐하께 인사를….”

[그쪽 마법사가 실력이 있다고 듣긴 했지만,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은 아닐 터, 그러니 백작은 지체 말고 용건을 말하라.]

여전히 실리를 중요시하는 테오도르 국왕의 말에 그는 잠시 마음을 다스리고는 전쟁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이번 전쟁에 기꺼이 참가하겠습니다.”

결국 이러나저러나 전화(戰火)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주체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게 나았다. 그런 그의 결정에 테오도르 국왕은 진심으로 기쁜 듯 기꺼운 음성으로 격려를 해주었다.

[좋구나. 좋아. 또 한 번 드레이크 나이트의 위명이 왕국에 진동하겠구나. 그래. 좋아.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그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말을 정리했다.

“독립적인 작전권을 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그러려던 참이다. 일일이 명령을 내려서야 드레이크 나이트의 기동력을 살릴 수 없을 테니까. 또 다른 건?]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이번에는 테오도르 국왕도 바로 승낙을 해주는 대신 이유를 물었다.

“잠시 준비할 것이 있습니다.”

김선혁은 간략하게나마 자신의 상황을 말해주었고, 국왕은 기꺼이 허락해주었다.

[어쩌면 이번 전쟁이 끝이 났을 때, 드레이크 나이트라는 이름도 옛 말이 될지도 모르겠군. 내 기대하고 있겠다. 그대가 받을 새로운 이름이 무엇인지 학수고대하고 있겠노라.]

그 뒤로 그는 몇 가지 사항을 더 요청하고 테오도르 국왕은 대부분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국왕과의 살 떨리는 통신이 끝이 났다.

“수고하셨소. 아이젠 경.”

아리아 아이젠은 잠깐 사이에 꽤나 피로가 쌓인 모습이었다. 감히 국왕과의 통신을 중간에 차단하지 못해 억지로 버틴 기색이 역력했다. 과연 세상사에 무신경한 마법사도 테오도르 국왕이 무섭긴 무서웠던 모양이다.

“들었다시피 나는 이번 전쟁에 참가할 생각이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영주를 믿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워낙에 전쟁이 빈번한 서부인지라 큰 걱정이 없는 것인지 수뇌부들 중 그의 결정을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이번 전쟁은 트레일 경과 아이젠 경만을 대동하겠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이어진 그의 말에는 모두가 반대를 표했다.

“종자가 주인을 모시지 않고 혼자 남다니요. 절대 안 될 말씀입니다.”

“저희도 따라가겠습니다!”

줄리앙이 대번에 인상을 찡그리며 대들었고, 클라크 역시 흥분하여 외쳤다.

“다른 놈들은 믿을 수 없습니다! 저희가 함께 하겠습니다!”

다른 기병들은 믿을 수 없다는 클라크를 보며 김선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에는 나는 기병들과 함께 움직이지 않아.”

이제껏 기병들과 함께 싸워왔던 그가 기병대와 움직일 생각이 없다 말하니, 다른 이들은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가 없는 얼굴이 되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골드레이크 역시 영지에 남겨둘 생각이다.”

남기고 가는 것이 어린 종자와 기병들뿐이 아니라는 사실에 클라크는 영주의 단독 참전에 거듭 우려를 표했다.

“나는 이번에 레드번, 그리고 블루곤과 함께 움직일 생각이다.”

**

빼애애애애애액!

레드번이 죽어라고 비명을 질러대며 몸을 틀려 했지만, 아바이터는 괴수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치명적인 독을 품은 꼬리가 몇 번이나 아바이터를 찔러댔지만, 애초에 흙으로 만들어진 거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좀만 참자. 지금 아프고 나중에 안 아픈 게 낫잖아.”

김선혁은 이리저리 몸을 틀어대는 레드번을 따라다니며 재주껏 약을 발라주었다.

빼애애애액!

액체가 떨어질 때마다 레드번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러댔다. 하기야, 의식을 잃고 있던 와중에도 정신을 번쩍 차릴 정도로 통증이 끔찍한 아리아 아이젠의 특제 치료제였다. 맨정신으로 온몸에 약을 뒤집어쓴 고통은 이루 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끔찍하리라.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

김선혁은 부러진 날개와 찢겨진 피막 사이로 하얗게 일어나는 거품을 보며 조금은 미안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상태 창을 통해 엿본 레드번의 상태가 영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 고통, 공포.

얼마나 통증이 심했으면 저 흉폭한 괴수가 두려움마저 느낄까. 하지만 레드번의 고통은 이제 시작이었다.

“조금만 더 참아.”

김선혁은 어떻게든 레드번을 회복시켜 전장으로 끌고 갈 생각이었다.

복종도가 낮은 아룡과 장시간 떨어져 있을 경우 일어나는 폐단은 이미 겪은 바가 있었다. 블루곤과 레드번을 영지에 따로 남겨두는 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두고 전장으로 향하는 것과도 같았다.

게다가 굳이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그는 레드번과 블루곤을 데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초인들의 참전이 확실시 된 이번 전쟁에서 골드레이크의 맷집과 돌진력은 절대적이지 않았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골드레이크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서부에 배치된 녹테인의 기사전력 중 상당수가 기를 쓰고 들러붙을 것이다. 그리고 골드레이크는 그들의 집중 공격을 버티지 못해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말리라. 당연하게도 기수인 그도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위험을 알면서도 굳이 그런 상황을 자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는 블루곤과 레드번을 활용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빨리 나아라.”

하지만 그것도 레드번이 전부 회복되고 난 뒤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약간(?)의 부작용이 있을지언정 레드번의 부상을 회복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 결과 한 달이 다 가도록 지지부진 낫지 않던 레드번이 마침내 날개를 활짝 펼 수 있게 되었다.

빼애애액!

당장에라도 날아오를 것처럼 날개를 퍼덕이는 레드번의 모습이 처음 보았던 그날처럼 위풍당당했다. 그는 미리 제작하여 준비해두었던 레드번 전용 안장을 장착시키고는 조심스럽게 레드번의 등 위에 올랐다.

“음.”

골드레이크에 올라탔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긴장감, 그는 애써 긴장을 풀며 안장의 손잡이를 잡았다.

“가자.”

그의 명령에 기다렸다는 듯이 레드번이 날갯짓을 했다. 육중한 몸이 둥실 떠오른다싶더니, 금세 바닥이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어, 어.”

과격한 날갯짓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몸을 지탱하느라 김선혁은 필사적이었다. 벌써 수십 미터 상공으로 날아오른 레드번 위에서 떨어지기라도 했다가는 용기병장이고 나발이고 몸이 묵사발이 될 판국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레드번의 과격한 움직임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어느 정도 높이로 날아올랐다 싶은 순간, 상하 좌우로 마구 흔들리던 레드번의 몸이 안정된 것이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만약 그 끔찍한 진동이 더 지속되었다면 그는 레드번을 타고 전장으로 향할 생각 자체를 버려야 했을 것이다. 그만큼 레드번의 비상은 우악스럽고 과격했다.

삐이이이이익!

레드번이 기분 좋은 울음을 토해내고는 천천히 허공을 선회했다. 마치 창공을 유영하듯 부드러운 움직임에 그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감탄을 토해냈다.

“크으. 끝내준다!”

까마득히 낮은 곳에 위치한 영지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으로 한눈에 담은 영지의 모습에 감탄을 토하는 사이 레드번이 서서히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바로 아래 있던 영지가 순식간에 밀려난다 싶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세상이 빠르게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혈통 좋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과부 제조기를 탔을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속도감,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레드번의 속도는 계속해서 빨라졌고, 도통 멈출 줄을 몰랐다.

“어?”

처음에는 신이 나서 환호를 해대던 김선혁도 그쯤 되자 슬슬 표정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자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머, 멈춰!”

하지만 바람 소리에 닿지 않은 것인지, 그도 아니면 복종도가 낮은 탓에 일부러 무시한 것인지 레드번은 끝도 없이 속도를 올려댔다.

“아티야!”

땅에 발붙이고 있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바람이 얼굴을 때려댔다. 눈조차 뜨기 힘든 그 끔찍한 환경 속에서 그는 아티야를 불러 겨우 시야를 복구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시야뿐만이 아니었다. 레드번이 매처럼 땅을 향해 빠르게 하강하는 순간, 온몸의 장기가 붕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공중에서 자유롭게 방향을 트는 레드번, 방향이 바뀔 때마다 오장육부가 재배치되는 듯한 끔찍한 기분에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으아아아아아!”

한참동안 끊이지 않던 비명도 조금씩 잦아들어가기 시작했다. 김선혁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지쳐버렸다.

할 수만 있다면 이 과격한 아룡 위에서 몸을 던지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랬다가는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끔찍한 죽을 맞이할 게 뻔했던지라 그는 필사적으로 레드번의 등에 매달렸다.

“사, 살려줘….”

그는 레드번에게 애원을 했다. 하지만 레드번의 비행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계속되었고, 그는 그야말로 지옥을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끔찍한 시간이 끝이 나고 김선혁은 영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반죽이 흘러내리듯 흐물거리며 레드번의 등에서 떨어져 내렸다.

“백작님!”

“영주님!”

깜짝 놀란 줄리앙과 사내들이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우욱!”

김선혁은 그들의 부축을 받으며 벌컥 허리를 접었다. 그리고는 뱃속의 내용물을 모조리 꺼내 확인해야 했다.

“잠깐 쉬게 둬.”

자꾸만 몸을 일으키려 하니, 죽을 맛이라 그가 뒤늦게 부축을 뿌리치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완전히 초주검이 되어버린 영주를 보며 사람들이 얼빠진 얼굴을 해 보였다.

“하.”

잠시 시간이 흘러 겨우 뒤집힌 속을 진정시키고 정신을 차린 김선혁이 몸을 반쯤 일으켰다.

“끝내주는구만.”

짧은 한마디에 담긴 감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그렇게 김선혁의 첫 비행은 끝이 났다.

**

그 뒤로 김선혁은 포기하지 않고 레드번과의 비행을 시도했다. 그는 조금씩 창공에서 시간을 보내는 데 적응해갔고, 서부군이 녹테인의 국경을 넘어 진격을 시작했을 즈음에는 어느 정도 비행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 불굴의 의지로 와이번(레드번)의 과격한 비행에 적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드래곤 라이딩 스킬의 등급이 성장했습니다.

- 드래곤 라이딩(중급) 스킬이 드래곤 라이딩(상급) 스킬이 되었습니다.

“하. 일찍도 오른다.”

다른 이방인들은 스킬이 오르고 숙련도가 늘어나는 식인데, 유독 자신만큼은 몸이 먼저 익히고 그 다음에 스킬이 생겨나는 식이었다. 그 뒤바뀌어버린 선후 관계가 영 못마땅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자격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거의 우격다짐으로 스킬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반복 훈련이 최고였다.

그 스스로 자초한 일이기에 그는 불평하는 대신 더욱 더 훈련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마침내 레드번의 과격한 기동에 익숙해졌다 여기게 되었을 때, 아샤 트레일과 아리아 아이젠을 불렀다.

“욱!”

그 어느 때고 꼿꼿함을 잃지 않았던 아샤 트레일은 짧은 비행만으로도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었다.

“저는 차라리 제 말을 타고 이동하겠습니다.”

한참을 토악질을 해대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는 다시는 레드번의 위에 타지 않을 것이라 단호하게 선언했다.

그녀는 비단 육신의 괴로움뿐 아니라 하늘을 난다는 것에 강렬한 거부감을 표했다. 온전하게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없기에 기마 전투마저 거북해 하는 기사다운 태도였다.

“끙.”

세상이 두 쪽 나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단호함에 그도 더 이상의 비행을 권할 수는 없었다.

아리아 아이젠의 경우에는 반대였다. 강인한 기사마저도 초주검이 되는 레드번의 비행을 견뎌내기에는 마법사의 육신은 지나치게 연약했다. 하지만 그녀는 기꺼이 그 고통을 감내했고, 레드번을 타고 하늘을 나는 것을 학수고대하기까지 했다.

“아무도 안 믿을 거예요! 무수히 많은 마법사들이 비행 마법을 시도했지만, 모조리 실패했어요. 전 대륙의 마법사들 중에 하늘을 나는 데 성공한 건 저밖에 없을 거라고요!”

흥분하면 말이 많아지는 성격답게 그녀는 하늘 위에서도 입을 놀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레드번이 조금이라도 과격하게 기동을 할라치면, 기절해버리는 저주스러운 마법사의 체질이 문제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레드번에 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무수히 많은 시도 끝에 처음보다는 비행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급격한 선회 기동이나 하강이 아닌 이상 그녀는 비교적 또렷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트레일 경을 남겨 영지를 지키도록 하고, 나는 아이젠 경과 함께 칼스테인으로 향하겠다.”

결국 그는 아샤 트레일도 남겨두고 오직 아리아 아이젠만을 대동한 채, 전장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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