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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110화 (11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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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격변하는 정국

후유증이 치료되었다지만 아리아 아이젠의 상태는 여전히 좋아 보이지 않았다. 금빛 머리는 어느새 노파의 백발이 되었고, 앳되던 얼굴이 순식간에 10년은 늙은 듯 보였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잃어버린 젊음에 대한 상실감으로 한참이나 실의에 빠져 있었겠지만, 과연 실험에 미친 마법사는 달랐다.

그녀의 눈빛은 곧 시작할 실험에 대한 기대로 반짝거릴 뿐, 조금의 절망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아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그녀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흔한 일인걸요.”

황당하게도 그녀는 마법사들 사이에 실험의 부작용으로 겉늙어버리거나 신체의 일부를 못 쓰게 되는 경우는 드문 일이 아니라 말했다. 진즉에 정상이 아닌 줄은 아니었지만, 마법사들이 전부 미치광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바로 시작하죠.”

아리아 아이젠의 말에 김선혁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얼굴로 정령을 소환했다.

‘주인님!’

땅속에서 솟아난 정령 셋이 그의 속도 모르고 주인을 반겨주었다. 이렇게 당사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보니 한층 더 비슷한 모습이라 그는 미리 준비한 변명을 떠올리며 아리아 아이젠을 바라보았다.

“호오. 아바이터랑 상당히 비슷하네요. 아니, 아바이터의 개념 자체가 인위적 자연력의 발현이니, 이상할 것도 없나.”

“음?”

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자신을 쏙 빼닮은 정령들을 보고도 그녀는 차분하게 실험을 위해 데이터를 맞춰보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아직 눈치채지 못한 건가 싶어서 잠시 시간을 두고 그녀를 지켜보았지만, 여전히 그녀는 그 어떤 낌새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과연 제 예상이 맞았어요. 땅의 정령이라 그런지 아바이터의 상성과 굉장히 잘 맞는 기운이에요. 실험의 안정성을 위해 중급 정령보다는 하급 정령이 적당하겠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음?”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녀의 질문에 제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당장 실험을 시작하고 싶어 몸이 달은 그녀를 보다가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보다 뭐, 이상한 거 없소?”

“뭐가요?”

역시나 눈치채지 못한 건가. 그녀의 반문에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그녀가 뒤늦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정령들이 낯익군요. 저를 많이 닮았어요.”

그녀의 반응은 그게 다였다.

“흠. 어디 보자. 일단 코어부터 열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제 할 일에 몰두하는 아리아 아이젠을 보며 김선혁은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이 마법사, 둔해도 정말 둔하다.

마법과 연관된 일이 아니면 신경 자체를 안 쓰는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다시 한 번 마법사의 무신경함을 실감한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정령들에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재미있겠다!’

‘제가 할래요!’

대뜸 정령들이 자신이 하겠다며 난리를 쳤다.

‘이것만 있으면 지루하게 소환만 기다릴 필요도 없겠다!’

‘얏호!’

정령들이 냅다 소리를 지르며 아바이터를 향해 뛰어갔다. 그런데 근처에 도달한 정령들이 빨려들 듯 아바이터 속으로 사라지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그가 아리아 아이젠을 바라보니, 그녀 역시 돌발적인 상황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실험은 이미 시작됐어요.”

그녀는 진즉부터 아바이터의 코어를 개방해 정령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놓았었다며,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그럼?”

“정령 셋 다 아바이터와 동기화가 된 거죠.”

뭔가 대단한 실험이라도 할 것처럼 굴더니, 실험은 너무도 순식간에 끝이 나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 계약을 맺었던 세 정령이 모두 의도치 않게 아바이터와 동기화가 된 그는 황당함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가 그렇게 돌발적인 상황에 망연자실해 있는 동안에도 정령들은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오우! 주인님! 여기 엄청 포근해요!’

‘이거 뭐야. 엄청 좋은데? 막 힘이 넘쳐!’

정령들이 뭐를 어떻게 한 것인지, 형체 밋밋하던 아바이터의 몸뚱이가 꾸물거리며 변화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 모든 변화가 끝이 났을 때, 아바이터는 신장 3미터에 달하는 거인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아리아 아이젠을 꼭 닮은 거인 말이다.

**

아바이터의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무려 셋씩이나 되는 정령과 동기화가 된 아바이터는 기존보다 몇 배는 힘이 강해졌고, 움직임 또한 자연스러워졌다. 장정 스물이 달려들어도 옮기지 못할 거대한 바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 올리는 힘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오오!”

커다란 돌을 들고 거들먹거리는 거대 마법사의 모습은 지독할 정도로 부조화스러웠지만, 사람들은 그 엄청난 힘에 순수하게 환호했다. 웃지 못한 것은 오직 김선혁뿐이었다.

“생각했던 것 이상이에요!”

그는 실험의 성공에 잔뜩 신이 난 아리아 아이젠과 아바이터를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뭐라고 했소?”

“한 번 동기화가 된 이상, 아바이터를 파괴하지 않는 이상 정령을 다시 분리할 수는 없어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무려 셋이나 되는 정령이 아바이터와 영구적으로 동기화가 되었다. 게다가 그중에는 중급 정령 나시타까지 있었다.

황당한 상황에 아리아 아이젠을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조금도 미안한 얼굴이 아니었다. 도리어 실험의 성공에 도취되어 다음에는 더 많은 정령들을 아바이터와 동기화 시켜보겠다며 의욕에 불타는 모습이었다.

“내 정령….”

얄밉게 지껄여대는 마법사를 쫓아낸 김선혁은 마치 눈탱이라도 맞은 것 같은 얼굴로 실의에 빠지고 말았다. 하기야 눈 빤히 뜨고 정령을 셋씩이나 잃었으니, 상실감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도 당연했다.

그가 실의에 빠져 있건 아니건 간에 아바이터로 인해 영지의 대규모 토목사업이 탄력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아바이터의 힘은 비단 강력한 근력과 지칠 줄 모르는 체력뿐만이 아니었다. 아바이터는 때때로 정령의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아바이터는 단순한 일꾼이 아니었고, 차라리 실체화한 정령에 가까웠다.

“앞으로 저는 아바이터의 제작과 개량에만 전념하겠어요.”

아바이터로 톡톡히 재미를 본 탓인지 아리아 아이젠은 아예 아바이터 제작자의 길을 걷기로 선언했고, 이제는 실전되어버린 골렘을 재현해보이겠다며 호언장담했다.

**

그렇게 라인펄 영지가 개량형 아바이터로 인해 발전을 거듭하는 사이에도 녹테인과 그리핀도르의 전쟁은 계속해서 심화되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이러다가 진짜 큰 전쟁이 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들려오는 소문들이 흉흉했다.

그런 상황에서 녹테인과 인접한 아덴버그의 서부 일대를 수호하는 서부군에 밀명이 떨어졌다.

“녹테인이 그리핀도르와 전면전에 들어가는 즉시, 서부군은 국경을 넘어 칼스테인 요새 인근을 점령하라.”

현재 직접적으로 서부군의 지휘에 참가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김선혁은 아직 서부군 소속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역시 왕실의 밀명을 접할 수 있었다.

끝난 줄 알았던 전쟁이 사실은 더 큰 전쟁을 위한 포석에 불과했음을 깨달은 김선혁은 욕설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아데스덴 왕실은 이번 기회에 숙적 녹테인을 아예 뿌리까지 거덜 낼 생각인 모양이었다.

하기야 이미 칼스테인 요새를 점령하며 교두보를 마련했고, 그 일대의 주둔군들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녹테인을 괴롭히기에는 좋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반대편에서 그리핀도르의 정예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국경을 어지럽히고 있는 통에 전력 자체도 상당히 분산된 상태였다.

만약 아덴버그가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 있다면 지금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다.

“왜 맨날 서분데! 북부도 있고 동부도 있잖아!”

다만 불만이 있다면 겨우 안정을 되찾은 아덴버그의 서부 일대가 또 한 번 전쟁에 휩쓸리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왕실에서 이번에는 백작님께서 전쟁에 참가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양심이 있으면, 그래야지. 내가 3년간 전쟁에 나간 것만 세 번이다. 아주 내가 지금도 비 오는 날이면 뼈가 시리고 몸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다고.”

물론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강인한 신체를 지닌 용기병장이 정말로 궂은 날마다 관절통을 겪을 일은 없었다. 그저 그만큼 전쟁이 지긋지긋하다는 이야기였다.

줄리앙은 그라두스 50에 랭크된 초인의 엄살에 황당하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그래서 정말로 참가 안 하실 겁니까?”

김선혁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실이 이번에도 제대로 된 미끼를 던졌던 탓이었다.

아데스덴 왕실은 아룡들로 인해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그의 사정을 어떻게 알았는지, 전쟁에 참가하기만 해도 막대한 포상을 할 것을 약속했다.

“끙. 진짜 나 또 낚이는 건가.”

영지는 아직까지 낙후되어 있었고, 광산의 채굴 사업은 장기적으로 보아야 할 과제였다. 단숨에 이득을 보기 위해 많은 양을 시장에 풀었다간 시세가 폭락할 게 뻔했던지라, 한 달에 벌어들이는 돈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영지들은 풍족한 재정 상태를 유지하기 충분한 소득이었지만, 문제가 있었다면 식충이 같은 용의 아종들이 무려 셋이나 딸려있다는 게 문제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룡들은 미친 듯이 영지의 소와 돼지를 먹어치우고 있었고, 이제는 인근 영지에서 소와 돼지를 구해오는 것도 한계였다. 지나친 소모에 주변의 영주들이 소와 돼지 값을 비싸게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왕실에서는 시세에 상관없이 정해진 값으로 철과 은을 매입하겠다며 영주님의 의견을 물어왔습니다. 이 거래는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대가가 내 참전인데도 말이오?”

김선혁의 질문에 안토인 몽테뉴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영지의 재정을 생각해서라지만, 듣기에 따라 영주를 전쟁터에 팔아먹고 영지의 안정을 도모하겠다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었던 탓이다.

“끙.”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시지요. 어차피 왕실에서도 기한을 두고 답을 달라 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빨리 결정할수록 이득인 것도 사실이지. 왕실은 간을 보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테니까.”

당장 큰 포상을 약속했지만, 막상 전쟁이 시작되면 말이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전황이 유리해져서 참전했다는 시선이 덧씌워지면 뒤끝이 그다지 좋지 않을 게 분명했다.

결국 그는 당장 결정을 보류하되 최대한 빨리 가부를 결정하기로 마음을 먹고 영지의 수뇌부들을 돌려보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결정의 시간은 빨리 찾아왔다.

“녹테인이 기사 전력을 투입했습니다. 그리핀도르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기사단과 정예들을 추가로 전선에 파병했다는 소식입니다.”

칼스테인 요새에서 보내온 소식에 김선혁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왕실은?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왕실의 의지는 변함이 없는가?”

기사단까지 투입한 녹테인이 동부와 서부의 국경을 가릴 리가 없었다. 그 말은 전쟁에 참가할 경우 언제든 적 기사와 맞부딪쳐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이었다.

“폐하의 뜻은 확고합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도 아데스덴 왕실은 전쟁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간 그렇게 전면전을 피해왔던 왕실이 작정하고 칼을 뽑아 든 것이다.

“전력이 비등한 상황이라면 손실을 우려하여 참전시키지 않겠지만, 지금이라면 아군이 상대해야 할 적 기사단은 그리핀도르를 상대하느라 절반이 차출된 반쪽 기사단이 될 겁니다.”

아샤 트레일의 말에 김선혁은 침음을 내뱉었다. 결국 왕실은 전쟁에서 소모될 기사 전력보다 전쟁을 통해 얻을 이득이 훨씬 더 크다 판단을 내린 모양이다.

“끙. 왕실은 처음부터 협상 결과에 상관없이 칼스테인 요새를 반환할 생각이 없었던 거군.”

마치 처음부터 준비한 듯 맞아떨어지는 상황에 그는 이번 전쟁이 한참 전부터 결정이 났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모두가 그를 바라보며 영주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녹테인이 총력을 다할 수밖에 없게 된 이상, 이제까지와의 전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될 거예요.”

기사들이 살인적인 검광을 뿌려대고, 마법사들이 막강한 마법을 난사하는 전장, 그 안에서 그는 더 이상 절대 강자가 아니었다.

“백작께서 전쟁에 참가하지 않더라도 전쟁은 이미 기정사실화 된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장담컨대 전면전이 벌어지면 녹테인은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기사들을 투입할 거고, 라인펄 영지 역시 그 목표가 될 겁니다. 드레이크 나이트는 녹테인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치욕을 안겨준 장본인이니까요.”

아샤 트레일의 말이 결정적이었다.

“백작께서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간에 방관자가 될 수는 없을 겁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찾아오는 암살자들로 영지가 쑥대밭이 되느니, 차라리 전쟁에 참가하는 게 나았다.

그는 결국 결정을 내렸고, 아리아 아이젠을 호출했다.

“왕녀께 드릴 말씀이 있소.”

만약을 대비한 연락석이라면 진즉에 구비해두었다. 신비롭게 빛나는 보석을 받아든 아리아 아이젠이 곧장 장거리 통신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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