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109화 (109/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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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정령 러쉬 (3)

아티야가 쏙 빼닮았던 안유정과 아샤 트레일 같은 경우에는 본인 스스로도 그녀들에게 상당한 매력을 느꼈었다. 그건 분명 사실이었다. 왕녀 역시 이성적으로 매력을 느낀 것은 아니었지만, 앙증맞은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근엄한 행동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여겼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정령들이 그들을 닮았을 때는 황당하기는 했을지언정 납득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김선혁은 정말로 억울했다.

“왜 아이젠 경이….”

그는 맹세코 아리아 아이젠을 매력적이라 여긴 적이 없었다. 하루 종일 연구실에 틀어박혀 온갖 알 수 없는 오물들로 옷자락을 더럽히고 떡진 머리를 한 채 돌아다니는 나사 풀린 마법사가 뭐가 좋다고 매력을 느끼겠는가.

그런데 왜 정령들이 그녀를 빼다 박은 듯 닮았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머리를 싸잡고는 정령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흙으로 빗은 로브를 걸친 정령들은 처음 보았을 때처럼 죄다 짜리몽땅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땅의 속성이라는 게 원래 그런 것인지, 투명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다른 정령들과는 땅의 정령들은 달리 흙을 잔뜩 묻힌 듯 꼬질꼬질해 보였다. 그것마저도 아리아 아이젠을 쏙 빼닮아 있었던지라 그로서는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대체….”

멍한 듯 초점 없는 눈동자로 게슴츠레 눈을 치뜬 정령들을 보며 그는 몇 번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님.’

‘왜 이제야 불러주셨나요.’

‘더 자주 자주 불러주세요!’

당장 아리아 아이젠이 에너지 드레인의 후유증을 털어내고 일어나게 되면 아바이터를 개량하자며 달라붙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가서 그녀가 자신을 쏙 빼닮은 정령들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가슴이 갑갑해지는 것 같았다.

‘저희 바로 돌려보낼 거 아니죠?’

그런 그의 속도 모르고 정령들이 바보처럼 해실거리며 웃으며 아양을 떨어댔다.

**

흙장난이라도 치듯 작은 집을 지어 올리고 그걸 또 허물어대며 깔깔대는 난쟁이들의 모습은 꽤나 평화롭고 보기 좋은 광경이었지만, 김선혁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설마 욕구 불만인가.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다 싶으면 정령으로 복제해버리는 자신의 정신상태가 두려웠다.

“연애라도 하면 좀 나아지려나….”

이러다가는 언제고 여자를 만나는 것조차 꺼리게 되는 상황이 오게 될까봐 걱정마저 들 지경이었으니,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그래서 말인데….’

‘진짜? 진짜?’

저들끼리 나누는 대화조차 머릿속으로 여지없이 쏘아버리는 정령들 탓에 한층 더 머리가 아파왔다.

“이제 좀 돌아가.”

결국 그는 더 참지 못하고 정령들의 소환을 전부 해제했다.

“아, 맞다. 그리고 누다르 말인데….”

정령들을 돌려보내기 직전 김선혁은 누다르에 대해 물었다. 조잘조잘 잘도 떠들어대던 정령들은 누다르의 이름이 나오자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어지간히도 최상급 정령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알았어. 그냥 돌아가.”

입을 꾹 다문 정령들을 바라보던 그는 결국 다 포기하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한참이나 흙장난을 치며 놀아대던 정령들이 사라지자 세상이 다 조용해진 듯했다. 그는 그 적막한 침실에 앉아 가만히 아티야를 불러냈다.

“주인님.”

실체화하여 또렷한 모습을 한 아티야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안겨들었다.

“음.”

방금 전까지 자신의 이해 못할 정신세계에 대해 심오한 고찰을 하고 있었던 그는 아샤 트레일을 닮은 그녀의 얼굴에 더욱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 왠지 아샤 트레일을 욕 보이는 듯한 기분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정령의 변화는 그로서는 통제할 수 없는 불가해한 영역이었기에 그는 이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았다.

“혹시 최상급 정령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

땅의 정령들은 누다르를 두려워 해 말해주지 않았지만, 아티야라면 대답을 해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맞아 떨어졌다.

“최상급 정령은 아예 우리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예요. 그들은 원한다면 언제고 세상에 현신하여 영향력을 끼칠 수 있고, 거기에 계약자는 필요하지 않아요. 그렇기에 그들은 계약자에게 살갑지 않고, 그렇다고 맹목적이지도 않아요. 그들은 대체적으로 거만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성격이죠.”

중급이 된 뒤로 부쩍 의사표현이 자연스러워진 아티야는 조곤조곤 자신이 아는 바를 알려주었다.

“그런 놈이 왜 소환 의식까지 찾아와서 행패를 부렸을까.”

누다르가 한 행동은 분명한 행패였다. 그 콧대 높은 정령만 아니었다면 지금쯤이면 몇 배는 많은 땅의 정령들과 계약을 맺는 데 성공했을 텐데, 누다르가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 그리고 본인은 불러도 오지 않을 가계약만 맺고는 사라졌다. 그가 누다르에 대한 감정이 좋을 턱이 없었다.

“주인님은 아직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시는군요.”

품 안에 폭 파고든 아티야가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그 뜬금없는 말보다 그 무방비하고 맹목적인 얼굴에 정신이 팔린 그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아무래도 오늘 너무 많은 생각을 한 탓인지 잡념이 아직까지 남은 모양이었다.

“저희 정령들이 바라보는 이 세상은 결코 또렷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 흐릿한 세상에서 주인님은 유독 선명하고 빛이 나는 분이랍니다. 아무리 최상급 정령이라고 해도 주인님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을 거예요.”

그녀는 정령 친화력이 뛰어난 정령사일수록 정령이 보기에 색이 선명하고 밝은 빛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보아왔던 그 어떤 정령사보다 존재감이 선명한 존재라며 자랑스러워 했다.

“가계약은 일종의 관심 표현이에요. 세상사에 관심이 없는 최상급 정령이 주인님께 흥미를 갖고 앞으로 지켜보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이 없어요.”

“별로 반갑지 않은데. 그거 완전 관음증이잖아.”

부른다고 오지도 않을 정령이 숨어서 자신을 지켜볼 거라 공언을 했으니, 그로서는 꺼림칙할 뿐이었다.

“좋게 생각해요. 그만큼 주인님이 매력적이라는 말이기도 하니까.”

꽤나 듣기 좋은 아티야의 말을 들으며 그는 새삼 처음에는 단편적인 말밖에 하지 못하던 정령이 많이도 성장했구나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결 좋은 머릿결을 만져주고 말았다.

아티야는 눈을 감고 행복한 표정으로 주인의 손길을 즐겼다. 그런데 그 모습이면 아샤 트레일과 너무도 닮아 있어, 그는 기묘한 감정이 되었다.

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어차피 자신이 일부러 그녀들을 욕보이려고 정령으로 본뜬 것도 아니었다. 새삼 고민해봐야 달라지는 것도 없었다.

“익숙해지셔야 해요.”

아티야는 말했다. 정령들에게 있어 그는 회색빛 세상에서 홀로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존재이며, 누다르가 관심을 표명한 이상 곧 다른 최상급 정령들도 하나둘 그의 존재를 알게 될 거라 설명해주었다.

“주인님은 앞으로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정령들을 거느리게 될 운명이랍니다.”

마치 예언이라도 하듯 확신에 찬 아티야의 말에 그는 똑같은 얼굴을 한 수십, 수백의 정령이 바글거리는 모습을 떠올리고는 넌더리를 쳤다.

**

“소나 돼지, 가축의 소모가 지나치게 빠릅니다. 당장은 왕실의 포상과 기존의 비축이 있어 버틸 수 있다지만 조만간 영지 내에서 소와 돼지를 구경하기 어렵게 될 게 분명합니다. 그때가 되면 멀리까지 나가 가축을 사와야 하니,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안토인 몽테뉴는 지나친 가축의 소모와 재정의 빈약함을 근거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광산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있으니, 그걸로 인근 영지에서 소와 돼지를 사오면 되지 않겠소?”

“광산에서 캐내는 철과 은의 양이 상당한 것은 사실이나, 그걸 한꺼번에 풀면 값이 폭락하고 맙니다. 어느 정도 비축을 하며 적당히 시장에 풀어야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노학자는 그렇게 대답을 하고는 팽창 중인 영지에 나갈 돈이 얼마나 많은지, 한참을 떠들어댔다.

“영지는 팽창 중인지라 눈 돌리면 돈 나갈 곳 투성이고, 귀를 열면 들리는 게 전부 돈 달라는 소리뿐입니다.”

완곡하게 영지의 운영에 조금은 더 관심을 가져달라는 표현에 그는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게다가 영지의 병사들에게 소모되는 비용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영지에 고용된 기병이 50기에 가깝고 그들에게 지급되는 한 달 급여만 해도 125골드에 가깝고, 보병들 역시 다른 영지에 비해 후한 대접을 받는지라 한 달에 20골드 이상이 소모되고 있습니다. 추가로 영입된 교관들의 급여가 또한 매달 10골드이고, 저택의 시종들과 하인들에게 지급되는 돈이 5골드 이상입니다. 이 정도만 해도 어지간한 남작령의 1년 치 수익의 3할 이상이 달마다 인건비로 소모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분명 듣고 있었는데, 나중에 가서는 멍하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숫자와 숫자의 향연에 멍해지고 말았다.

“아무리 철광과 은광이 막대한 부를 일구어낸다고 해도 이렇게 마구잡이로 돈을 써대다가는 광맥은 마르고 돈줄은 막히게 될 겁니다. 이미 수많은 귀족들이 영지에서 발견된 광산을 믿고 흥청망청대다가 몰락해 명맥마저 끊긴 사례가 여러 차례 있습니다.”

“몰락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영지의 사정이 좋지 않소?”

“지금은 괜찮지만, 미리 준비를 해야 할 필요는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안토인 몽테뉴는 그렇게 말하며 한시적으로 병사들의 급여를 삭감하거나 조금은 대우를 낮추는 게 타당하다 말했다. 기병들이야 원체 고급 인력이니 어쩔 수 없다 쳐도 지난 전쟁에서 부상당해 영지에 자리를 잡은 전 드레이크 기병대원들에 대한 지원과 일반 병사들의 보수가 과하다는 주장이었다.

“평화 시에 지급하는 후한 급여는 그들이 언젠가 치러야 할 고된 싸움에 대한 선수금이요. 또한 목숨을 바쳐 싸운 보상을 그렇게 영지 사정에 따라 줄이고 늘인다면 그 누가 발 벗고 나서서 험난한 전투에 뛰어든단 말이오.”

이제껏 어지간하면 안토인 몽테뉴의 의견을 존중해주었던 김선혁이 드물게 역정을 내며 고집을 부렸다.

이곳 세상에 오기 전의 그 역시 징집병이었으며, 그들이 애국심과 의무라는 미명하에 얼마나 혹사당하고 초라한 보상을 받아왔는지 몸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병사들의 급여나 부상자들에 대한 지원을 줄일 수는 없노라 강경하게 주장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영주님의 말씀이 백번 지당합니다. 이 이야기는 다시는 꺼내지 않겠습니다.”

안토인 몽테뉴가 정말로 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노학자는 유능한 관리자였지만, 군인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따로 쓰는 소와 돼지는 조금이라도 줄여보도록 하겠소.”

“그래만 주신다면 영지의 자금을 운용하는 데 한결 여유가 생길 거라 생각합니다.”

벌써부터 밥 달라고 빽빽대는 용의 아종들이 떠올라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

안토인 몽테뉴의 우려가 지나치게 비관적이고 극단적인 면이 있었을지언정 영지에서 소모하는 비용과 가축의 양이 적지 않은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골칫덩어리는 용의 아종들이었다.

골드레이크야 제 스스로 사냥이 가능함을 입증한 바가 있다 해도, 부상이 낫지 않은 레드번이나 비좁은 강에 웅크린 블루곤이 문제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레드번이었다.

혼자 사냥은커녕 부러진 날개 덕에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레드번은 작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다른 아룡들 이상 가는 먹보였다. 입만 열면 빽빽거리며 밥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레드번을 보고 있노라면, 결혼도 하지 않은 몸으로 가장의 고충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거 무슨 아룡이 들어온 게 아니라, 식충이가 들어왔어.”

한숨을 내쉬며 레드번에게 고깃덩어리를 던져주고 있자니, 근래 들어 아샤 트레일의 검술 지도를 받는다고 도통 모습을 보이지 않던 줄리앙이 찾아왔다.

“아리아 아이젠 경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영지의 유일한 마법사가 병상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당장 아바이터의 개량을 위해 영주님을 만나 뵙고 싶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기왕이면 제일 마지막으로 미루고 싶었던 아리아 아이젠과의 대면이 가장 먼저 찾아온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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