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9 =========================================================================
109. 정령 러쉬 (2)
정령 소환 의식의 주체이자 유일한 통제자인 아리아 아이젠이 완전히 정신을 잃자, 의식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나마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던 정령들은 이제 더 이상 늘어나지 않게 되었지만, 이미 소환된 정령의 수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정령들은 서로가 서로를 밟고 밀쳐대며 원 밖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아우성을 쳐댔다. 그 모습이 하도 필사적이라 김선혁은 그저 선으로 나누어놨을 뿐인 원의 안과 밖이 마치 별개의 세상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기우뚱.
개중에 유달리 작고 볼품없는 정령 하나가 제 동족에게 밀려 균형을 잃고 말았다. 짧은 팔다리를 버둥거리는 모습이 저도 모르게 손을 내뻗게 만들 정도로 가엾었다.
“어?”
그런데 그렇게 밀려난 정령이 원 밖으로 떨어지기가 무섭게 형체가 뭉개져 순식간에 흙으로 화해 무너져 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는 정령들이 저리 난리법석을 떠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정령들이 등급에 관계없이 실체를 유지할 수 있는 건 오직 아리아 아이젠이 그린 원 안에서 뿐이었던 모양이다.
와르르, 와르르.
실제로 연달아 원 밖으로 밀려난 하급의 정령들이 죄다 흙더미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정령들이 무너져 내리는 만큼 쪼그리고 앉아있던 아리아 아이젠의 자세 역시 무너져갔다. 시간이 갈수록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는 아리아 아이젠은 당장에라도 잘못될 것처럼 안색이 좋지 않았고, 그는 그녀의 상세가 더욱 악화되지 않도록 서둘러 정령들과 계약을 맺기로 마음먹었다.
“음….”
먼저 계약을 하자고 다가오는 정령 없었다. 그들은 그가 이제껏 계약을 맺었던 기존의 정령들과는 달리 제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고, 먼저 다가와 관심을 표하는 이들조차 없었다.
처음 겪어보는 반응, 하지만 먼저 다가오지 않으면 자신이 다가가면 그만이라 생각한 김선혁은 개중에 덩치가 커다란 편에 속하는 정령에게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뭐야?”
팩.
이번에는 그도 정말로 당황하고 말았다. 지목을 당한 정령이 고개를 팩 돌리며 노골적으로 자신을 외면한 것이다. 그는 애써 마음을 다스리고는 또 다른 정령에게 계약을 제안했다.
“나랑 계약을….”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정령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리고 다른 정령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그 뒤로 몇 번이나 계약을 시도해보았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하급이고 중급이고, 상급이고 간에 그 어떤 정령도 그에게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
그토록이나 애타게 찾던 정령들이 하나도 아니고 눈앞에 바글바글대고 있었음에도 정작 계약하자고 다가서는 정령이 하나도 없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었다.
김선혁은 언제 사라질지 모를 정령들과 이제는 창백하다 못해 파랗게 죽어가는 아리아 아이젠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정령들이 자신과 계약을 맺고 싶지 않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또 아닌 듯했다. 노골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어도 정령들은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절대로 다가오지 않았고, 자신이 지목당하면 금세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워댔다.
“아오. 진짜 미치고 환장하겠네.”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고 아리아 아이젠의 고개는 점점 더 깊게 꺾이고 있었다. 설마하니 의식 한 번에 목숨을 잃지는 않겠지만,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없을 거라는 것만큼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정령들을 관찰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뭐야. 왜 눈치를 봐.”
원 밖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도 수시로 뒤를 돌아보는 정령들의 모습이 누군가의 눈치라도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가만히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던 그는 원의 중심, 유독 휑한 공간에 홀로 웅크리고 있는 정령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너냐? 얘들이 지금 니 눈치 보는 거 맞지?”
이제껏 지목당하기만 하면 고개를 돌리고 노골적으로 자신을 외면하던 정령들과 달리, 흙색 유독 짙은 정령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전적으로 턱을 치켜들며 그를 마주 보았다. 그래봐야 허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키였지만, 존재감만큼은 작은 덩치가 무색할 만큼 대단했다.
이렇게 눈에 띄는 놈을 왜 이제야 발견했을까.
그렇게 정령을 한 번 발견하고 나니 다른 정령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직 눈앞의 정령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정령인 듯한 느낌이었다.
“네가 제일 높은 정령이지?”
곰곰이 생각하다 물었더니, 정령이 거들먹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끙.”
아무래도 자신들보다 한참 높은 상위의 정령이 가만히 있으니, 다른 정령들이 감히 먼저 나서서 계약을 제안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정령에게만큼은 인기 만점인 그가 이렇게까지 외면을 받을 리가 없었다.
“나랑 계약하자.”
이유를 파악했으니, 이제는 해결해야 할 시간이었다. 김선혁은 등급을 알 수 없는 정령에게 계약을 제안했다.
정령이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고민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온몸으로 자신이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표를 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유치하고도 노골적인 과시에 그는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지금 이 시각에도 아리아 아이젠의 안색은 극도로 나빠지고 있었고, 정령들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자꾸만 시간을 잡아먹는 정령이 이제는 차라리 얄미워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저럴 거면 후딱 제안을 거부하고 사라져줬으면 하는 바람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렇게 마지막의 마지막 인내까지 쥐어짜 내며 대답을 기다리던 김선혁은 결국 정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누다르.’
- 최상급 땅의 정령 누다르(Nudar)와 가계약을 맺었습니다.
- 가계약은 구속력이 없는 임시 계약일 뿐입니다. 누다르는 당신의 명령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상대가 무려 최상급 정령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 것도 잠시, 그는 ‘가계약’이라는 말에 와락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넌 아직 너무 부족해.’
이건 또 뭔 개소린가 하고 생각하는 사이 정령이 거만하게 한마디를 지껄여대고는 훌쩍 사라졌다.
어쩜 이렇게 얄미울 수가 있는지, 최상급 땅의 정령 누다르는 하나부터 열까지 제멋대로였다.
“망할 놈.”
마음 같아서야 분이 풀릴 때까지 욕이라도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이미 누다르는 사라졌고 남은 건 이제 눈치 볼 상관이 사라진 만년 대리 같은 그 아래 등급의 정령들뿐이었다.
“전부 계약해!”
기왕지사 일이 이렇게 된 것, 그는 깡그리 다 계약을 맺어버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누다르 때문에 너무도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원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정령들이 빠르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시타예요!’
‘나마트….’
‘노우프라고 불러주세요!’
- 중급 땅의 정령 나시타(Nasita)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 하급 땅의 정령 나마트(Namat)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 하급 땅의 정령 노우프(Nouf)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 정령들의 이름 중에 고작 세 개를 건졌다. 뒤늦게 정령들의 이름을 다시 물어보려 했을 때는 이미 모든 정령들이 흙으로 돌아가고 난 뒤였다.
“이런 망할 누다르….”
다시 한 번 콧대 높은 최상급 정령에 대해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미 사라진 정령들을 다시 불러들일 수는 없었고, 언제까지고 아쉬워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이젠 경!”
다 타고 재만 남은 듯한 모습으로 축 늘어진 아리아 아이젠을 서둘러 치료하는 게 우선이었다.
**
아리아 아이젠은 저택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을 차렸지만, 상세가 호전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파리한 입술은 마치 사자의 그것처럼 생기가 하나도 없었고, 이제는 파랗게 질린 안색은 독약이라도 마신 것처럼 끔찍했다.
“연구실 책상, 두 번째 서랍, 파란 병을….”
덜덜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김선혁이 눈짓을 하니 줄리앙이 황급히 방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어린 종자는 파란 액체가 들어있는 병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걸 내게….”
줄리앙은 지체 없이 파란 약병을 아리아 아이젠에게 건네주었고, 죽기 일보직전까지 도달한 마법사는 단숨에 내용물을 비워냈다.
“이제 좀 괜찮소?”
김선혁이 염려 가득한 소리로 물으니, 아리아 아이젠이 대꾸했다.
“지독한…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빨렸어요….”
그녀는 고작 한마디를 남기고는 다시 기절해버렸다.
“아이젠 경!”
**
하루를 꼬박 기절해 있던 아리아 아이젠이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그렇게 정신을 차린 그녀의 머리가 새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아이젠 경. 머리가….”
마치 노인처럼 푸석푸석하고 가는 머릿결, 보통 사람이라면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에 기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리아 아이젠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머리색의 변화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투로 곧장 의식의 결과를 물었다.
“최상급 정령이라니. 정말 터무니없는 존재가 나타났군요.
그녀는 왕도에서 내로라하는 정령사들 중에도 최상급 정령과 계약을 맺은 자는 없다며 놀란 얼굴을 해보였다.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하지만 금세 마법사다운 호기심으로 정령을 보여달라 졸랐다. 하급과는 달리 최상급의 정령이라면 정령 친화력이 없는 그녀도 정령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그저 가계약을 맺었을 뿐이라, 부른다고 해서 올지는….”
콧대 높은 정령이 부른다고 해서 나타날까 하는 것이었다.
“누다르.”
그는 정령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역시나 누다르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
자신의 머리가 노파의 그것처럼 변했을 때도 실망하지 않았던 그녀가 세상 다 무너진 듯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래도 중급 정령 하나와 하급 정령 둘과 계약을 맺는 데 성공했소.”
그 말을 듣고 난 뒤에야 아리아 아이젠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생기를 되찾았다.
“몸이 낫는 대로 바로 아바이터의 새로운 동력원을 시험해봐야겠군요.”
자나 깨나 실험에 대한 생각뿐인 그녀를 보고 있자니 어지간한 그라도 질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근데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줄 수 있소?”
“의식을 유지하는 데 예상보다 많은 마법력이 소모됐고, 저는 그 정도의 마법력을 지니고 있지 못했어요. 그래서 부족한 마법력 대신 제 생명력이 소모된 거죠. 마법사들은 이런 현상을 에너지 드레인 현상이라 불러요.”
“그 말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번 일로 제 수명이 꽤나 줄었을 거예요.”
제 명이 깎였다는 말을 하면서도 그녀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아니, 오히려 도식(圖式)을 중첩하여 소환진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데 성공해 최상급 정령마저 불러낼 수 있었으니 만족이라 말하기까지 했다.
“다음에는 더 철저하게 준비를 해야겠어요.”
머리가 하얗게 새버릴 정도로 수명을 깎아먹고도 다음 실험에 대한 궁리뿐인 그녀를 보며 그는 도무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냥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했다.
**
아리아 아이젠은 당장에라도 다음 실험에 착수하고 싶어 했지만, 에너지 드레인의 여파는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몸이 나을 때까지 무기한 실험을 연기해야만 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 덕분에 와이번이 영지에 나타난 뒤로는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게 바삐 지냈던 김선혁도 조금은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페어리 드래곤이 깨어난다거나, 와이번이 부상을 떨치고 완전히 일어나기 전까지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아니, 할 일이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영 내키지 않아 최대한 미루고 싶은 일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또 누구냐….”
새롭게 계약을 맺은 정령들을 소환해보아야 했지만, 또 누구를 닮은 정령이 나타날까 염려가 되어 차마 소환을 해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차라리 없었다면 모를까, 기왕 얻은 정령을 평생 소환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망설이던 끝에 아무도 없는 영주의 침실에서 땅의 정령들을 소환해보았다.
“나시타, 나마트, 노우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침실의 벽에서 천장에서 바닥에서 불쑥 튀어나온 세 마리의 정령들, 이번에도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이쯤 되면 정령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미치겠네.”
김선혁은 모습을 드러낸 정령들을 보며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