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107화 (107/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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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정령 러쉬 (1)

붉고 푸르고 다시 누렇고 하얀 빛, 김선혁은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다가섰다.

빛이 새어져 나오는 틈으로 드러난 페어리 드래곤의 알은 마치 붉은 보석처럼 매끄럽고 투명했다. 하지만 막상 손을 내뻗어 만져본 알의 표면은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했다.

김선혁은 내친김에 모포를 싹 걷어냈다.

투둑.

꽁꽁 묶여있던 밧줄이 풀려나가고 모포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렇게 드러난 페어리 드래곤의 알은 정말로 보석 같았다. 마치 이름난 장인이 공들여 깎아 만든 것처럼 흠 하나 보이지 않았고, 매끄러운 단면은 불꽃을 속에 품은 듯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런 외형적인 아름다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게 그 안에 있었다.

붉은 단면 너머로 보이는 작은 생명체가 나비의 그것을 닮은 날개로 몸을 감싼 채 잠을 자고 있었다. 제 몸보다 몇 배는 큰 날개로 몸을 전부 가린 아름다운 생명체를 보며 그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말았다.

“이게 페어리 드래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메시지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 기약 없는 잠에 빠져든 페어리 드래곤을 깨우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 먼저 각인을 하시겠습니까?

생각할 것도 없이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순간 알 속에서 웅크린 채 곤히 자고 있던 페어리 드래곤이 날개를 펴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렇게 얼굴을 내민 페어리 드래곤은 예고도 없이 번쩍 눈을 떴다.

“아….”

- 각인의 과정이 끝이 났습니다.

각인은 너무도 순식간에 끝이 났다. 그리고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찬란하던 섬광이 사라지고 난 뒤였다. 보석 같은 눈을 치켜떴던 페어리 드래곤도 다시 눈을 감고 잠이 든 모습이었다.

- 페어리 드래곤이 깨어나기까지 다소 시간이 필요합니다.

찰나의 마주침이었지만, 맑고 아름답던 페어리 드래곤의 눈동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고,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영주님?”

잠깐 동안 섬광에 정신이 팔렸던 사람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리고는 그를 불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멍하니 알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뒤늦게 표정을 수습하고는 수하들에게 외쳤다.

“돌아간다!”

**

“어떻게 찾은 거지?”

영지로 돌아온 김선혁은 트리스탄을 조용히 불러들였다. 그런 그의 시선은 방 한 켠에 놓인 페어리 드래곤의 알을 향해 고정된 채였다. 알은 더 이상 찬란하게 빛나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세상에 다시없을 진귀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트리스탄 역시 페어리 드래곤의 알을 바라보며 그의 말에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먼저 제 손으로 동료들의 복수를 할 수 있게 해주신 것,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게 먼저 고개를 숙여 보인 트리스탄이 비가 채 마르지 않아 젖은 머리를 넘기며 말했다.

“사실은 페어리 드래곤의 알을 찾은 건 지독히 운이 좋았던 덕입니다.”

“운 또한 실력이지. 그게 모두에게 허락된 것이었다면, 다른 사냥꾼들이 진즉에 찾아왔을 테니까.”

“그렇게 봐주시면 감사하지만, 정말로 운이었습니다. 겸사겸사 탐문을 하기는 했지만, 떠도는 풍문은 동화나 다름이 없었고 반쯤은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와이번을 추격하는 데 전념하기로 했지요.”

트리스탄은 자신이 얼마나 와이번의 추적에 공을 들였는지 굳이 이야기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처음 자신을 찾아왔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흉터가 얼굴과 온몸에 한 가득이라 그 고생이 어땠을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을 수소문하여 겨우 와이번이 있다는 절벽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몸이 날랜 동료 몇이 올라가 둥지를 확인했고, 그곳이 와이번의 거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뜸을 들인 트리스탄은 페어리 드래곤의 알을 바라보며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곳에 페어리 드래곤의 알이 있었습니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세상에는 왕왕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게 자신에게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그걸 기적, 또는 지독한 불행이라고 말했다.

이번 일은 분명 김선혁에게 있어 전자에 속하는 일이었다. 과정이야 어떻게 됐든 간에 반쯤 포기하고 있었던 페어리 드래곤의 알을 발견한 건 그에게 다시없을 행운이었으니까.

“당장 알을 빼낼 방법이 없어 동료는 둥지를 내려왔고, 그 뒤로 수시로 절벽을 오르내리며 와이번을 관찰해본 결과, 마치 와이번이 자신의 알이라도 되는 양 페어리 드래곤의 알을 품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트리스탄 패거리는 궁리 끝에 페어리 드래곤의 알을 이용해 와이번을 포획하기로 결정했고, 그 결과 알에 유인된 와이번을 사냥하는 데 성공했노라 말했다.

“그런 것 치고는 레드번은 알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던데.”

그의 말에 트리스탄이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게 아마 잊어버렸을 겁니다. 포획 전에 몇날 며칠을 관찰하며 알게 된 사실인데, 세간에 퍼진 와이번이 교활한 사냥꾼이라는 말은 사실무근이었습니다. 와이번은 제가 여태껏 사냥해온 그 어떤 몬스터보다 머리가 나쁩니다.”

트리스탄이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묘하게 기분이 상했다. 마치 자기 새끼에 대한 욕이라도 들은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트리스탄을 탓할 수 없었다. 정말로 와이번은 흔치 않은 돌머리였다.

오죽하면 방금 전에 식사를 마치고도 금세 까먹어버리고 밥 달라고 빽빽거릴 정도였던지라, 상태 창을 통해 포만감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무한정 제공되는 식사에 배가 터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생각보다 별거 없군. 뭔가 기상천외한 모험담을 기대했는데.”

블루곤을 찾아 바다를 찾았던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트리스탄 역시 그러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트리스탄은 몬스터 사냥이라는 게 대개 인내심에 의해 성패가 결정 나며 이번 와이번 사냥 역시 마찬가지였노라 말했다.

“과정의 험난함과 둥지를 오르는 수고에 비하면, 와이번의 포획 자체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와이번은 정말로 머리가 나빴으니까요.”

“음.”

자꾸만 레드번이 머리가 나쁘다 말하니 저도 모르게 표정이 안 좋아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트리스탄은 또 자신의 설명이 너무 성의 없어 그랬다 여긴 것인지 말주변이 없는 자신을 용서해달라 고개를 숙였다.

“용서는 무슨. 그보다 우리 셈해야 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은가.”

“제 스스로는 영주님께 평생을 바쳐 은혜를 갚기로 마음먹었지만, 동료들에게만큼은 약속했던 보수를 지불해주십시오. 하루살이 같은 인생, 영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다시는 몬스터 사냥에 나서기 힘들 정도로 패거리의 수가 줄어버린 트리스탄 패거리는 해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트리스탄은 벌써부터 동료들이 은퇴하고 난 뒤의 삶을 염려하고 있었다.

“걱정 말아라. 약속했던 것보다 후한 보수를 내릴 생각이다. 그대 패거리가 구해온 것은 와이번 한 마리가 아니니까.”

기대하지 않게 와이번을 얻었고, 덤으로 언젠가는 깨어날 게 분명한 페어리 드래곤의 알을 얻었다. 물론 트집을 잡자면 중간에 놓쳐버린 와이번을 잡은 것도 그였고, 도망친 패거리를 찾아 페어리 드래곤을 되찾은 것도 그였으니 대가를 주지 않는다 해도 크게 이상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기꺼이 약속했던 것 이상의 대가를 내리겠다고 확언했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그래. 패거리가 해체되면 어디로 갈 참인가? 만약 딱히 정해진 게 없다면 여기서 제 2의 인생을 시작해보는 건 어떤가?”

그는 처음부터 트리스탄이라는 유능한 인재를 영지에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허락해주신다면 그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트리스탄은 직접 복수를 할 수 있게 배려해준 그에게 신세를 갚기 위해서라도 영지에 당분간은 남을 생각이라 말했고, 다른 동료들에게도 의향을 물어보겠노라 대답했다.

그리고 그들은 하루가 지나지 않아 모두 라인펄 영지에 잔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김선혁은 그들에게 후한 보수를 약속하고 영지병으로 그들을 모조리 흡수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무리의 우두머리만 봐도 트리스탄 패거리가 다른 몬스터 사냥꾼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우직한 사내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그들이 갈고 닦은 추적술과 인내심은 영지병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트리스탄을 제가 가르쳐 보아도 되겠습니까?”

대체 트리스탄에게서 무엇을 본 것인지 뜬금없이 아샤 트레일이 요청했다.

김선혁은 마음대로 하라 말했다. 오래 겪은 것은 아니지만 트리스탄이라는 사내가 은원에 철저한 성격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아샤 트레일의 제안은 더 큰 은혜를 베풀어 트리스탄이 영지를 쉽사리 떠날 수 없게 만들 게 될 것이다.

“최대한 잘해줘. 거칠지만 기본적인 의리는 있는 자들이니까.”

그렇게 그가 드물게 영지의 운영에 참여하는 동안에도 와이번은 여전히 날지 못하는 상태였고, 페어리 드래곤은 깨어나지 않았다.

“준비 됐어요.”

워낙에 큰일들이 연달아 일어난지라 반쯤은 잊고 있었던 아리아 아이젠이 찾아와 정령 소환 의식의 준비가 끝이 났음을 알려주었다.

“오오.”

그는 반색을 하고 의식에 참여했다.

“의식으로 정령들을 잡아둘 수 있는 건 아주 잠시 뿐이에요. 그리고 어떤 등급의 정령이 나올지는 의식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요.”

의식은 영지 밖에서 이루어졌다. 이름 모를 들풀이 무성한 평원에서 그녀는 쭈그려 앉아 원을 그렸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잠깐 기다리는 사이에 땀을 뻘뻘 흘리며 원을 완성한 아리아 아이젠이 다시 그 안에 작은 원과 기괴한 도형들을 새겨 넣었다. 시약이 뿌려지고 괴상망측한 물건들이 원 안에 얹어지는 동안 그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후우.”

한참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완벽하게 준비를 끝낸 아리아 아이젠이 허리를 펴며 이마에 땀을 닦아냈다.

“준비 되셨나요?”

“나야 언제든.”

그가 준비가 됐음을 확인한 그녀가 원의 중심에 쭈그리고 앉아 땅을 짚었다. 그리고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읊조리기 시작했다. 언뜻 보기에는 지독스러울 정도로 궁상맞은 모습이었지만, 그녀의 주변으로 끊임없이 요동치는 마법력은 절대 소소하지도 볼품없지도 않았다.

바스락.

겨우 무릎에나 닿던 들풀과 잡초들이 갑작스레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허리춤까지 자라난 풀과 잡초가 다시 바싹 메말라 부스러져 내렸다. 그리고 그 자리로 새로운 싹이 돋아나고 다시 또 자랐다 스러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몇 번이나 같은 일이 반복되고, 들풀이 걷혀 맨살을 드러낸 검붉은 흙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미리 뿌려둔 시약을 따라 빛이 올라왔다.

“의식은 시작됐어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김선혁은 아리아 아이젠의 당부에 눈에 힘을 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음?”

잠시 빛이 번쩍거린 것 말고는 그 어떤 조짐도 보이지 않는 평원, 정령의 모습은 없었다.

실패한 건가.

돈이란 돈대로 들이고 또 다시 탐욕스러운 마법사에게 사기를 당한 것인가 싶어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너무 성급한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아무것도 없다 여겼던 땅속에서 난쟁이들이 튀어 나왔다.

갓난아기만큼 작지만 머리통만큼은 기형적으로 큰 난쟁이, 땅의 정령이 분명했다. 그는 속성 지배력을 끌어올려 난쟁이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쪽이다. 꼬맹이들아.

흙으로 빚어진 듯 이목구비도 없는 난쟁이들이 그 기운을 알아차리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눈코입 다 뭉개진 흙인형들이 한꺼번에 고개를 돌리는 광경은 꽤나 소름이 돋는 모습이었지만, 그는 애써 무시하고 정령들 중 관심을 보이는 개체를 골라내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불쑥. 불쑥.

땅의 정령들이 끊임없이 튀어 나왔다.

하급, 중급, 상급.

존재감도 크기도 제각각인 정령들이 계속해서 땅속에서 솟아났다.

“아이젠 경?”

처음에는 십여 마리에 불과했던 정령들이 나중에 가서는 아리아 아이젠이 그린 커다란 원을 꽉 채울 정도로 바글바글해졌다. 이제는 자신이 정령을 골라내는 게 아니라 정령들이 자신을 품평이라도 하는 듯한 기분이라 그가 괜스레 섬뜩해진 마음에 아리아 아이젠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이 없었고, 바닥에 쪼그려 앉은 그대로 기절한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에도 정령들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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