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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뜻밖의 소득 (2)
김선혁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와이번은 정말로 온몸으로 체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고, 억센 턱에 붙들린 채 겨우 숨만 내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딱하든지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골드레이크에게 와이번을 놔주라 명령할 뻔 했다.
하지만 그는 애써 연민을 털어버렸다. 아마도 먼저 희생된 사냥꾼의 것이라 짐작되는 옷가지가 아직도 와이번을 톱니처럼 날카로운 이빨 사이에 끼어 있었고, 그건 와이번 사냥이 실패했을 경우 라인펄 마을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제야 이주민들과 기존의 영지민들이 조화를 이루어 겨우 살만해지려던 상황에서 라인펄은 자유롭게 창공을 누비는 괴수의 사냥터로 전락했을 것이다.
- 드래곤 테이밍 스킬이 발동되었습니다.
- 빈사 직전에 이른 아종의 용에게 테이밍을 시도했습니다.
- 실패했습니다.
상태가 상태니만큼 쉽게 굴복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예상이 틀리고 말았다. 와이번은 저 지경이 되고서도 테이밍을 거부했다.
“너, 그러다 죽어.”
골드레이크가 껌처럼 씹어댄 덕에 너덜너덜해진 와이번은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테이밍에 시간이 걸렸다간 기껏 법석을 떨며 포획한 와이번이 정말로 죽어버릴 판국이었다.
“농담 아니야. 지금 당장 치료해도 너 살 수 있을지 모른다고.”
- 드래곤 테이밍 스킬이 발동되었습니다.
- 와이번에게 테이밍을 시도했습니다.
- 실패했습니다.
이번에도 와이번은 그의 테이밍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그리고 와이번은 자포자기한 상태에서도 끝까지 그의 제안을 거부했다.
크르르르.
시간이 흐를수록 골드레이크의 턱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헐거운 턱을 꽉 다물고 와이번을 산산조각낼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골드레이크의 상태에 와이번이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나도 언제까지고 골디를 말릴 수 있는 건 아니야.”
농담이 아니라 골드레이크가 눈 딱 감고 주인의 말을 무시하고 턱에 힘을 주는 순간 와이번은 순식간에 죽어버릴 것이다. 그는 그런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랐고, 그래서 더욱 필사적으로 와이번을 설득했다.
“일단 상처부터 치료해야지. 그 다음에 정 마음에 안 들면 도망치든지 해. 넌 날개가 있잖아?”
- 드래곤 테이밍 스킬이 발동되었습니다.
- 와이번에게 테이밍을 시도했습니다.
- 와이번이 조금이지만 당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다 죽어가는 와이번을 앞에 두고 설득을 하다 보니, 드디어 괴수가 그의 말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여세를 몰아 계속해서 와이번을 달래고 설득했다.
- 드래곤 테이밍 스킬이 발동되었습니다.
- 와이번에게 테이밍을 시도했습니다.
- 와이번이 망설이고 있습니다.
조금씩 변해가는 테이밍 결과가 고지를 바로 앞에 둔 듯했다.
“대체 뭐가 걱정인데? 갑갑해? 평소에는 네 마음대로 날아다녀도 상관없어.”
- 드래곤 테이밍 스킬이 발동되었습니다.
- 와이번에게 테이밍을 시도했습니다.
- 와이번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와이번은 넘어올 게 분명했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이제 와이번은 호박색의 눈동자를 하얗게 까뒤집고 꼴딱, 꼴딱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골디. 일단 놔줘.”
아티야를 소환해 만약을 대비한 그가 명령을 내리자, 골드레이크가 불만스럽게 목을 울려대고는 와이번을 패대기쳤다.
“아, 좀!”
오늘따라 말도 안 듣고 우악스러운 골드레이크의 돌발행동에 그가 버럭 성질을 내자 괴수가 못 들은 척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리더니 고개를 팩, 하고 돌렸다. 그리고는 앞발로 눈을 가리고 더 이상 이 일에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의지를 온몸으로 표현했다.
“쯧.”
척 보기에도 뭐에 토라졌는지 단단히 토라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속 좁은 드레이크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는 패대기쳐진 상태 그대로 숨을 몰아쉬는 와이번에게 다가가 서둘러 테이밍을 시도했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더 이상은 정말 시간이 없다.”
- 드래곤 테이밍 스킬이 발동되었습니다.
- 와이번에게 테이밍을 시도했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이 이상 늦었다간 테이밍에 성공해도 금세 와이번이 죽어버릴 판국이었다. 그는 부드러우면서 힘 있는 목소리로 와이번에게 설득이 아닌 통보를 했고, 와이번의 사념이 전해져 왔다.
- 살려줘!
머릿속으로 와이번의 것일게 분명한 다급한 외침이 파고들었다.
- 테이밍에 성공했습니다!
- 와이번이 넘어왔습니다!
- 비록 완벽하게 굴복시켜 온전한 주인이 된 것은 아니지만, 테이밍은 성공했습니다.
- 죽기 직전의 아룡과 관계를 맺는 데 성공했습니다.
메시지기 끝이 나는 순간, 초점 없는 눈이나마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던 와이번이 눈을 까뒤집고 거품을 질질 흘리며 완전히 늘어졌다.
미처 이름을 지어주기도 전에 와이번은 기절하고 말았다.
**
김선혁은 만사 제쳐놓고 와이번을 회복시키는데 전념했다. 골드레이크나 블루곤처럼 속성을 알았다면 더 수월한 방법을 찾았으련만, 안타깝게도 와이번은 제 속성을 알려주지도 않고 의식을 잃었고 그 뒤로 쭉 기절한 상태였다.
“애를 완전 걸레짝을 만들어놨네.”
골드레이크의 물고 털고 씹어대는 바람에 와이번의 상태는 처참했다. 커다란 날개는 꺾이고 찢겨져 넝마가 되어 있었고, 가슴과 목 부근의 비늘은 너덜너덜하기만 했다. 가뜩이나 덩치 차이도 많이 나는데 그렇게 사정없이 와이번을 다루었으니 상태가 온전한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 빈사.
몇 번이나 상태 창을 확인해보아도 와이번의 상세는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뜻밖에 아리아 아이젠이 도움이 되었다.
“장담은 못하지만, 그래도 효과가 있을 거예요.”
난생 처음 보는 와이번의 모습을 한참이나 구경하다 사라진 그녀가 정체불명의 액체와 약초들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고맙….”
“대신 비늘하고 살점, 그리고 피 좀 챙겨갈게요.”
아리아 아이젠은 그의 감사 인사에 기다렸다는 듯이 와이번에게 다가가 부러진 비늘을 긁어모으고 살점을 떼어냈다. 상처를 벌려 피를 뽑아가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지간한 김선혁이라도 기가 질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거북스러운 연구 욕심과는 별개로 그녀가 전해준 액체와 약초는 효과가 꽤나 탁월했다. 당장 액체를 상처 위에 부어버리자 내내 의식을 잃고 있던 와이번이 단숨에 깨어난 것이다.
빼에에에에에엑!
그런데 그렇게 깨어난 와이번이 비명을 지르더니 다시 눈을 뒤집고 기절했다.
“대, 대체 이게 뭐요.”
“전에 연구해두었던 재생약인데 나름 효과는 보장해요.”
그녀의 말마따나 재생약의 효과는 엄청나게 즉각적이고 탁월했다. 벌어진 상처가 뽀글거리며 거품을 일으키더니 조금씩 아물어가는 게 눈에 보였다.
“호오.”
그 비현실적인 효과에 그가 약에 관심을 보이자, 아이라 아이젠이 선수를 쳤다.
“사람한테는 못 써요. 상처는 곧잘 치료가 되는데, 고통이 너무 끔찍해서 쇼크로 죽어버리더라고요.”
상처가 치료되는 대신 쇼크로 죽어버리는 약이라니, 과연 그걸 약으로 분류해도 되는 것인지 차라리 황당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런 약인지 독인지 모를 액체를 그리 망설임 없이 와이번에게 발라준 그녀의 무책임함에 기가 막힐 뿐이었다.
“그런 걸 막 써도 되는 거요?”
“걱정 마세요. 저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답니다. 강인한 생명력의 몬스터들이라면 충분히 이 약의 고통을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제 가설이 맞았네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이번에는 약초를 잡아들었다. 그는 그녀가 덜컥 정체불명의 약초를 사용하기 전에 앞을 막아서고 물었다.
“설마 약초도….”
“아뇨. 약초는 평범하게 상처가 덧나지 않고 회복이 빨라지게 도와줄 뿐, 새삼 특별한 건 아니에요. 그리고 통증을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어요. 아, 이걸 먼저 발라줬어야 했는데. 제가 실수했네요.”
마법과 관련되지 않은 일에서만큼은 어린아이만도 못한 그녀다운 대답이었고, 실수였다. 그는 몇 번이나 약초의 효험을 확인하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약초를 뺏어 들고는 아주 작은 양을 먼저 상처에 뿌려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그녀의 말마따나 와이번이 갑자기 발작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안심하고 나머지 약초를 상처에 골고루 펴 발라 주었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간헐적으로 몸을 경련하던 와이번이 편안하게 숨을 내쉬게 되었다.
“일단 고맙소. 돌아가 보시오.”
와이번이 워낙에 생명력이 질겼기에 망정이지, 자칫 잘못했으면 상처만 치료하고 정작 와이번은 죽여 버릴 뻔했다. 그가 마뜩찮은 눈빛으로 훠이훠이 손짓을 해 아리아 아이젠을 쫓아냈다.
“혹시 나 없을 때라도 아이젠 경이 와이번에 접근 못하도록 하라. 만약 그녀가 나타나면 지체 없이 나에게 알리도록.”
혹시 또 무슨 실험을 한다고 와이번에게 해코지를 할지 몰라 그가 영지병들에게 신신당부했다.
“밤낮 없이 영주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방금 전에 와이번이 얼마나 끔찍한 비명을 질렀는지 제 눈으로 지켜본 영지병 아돌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게 노심초사하며 와이번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던 김선혁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와이번의 상태 창을 열어 혹시라도 상세의 변화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 탈진, 고통, 경계.
그렇게 시간을 보내기를 한참, 거의 일주일 만에 와이번의 상태 창에 변화가 생겼다.
“영주님! 와이번이 깨어났습니다!”
“알고 있다!”
때마침 아돌이 달려와 와이번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알려주었고, 그는 날 듯이 와이번이 있는 창고로 달려갔다.
“영주님 오셨습니까.”
“언제 깨어났지?”
와이번을 경계한 탓인지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병사가 그 말에 바로 직전이라 대답을 해주고 그는 반색을 하며 와이번에게 다가갔다.
“드디어 일어났구나.”
와이번은 힘없이 고개를 늘어트린 채, 호박색의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려댔다.
“당장 몽테뉴 경에게 일러 가장 살찐 돼지 한 마리를 잡아 가져오도록 해라!”
그 모습이 꼭 아사 직전이었던 골드레이크를 처음 보았을 때, 그 느낌 그대로인지라 바로 와이번의 식사를 준비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들이 들것에 고깃덩이들을 실고 달려왔고, 그는 지체 없이 가장 큼지막한 고깃덩이를 쥐어 와이번에게로 향했다.
“영주님. 조심하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그놈이 배가 고픈지, 병사를 공격했었습니다.”
아돌은 정신을 차린 와이번이 경계를 서던 병사를 공격하려 했었다며, 자신의 영주에게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걱정마라.”
하지만 아돌의 경고에도 김선혁의 아랑곳하지 않고 와이번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 허기, 식욕, 탈진, 경계.
와이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볼 뿐, 쉽사리 그가 내민 고깃덩이를 받아먹지 않았다. 아무래도 테이밍의 과정이 지나치게 과격했던 것이 트라우마로 남은 모양이었다.
“먹어. 먹어야 정신 차리지.”
한참을 달래보아도 먹이를 받아먹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와이번을 보다 못한 그가 억지로 턱을 벌리고는 고기를 쑤셔 넣었다.
“여, 영주님!”
괴수의 턱 사이로 손을 꾸겨 넣는 영주를 본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괜찮으니까, 그렇게 정신 사납게 할 거면 다들 물러나 있도록. 우리 레드번이 겁먹으니까.”
“레드번? 레드번이 뭡니까?”
이미 와이번이 깨어났다는 소식이 돈 것인지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게 한센과 클라크가 다가와 물었다.
“레드 와이번, 줄여서 레드번.”
“오오! 그럴듯하군요. 아주 멋진 이름입니다.”
“그렇지?”
진심으로 감탄했는지 몇 번이고 이름이 그럴듯하다며 탄성을 토해내는 한센, 그리고 칭찬에 고무된 김선혁은 한껏 우쭐거리는 표정이 되었다.
“재고의 여지는 없는 겁니까?”
“없어! 이보다 잘 어울리는 이름이 세상에 어디 있어!”
“좋기만 하구만!”
클라크의 말에 그와 한센이 버럭 역정을 냈다.
“뭐, 영주님의 와이번이니까. 알아서 하십쇼.”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클라크가 한숨까지 내쉬었다. 코웃음을 친 김선혁이 뒤늦게 와이번이 자신이 준 고기를 전부 먹어치웠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새로운 고깃덩이를 건네주었다.
덥썩.
이번에는 선선히 고기를 받아먹는 와이번을 보며 그가 흡족하게 웃었다.
“넌 이제부터 레드번이다. 레드번, 그게 네 이름이야.”
- 와이번의 복종도가 소폭 상승하여 15가 되었습니다.
- 속성 창에 새로운 항목이 생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