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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고용주가 해야 할 일 (2)
아리아 아이젠은 마치 찰흙 놀이라도 하듯 흙덩이를 뭉쳤다 펼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입으로는 쉬지 않고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며 빛깔 좋지 않은 흙을 그리 반죽하고 있으니 그 모양새가 차마 눈 뜨고 지켜볼 수 없을 정도로 기괴했다. 마치 정신 나간 처자가 오물이라도 조물거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서서 기척을 낼까 싶다가도 아이라 아이젠이 워낙에 작업에 몰두해 있었던지라 그는 가만히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만 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 보니 모양도 없이 뭉쳐있던 진흙덩이가 어설프게나마 사람의 형상을 갖추게 되었다.
머리는 크고 사지의 길이도 제각각, 아리아 아이젠이 만든 진흙 인형은 끔찍할 정도로 볼품이 없었고 흉물스러웠다.
“음?”
그녀가 만들어낸 결과물을 살펴보던 김선혁은 쉼 없이 지껄여대던 알 수 없는 읊조림이 어느 순간 멈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삐 진흙을 매만지던 창백한 손도 이미 멈추고 난 후였다.
꿈벅. 꿈벅.
슬쩍 고개를 돌리니 쪼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만 올려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리아 아이젠의 모습이 보였다.
“음.”
순간적으로 고민이 되었다. 무단침입에 사과를 해야 할지, 그도 아니면 영주의 호출을 몇 번이나 무시한 그녀를 질책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보세요.”
그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 아리아 아이젠이 여전히 쭈그리고 앉은 채로 불쑥 진흙 인형을 들어올렸다.
“하급 아바이터(Arbeiter), 시제품이에요.”
하루종일 조물딱거린다 싶더니 그새 정이라도 들었던 것일까. 이름까지 붙여서 영주에게 인형을 소개해주는 그녀의 모습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이젠 경.”
아무리 마법사들이 고급인력이고 제멋대로인 것을 알고 데려왔다지만, 이래서야 기껏 영지까지 데려온 보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정색을 하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이런 인형이나 받자고, 여기까지 찾아온 줄….”
작정하고 버릇을 고쳐놓으려던 김선혁은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얼빠진 표정을 지어보여야 했다.
까딱. 까딱.
아리아 아이젠의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던 진흙 인형이 사지를 버둥거리는 것을 본 탓이었다.
“이게 무슨….”
작은 진흙 인형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본 그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아무 말이 없자, 그녀가 슬쩍 아바이터를 내려놓았다.
턱턱, 번쩍.
작은 인형이 힘자랑이라도 하듯 의자 다리를 붙잡고 들어 올렸다. 하지만 워낙에 크기 차이가 심했던 탓인지 의자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두 팔이 쑥, 하고 빠져버렸다.
“이건 시제품, 재료랑 시간만 충분히 주어지면 사람보다 더 크게도 만들 수 있어요.”
진흙 가득한 손바닥을 꼬질꼬질한 로브 자락에 쓱쓱 문질러댄 아리아 아이젠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흐리멍덩했던 그녀의 눈빛이 이때만큼은 초롱초롱하기 그지없었다.
그 순간 김선혁의 머리는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아바이터가 의자를 들어 올리는 모습을 연출한 것은 아리아 아이젠이 찰흙으로 빚은 인형의 용도가 무엇인지 은연중에 표현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급 아바이터라는 말은 중급, 상급도 존재한다는 말이오?”
아리아 아이젠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하늘 같은 영주를 상대로 저런 오만불손한 대답이라니, 고개만 까딱 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김선혁이 성큼 한 발을 내딛었다.
“몽테뉴 경에게 말해둘 터이니, 필요한 물품이 있다면 목록을 전달토록 하시오.”
마뜩찮은 기색이 역력했던 얼굴에는 어느새 봄바람 같은 훈훈함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그렇게 그가 미소 띤 얼굴로 양팔이 떨어져 나가고도 뒤뚱거리며 연구실 바닥을 헤집고 다니는 아바이터를 보았다.
“이건 내가 가져가도록 하겠소.”
아리아 아이젠은 이미 망가진 아바이터에 흥미를 잃었는지 새로운 덩어리를 조물거리고 있었다. 그는 대답 없는 그녀를 두고 조용히 연구실을 나섰다.
“대박인데?”
아바이터, 잘만 활용하면 그 가능성이 무궁무진할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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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이터를 보여주자 아리아 아이젠을 식충이 보듯 하던 안토인 몽테뉴도 금세 태도가 달라졌다. 사람이 부족한 영지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노학자이니만큼 벌써부터 아바이터를 통해 그간 미루어 두었던 영지의 큰 사업들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인력이 부족해 미루어두었던 치수사업과 관개시설의 개발을 우선적으로 다져야 합니다. 지금 영지는 가뭄과 홍수 등 재해에 너무 취약합니다. 또한 영주 저택을 확장하고, 도로를 다져야 하고….”
나이에 맞지 않게 눈을 번쩍거리는 안토인 몽테뉴는 회춘이라도 한 것처럼 의욕적이었다. 영지의 운영에 관해서만큼은 노학자에게 거의 일임하다시피 했던 그인지라 그렇게 하라 대답을 해주었고, 안토인 몽테뉴는 당장 필요한 물건을 확인하겠다며 직접 아리아 아이젠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렇게 바람처럼 노학자가 사라지고 난 집무실에 홀로 남은 김선혁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그는 왕실 조사관 아인스트 제네거를 통해 마법사들이 박학다식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항상 제대로 된 진짜 마법사가 영지에 찾아오기를 바랐다. 아인스트는 지식이 뛰어났지만, 정작 마법적인 소양은 영 평범했던 탓이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는 사회성도 부족하고 성격도 제멋대로인 아리아 아이젠을 기어코 영지로 끌고 왔다. 그리고 이 제멋대로인 마법사는 시작부터 대박을 터뜨렸다.
광산이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하며 영지의 재정이 풍족해졌음에도 인력이 부족해 엄두도 내지 못했던 대규모 사업들을 이제야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하급일지언정 아바이터는 굉장히 높은 경지의 마법적 소양이 요구되는 분야였고, 아리아 아이젠은 한참을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그 과정에서 소모된 비용이 차라리 인부를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무지막지했다.
아마 어지간한 시골 영주였다면, 진즉에 그 엄청난 자금의 소요를 감당하지 못하고 파산했을 것이다. 그나마 이제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한 은광과 철광이 현금화가 되기 시작한 덕에 버텨낼 수 있었다. 왕실에서 내린 포상금 역시 상당 부분 도움이 되었다.
“영주님. 과연 이 정도의 투자 가치가 있을까, 의문입니다.”
한동안 아리아 아이젠의 열렬한 지지자 행세를 했던 안토인 몽테뉴가 금세 식어버린 태도로 우려를 표했다.
“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고, 조금만 더 믿어봅시다.”
김선혁은 그런 노학자를 달래주었다.
이곳 세상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지나칠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인간 외적인 초월적인 힘이 작용하는 세상이라 꼭 필요한 부분은 초인들에게 떠넘기는 식으로 오랜 시간을 버텨온 듯했다.
그런 생각은 현명한 노학자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고, 차라리 필요할 때 그녀를 잘 구슬려 인스톨 마법을 펼치는 게 더욱 효율적이지 않느냐 의견을 제시했다.
“불러도 안 나타나는 마법사를 무슨 수로 필요할 때마다 부린단 말이오.”
하지만 그는 근래 들어 마법사라는 족속들이 얼마나 다루기 힘든 존재인지를 여실히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제멋대로인 마법사를 그때그때 설득하느니, 차라리 돈이 들더라도 아바이터를 만들어 건설 현장에 투입하는 게 나았다.
줄곧 노학자의 의견을 우선해왔던 김선혁이 아바이터의 개발에 있어서만큼은 유독 고집을 부렸다. 그리고 그 고집은 얼마 가지 않아 결실을 보게 되었으니, 드디어 아바이터가 완성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 음.”
완성된 아바이터의 첫인상은 실망 그 자체였다. 삐뚤빼뚤하고 멋대로인 형태는 시제품이었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고, 단지 크기가 자랐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조금이지만 맥이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아바이터의 시운용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감상이었을 뿐이다.
“오오!”
장정 열이 들러붙어야 겨우 들어 올릴 법한 거대한 목재를 거뜬히 들어 옮기는 아바이터의 모습에 그가 환호했다.
“완성이 되었지만, 개량의 여지는 남아 있어요. 신체 밸런스를 맞추고 더욱 단단한 재료를 쓰면 혼자서 능히 성을 쌓고도 남을 거예요.”
딱 필요한 말만 하던 아리아 아이젠도 아바이터를 시연할 때만큼은 신이 나서 입을 놀려댔다.
“그 정도씩이나.”
물론 세상사에 무지한 아리아 아이젠이 하는 말이니 다소 실정에 맞지 않겠지만,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의미이일 것이다. 그녀는 수명이 다 할 때까지는 지치지도 않는 이 만능 일꾼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한참이나 떠들어댔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수명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빠져 있었다.
“그래서 그 수명이 얼마요.”
궁금함을 참지 못한 그가 물어보니, 그녀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사흘이요.”
“사흘?”
그 엄청난 돈을 때려 박고 만들어낸 아바이터의 수명이 고작 사흘이라니 저도 모르게 미소가 싹 사라졌다.
“몽테뉴 경. 아바이터 하나 만드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얼마 정돕니까?”
“최소 70골드 이상입니다.”
시행착오의 과정에서 발생한 비용은 뺀 금액이 그 정도였다. 숙련된 정예 기병를 둘이나 운용할 수 있는 비용을 들여 사흘밖에 일하지 못하는 일꾼을 만든 셈이었으니, 그로서는 차라리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사흘,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굴린다고 가정했을 때, 아바이터 하나의 노동력이 얼마요.”
“장정 열이 주야로 교대하며 일하는 꼴이니, 장정 스물을 3일간 고용하는 비용이랑 비슷합니다. 물론 지치지 않는 아바이터의 체질과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하면 대략 장정 마흔에서 쉰 정도를 3일간 고용하는 비용과 비슷하지요.”
“그래서 그게 대체 얼마라는 거요?”
“숙련된 일꾼이라 가정하면, 대략 1골드 20실버 정도가 나오겠군요.”
이쯤 되니 뻔뻔하게 아바이터를 자랑하던 아리아 아이젠도 영주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사회성이 부족하고 외골수일지언정, 바보가 아니었다. 영주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진즉에 이해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개량하면 수명은 최대 세 배까지는 늘일 수 있어요. 그리고 수명이 다 된 아바이터라고 해도 폐기되는 게 아니에요. 아주 약간의 비용만 들이면, 바로 살려내서 다시 일을 시킬 수 있어요.”
“그 약간의 비용이 대략 1골드입니다.”
몽테뉴의 말에 결국 김선혁도 참았던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결국 본전을 뽑으려면, 개량하기 전까지는 수백 번은 재활용을 해야 한다는 말이군.”
큰 기대를 갖고 시작한 투잔데 그 결과가 이 모양이니 이미 쏟아 부어버린 본전 생각이 나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럼 이제 자금 지원도 없는 건가요?”
이런 상황이 되어서까지 자신의 연구비에만 신경을 쓰는 아리아 아이젠이 차라리 뻔뻔하게 느껴져 이제는 어지간한 그도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1,000골드에 가까운 돈을 해먹고도, 만들어낸 게 저런 폐품이니 지금 지원이 문제요?”
안토인 몽테뉴가 만류했을 때 그만두었다면 일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마법사에 대해 지나친 환상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만회할 수 있어요!”
“그리고 또 연구비를 요구할 생각이겠지.”
돈, 돈, 돈. 마법사는 정말이지 돈 잡아먹는 귀신이었다. 이런 끔찍한 자들을 수백이나 거느린 왕실의 재력과 인내심에 차라리 감탄마저 나올 지경이었다.
“일단 돌아가서 근신하고 있으시오. 며칠 생각해보고 가부를 결정할 테니.”
머리가 아파왔다. 왜 저쪽 세상에서 그렇게 과학자들을 천대하고, 자금으로 압박하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결과라는 놈이 나오기까지는 그야말로 인고의 과정이 필요했다. 그리고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자신에게는 그 인내력도 재력도 충분하지 않은 듯했다.
“일단 아바이터는 가져가겠소.”
은근슬쩍 아바이터를 챙겨 사라지려던 아리아 아이젠이 울상이 되었다. 그 뻔뻔한 모습에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된 그가 험악한 얼굴로 손을 훠이훠이 흔들었다.
“…만 있었으면 다 해결됐을 텐데.”
구시렁거리며 사라지는 아리아 아이젠의 모습에 김선혁이 문득 그녀를 다시 불러세웠다.
“다시 말해보시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자신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행동을 했는지, 스스로도 알고 있는지 아리아 아이젠의 태도가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잔뜩 기가 죽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법사들이 눈치가 없는 척할 뿐 사실은 다른 누구보다 영민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저들은 눈치가 없는 게 아니다. 그저 타인을 신경 쓰지 않을 뿐이다.
“아니. 질책하려는 게 아니니까, 방금 했던 말 다시 해보라는 말이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음.”
아리아 아이젠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화가 난 영주가 트집이라도 잡으려 한다 여긴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방금 전에 뭐라 말했는지 다시 한 번 말해보란 말이오. 뭐만 있었으면 된다고?”
다시 한 번 다그치자 그녀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정령만 있었으면 다 해결됐을 거라 말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