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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고용주가 해야 할 일 (1)
상태 창을 확인한 김선혁은 만사 제쳐놓고 블루곤을 찾아 강으로 향했다.
안토인 몽테뉴의 말처럼 강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수위가 엄청나게 낮아져 가장자리에는 수초가 흉물스럽게 드러나 있었고, 수차는 허공에 매달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반쯤 주저앉은 상태였다.
이 모든 게 불만에 가득 찬 블루곤이 만들어낸 광경이라는 사실이 기가 찰 지경이었다.
“블루곤.”
그는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블루곤을 불렀다. 하지만 진즉부터 자신의 주인이 강변에 당도했음을 알고 있었을 블루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거리가 멀리 떨어져 한동안 확인하지 못했던 블루곤의 상태는 그야말로 불만에 가득 찬 상태였고, 그 탓인지 복종도가 대폭 하락한 상태였다. 이제는 거의 한자리 수에 가까워진 복종도를 생각하면 물어뜯겠다고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블루곤!”
조금 더 소리를 높여 블루곤을 불러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블루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안토인 몽테뉴에게 일러 미리 준비한 돼지와 소의 고기를 강가에 던져 넣었다. 일부러 핏기를 남겨두고 도축한 고기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금세 강을 벌겋게 물들였다.
저 멀리서 블루곤의 것이라 추측되는 검푸른 그림자가 수면 바로 아래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다시 힘주어 서펜트의 이름을 불렀고, 그의 목소리에 이끌린 것인지 피 냄새에 이끌린 것인지 블루곤이 강가로 다가왔다.
쿠르르르르.
물보라가 피어오르고 수면 아래가 맹렬하게 요동을 쳤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강이 다시 평온해졌다.
김선혁은 다시 고기를 강가에 던져 넣었다. 핏물이 번질 틈조차 주지 않고 검푸른 그림자가 커다란 고깃덩이를 집어삼켰다. 그는 똑같은 행동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 고민, 갈등
그렇게 얼마나 피 냄새 나는 고기를 강가에 던져 넣기를 반복했을까. 상태 창에 떡하니 나타나 있던 불만이라는 단어가 드디어 사라졌다.
“블루곤.”
뽀그르르.
블루곤은 역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뽀얗게 올라온 물거품만이 대답 없는 블루곤의 존재를 알려주었을 뿐이었다.
“일이 많아서 늦었어. 그러니 너무 화내지 말라고. 앞으로는 꼬박꼬박 찾아올 테니까.”
말을 하면서도 김선혁은 어이가 없었다. 토라진 아이를 달래는 것도 아니고 거대한 괴수를 상대로 하는 말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나는 방법이 없었다.
“소, 돼지. 앞으로 마음껏 먹여줄게.”
골드레이크도 먹이로 꼬셨으니 블루곤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마지막으로 남겨두었던 고깃덩이를 던졌다.
덥석.
슬며시 수면을 뚫고 올라온 머리통이 고기를 날름 받아먹고는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어?”
그런데 그렇게 찰나 간 모습을 드러낸 블루곤의 머리통이 지나치게 거대했다. 망망대해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만큼은 아니어도, 자신을 따라나서며 쪼그라들었을 때보다는 몇 배 더 커다랬다.
김선혁은 금세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비대한 몸은 자아를 잃고 미물로 돌아갔을 때를 대비한 궁여지책이었다.’
블루곤은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이 자아를 잃고 미물로 변하는 상황을 피할 수 있게 되었노라 말했었다.
‘나를 데려가라. 아직 우리의 관계는 공고하지 않으니, 언제 다시 또 과거로 돌아가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또한 덧붙여 말하기를 아직 관계가 공고하지 않아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 또다시 자아가 불안정해질 수 있다 하였다.
결국은 괴수를 방치해둔 자신이 블루곤의 거대화를 부추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영지로 끌고 온 뒤로 방치해둔 채 먼 길을 다녀온 자신 탓에 블루곤은 계약자와 멀리 떨어져 자아가 불안정해졌고, 그 시간이 오래도록 지속되자 불안감을 느끼고 또다시 몸을 불려버린 것이었다.
“끙. 진짜 너 불안했구나.”
뒤늦게 미안함을 느낀 그는 한참이나 더 강가에 머물다 자리를 떴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자 곧장 또다시 블루곤을 찾았다.
뀌에에엑.
음머어어.
도축되지 않은 살아있는 소와 돼지가 강가에 처박혀 비명을 질러댔다. 블루곤이 금세 나타나 자신의 먹잇감을 냉큼 집어 삼켰다.
- 블루곤의 복종도가 1만큼 상승했습니다.
떨어질 대로 떨어진 복종도인지라 1이 올라봐야 아직도 한자리 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자신의 방법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그는 만족했다.
그 뒤로 김선혁은 시간이 날 때마다 계속해서 블루곤을 찾아 소와 돼지를 주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블루곤의 복종도는 30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수면 위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잘 해 보자고.”
이제야 겨우 토라진 블루곤의 마음이 풀렸나 싶어 그가 웃으며 말을 건넸더니, 기껏 모습을 드러냈던 블루곤이 다시 수면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아무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블루곤의 성격은 뒤끝이 길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했던 라인펄 강변의 모습이 어느 정도 복구가 된 것을 보아 하는 행동과는 달리 불만이 거의 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블루곤의 상태 창도 이제는 불만 대신 기대와 설렘 따위의 단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상태 창에 제 속마음이 고스란히 보이는 것도 모르고 블루곤은 그 이후로도 한참이나 항의 아닌 항의를 했다.
“밀당이냐.”
밀당 두 번 했다간 강 하나를 통째로 바싹 말려버릴 기세라, 그는 다시는 블루곤을 홀로 오래 방치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이제는 전쟁을 나가도 강이 있는 곳으로 골라 싸워야 할 판국이었다.
“오늘은 친구들이랑 놀아라.”
오늘도 어김없이 강가를 찾은 김선혁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고는 물의 정령들을 불러냈다.
‘더 자주 불러주세요.’
‘오랜만이에요. 주인님.’
오랜만에 소환된 중급 정령 이크람과 하급 정령 이즈디하르가 불평을 했다. 이크람은 열셋 정도로 물빛 투명한 몸만 제외하면 왕녀와 모든 것이 똑같았고, 이즈디하르는 그 동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더 작고 어려 보였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쌍둥이처럼 똑같은 모습이었다.
“어. 미안.”
어쩐지 물에 관계된 존재들이 유독 잘 토라지는 것 같다 느끼며 그가 적당히 두 정령을 달래주었다. 왕녀와 똑같은 모습을 한 정령들이 제 말 한마디에 웃고 토라지고 하는 게 영 기분이 묘했지만, 이미 아티야를 통해 단련이 된 그는 이내 그녀들을 편히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수룡(水龍)?’
언제 나타났는지 슬쩍 수면 위에 머리를 내밀고 이쪽을 힐끔거리는 블루곤을 발견한 정령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룡? 서펜트를 알아?”
김선혁은 세상사에 무지한 정령들이 블루곤을 알아본다는 사실에 놀라 되물었다. 정령들은 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강렬한 거부감을 표했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다. 둘 다 속성이 같으니 당연히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뜻밖에도 정령들은 블루곤을 향해 극도로 경계심을 보였다.
‘주인님. 저희 돌아갈래요!’
급기야 이즈디하르는 명령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남은 이크람도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표독한 얼굴로 블루곤을 노려보았다.
“왜 그래. 블루곤이 뭘 어쨌다고.”
‘폭군, 약탈자.’
이크람의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이크람이 짧게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저들은 세상의 법칙을 어그러트리는 끔찍한 존재, 정령을 잡아먹고 성장하는 끔찍한 악마들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면위로 머리만 내밀고 있던 블루곤의 상태가 돌변했다.
크르르르.
이를 드러내 보이며 서서히 이크람을 향해 다가서기 시작한 것이다.
- 식욕, 식욕, 식욕, 식욕, 식욕, 식욕, 식욕
갑작스레 변해버린 블루곤의 상태 창에 식욕이라는 단어가 폭주했다.
‘이 악마!’
이크람은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도 물러나지 않았고, 수면의 일부를 끌어다가 물빛의 창을 만들어냈다.
“멈춰!”
그저 속성이 같으니 통하는 면이 있겠지 하는 단순한 생각에서 벌인 일이 갑작스레 파국으로 치닫자 당황한 그가 이크람과 블루곤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크람! 돌아가!”
다급하게 외치니 창을 냅다 던져 블루곤에게 맞춘 이크람이 허공중에 흩어졌다.
크아아아!
이크람이 사라지고도 한참을 더 으르렁거리던 블루곤이 뭔가 못마땅한 듯, 포효를 내지르고는 물속 깊이 가라앉았다. 그리고는 다시 불러도 돌아오지 않았다.
- 아쉬움, 분노.
상태 창을 통해 블루곤이 이크람을 놓친 것에 대해 아쉬워하고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대체 정령과 괴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영지로 돌아간 그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곧장 이크람을 불러냈다.
“수룡에 대해 말해봐.”
‘우리는 아주 오랜 세월동안 수룡들과 싸워왔답니다.’
단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증오가 솟구쳤는지 이크람의 얼굴은 평소의 부드러운 미소는 온데간데없는 험악한 것이었다.
“수룡이 너희들을 먹고 성장하기 때문에?”
전쟁의 이유를 묻자 이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은 존재의 근원마저 먹어치우는 끔찍한 식성을 지닌 악마들이에요. 곁에 오래 두었다가는 저 아름다운 강마저 바싹 말라버리고 말 거예요.’
“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블루곤이 자신을 따라 나서던 그날 해주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수기(水氣)가 필요하니, 지금으로서는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이다.’
블루곤은 수기가 필요하다 말했고, 지금 이크람이 보이는 반응을 보면 그 수기라는 게 정령들과도 연관이 있는 게 틀림이 없었다.
“아….”
블루곤뿐만이 아니었다. 골드레이크 역시 지맥의 지기를 먹어치우며 성장했고, 그렇게 골드레이크가 식사를 마치고 난 뒤 땅은 퍼석퍼석 메말라 아무것도 자라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용의 아종이 자리를 잡은 곳은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심각하기만 한 이크람에 비해 김선혁의 표정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세상은 넓었고 주변을 파괴하는 게 비단 용의 아종뿐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이야말로 가장 탐욕스러운 존재, 누구보다 빠르게 주변을 파괴하는 족속들이었다.
저쪽 세상에서 그는 인간들이 어떻게 주변을 파괴하고 망치는지 질리도록 보고 겪었고, 그래서 정령의 말에도 큰 감흥이 없었다.
또한 이곳 세상에도 인간은 존재했으니, 새삼 블루곤과 용의 아종들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어디에 피해를 끼치냐가 문제겠네.”
그리고 그 역시 인간이었다.
**
정령을 통해 블루곤이 수기를 끔찍할 정도로 고갈시키는 괴물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김선혁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블루곤에게 소와 돼지를 제공했고, 복종도를 올리기 위해 강을 오갔다.
그렇게 용기병으로서의 의무에 열중하고, 한편으로는 영지에 자리를 잡은 아샤 트레일에게 부탁하여 영지의 병사들과 기병들이 검술 단련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영주의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했다.
“잭슨 해밀턴, 줄리앙 뱅키쉬. 이 둘은 최소한 견습기사의 자질이 있는 자들입니다.”
아샤 트레일은 며칠 만에 영지의 병사들 중 소질이 있는 자들을 골라냈고, 그중에는 잭슨과 줄리앙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들을 집중적으로 교육하여 그들이 검력을 깨달을 수 있게 만들겠다 말했고, 불과 얼마 가지 않아 첫 결실을 얻어냈다.
“오! 축하한다.”
“전부 영주님과 트레일 경이 잘 이끌어주신 덕입니다.”
잭슨이 검력을 깨달으며 견습기사로서의 기본을 다진 것이다. 그 전에도 기병으로서의 능력보다 하마하여 싸우는 것에 익숙했던 잭슨은 그 길로 견습기사로 완전히 전향했다. 백작의 위치에 오른 김선혁은 충분히 그런 잭슨을 이끌어줄 권위와 능력이 있었고, 잭슨은 빠르게 기본기를 다져갔다.
줄리앙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간 마땅한 스승이 없어 지지부진하게 멈춰있던 검술이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고, 이제는 언제 검력을 깨달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게 아샤 트레일이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제 밥값을 톡톡히 해냈고, 아리아 아이젠만이 유일하게 식충이로 남았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나사가 풀린 듯한 아리아 아이젠은 그런 자신의 처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개인의 발전에만 신경을 썼다.
끔찍할 정도로 효율을 중시하는 안토인 몽테뉴는 당연하게도 이 이기적인 마법사를 못마땅해 했다. 영지의 운영과 발전에는 조금도 기여하지 않으면서도 유지비는 가장 많이 소모되니 영지 운영을 책임지는 안토인 몽테뉴가 그녀를 마뜩잖게 여기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뭔가 할 일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간 이런저런 일에 치여 아리아 아이젠까지 신경 쓰지 못했던 김선혁으로서도 기껏 어렵사리 초빙해온 마법사가 돈만 축내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생각해둔 게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리아 아이젠에게 일을 주기로 결정했고, 그녀를 호출했다. 하지만 그녀는 영주의 호출마저 무시할 정도로 마법 연구에 몰두해 있었고, 그는 결국 직접 그녀를 찾아 나서야 했다.
“아이젠 경.”
문밖까지 풍겨져 나오는 정체 모를 악취에 인상을 찌푸린 그가 몇 번 문을 두들겨보다 벌컥 문고리를 돌렸다.
“아이젠 경.”
문 너머로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조물조물 만지는 아리아 아이젠의 궁상맞은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끊임없이 뭔가를 중얼거리며, 손을 놀려댔는데 영주가 연구실에 들어왔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음.”
대체 뭘 하길래 이리도 집중을 했나 싶어 그는 방해가 되지 않게 소리 없이 잰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