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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 마법사와 기사, 그리고 정령사 (3)
“이거 너무 과하게 선심을 쓰는 거 아닌가.”
이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자신에게 닥쳐올 크나큰 불행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는지, 정령사는 여유작작한 얼굴이었다.
“50골드면 정말 되겠는가? 손해가 클 텐데.”
“잠깐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니, 그런 걱정일랑 하지 마십시오.”
“부디 후회하지 말게.”
김선혁은 그런 정령사를 보며 몇 번이고 후회하지 말라며 당부를 했다. 정령사는 그의 말에 표 나지 않게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런 여유도 오래 가지 않았다.
“어?”
정령사가 얼빠진 소리를 내뱉은 것과 정령이 머릿속으로 말을 걸어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저와 함께 하고 싶으신가요?’
“네 이름은?”
아티야의 싱그러운 음성과는 달리 차분하고도 부드러운 음성에 그가 웃으며 이름을 물었다.
‘이크람이에요. 주인님.’
- 중급 물의 정령 이크람(Ikram)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목소리만 듣고 덜컥 계약을 맺고 보니, 상대가 하급 정령도 아닌 중급 정령이었다. 그로서는 뜻하지 않게 중급 정령을 손에 넣은 것이다.
“안 돼에에에!”
뒤늦게 이변을 알아차린 정령사가 혼비백산해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기존의 계약은 파기되었고, 이크람은 새로운 주인과 계약을 맺고 난 뒤였다.
“이크람! 이크라암!”
필시 공들여 성장시켰을 게 뻔한 중급 정령의 이름을 미친 사람처럼 불러보았지만, 새로운 주인을 받아들인 이크람은 대답도 없이 사라졌다. 아마 다시 나타났을 때는 새 주인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저는 그녀처럼 강력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래도 데려가주실 수 없나요?’
“이름이 뭐지?”
‘제 이름은 이즈디하르(Izdihar). 언제든 불러주세요.’
정령사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중급 정령과 계약을 맺은 그의 눈치를 살피던 하급 정령 하나가 눈치를 보다 계약 의사를 전해온 것이다. 그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또 하나의 정령이 그의 휘하에 들어왔다.
“이익!”
뒤늦게 정령사가 휘하의 정령들을 역소환 했다. 하지만 상급 정령 하나가 여전히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돌아가! 돌아가라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치는 자신의 주인을 힐끔 바라본 상급 정령이 투명한 눈동자로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도 관심이 있나?”
상급 정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간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드, 드라흔 백작님. 백작님! 제발. 제발 저 아이만큼은.”
정령 강탈이라는 이 듣도 보도 못한 기사(奇事)에 완전히 정신을 놓은 정령사가 뒤늦게 그에게 매달렸다. 이 모든 상황의 주체가 그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저 아이만큼은 안 됩니다. 저 아이를 상급까지 성장시키기 위해 저는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발….”
눈물까지 흘려대는 정령사의 모습을 본 김선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라고 해서 상급 정령이 탐이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가 평생을 바쳐 일구어놓은 재산마저 강탈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였다.
“너도 주인이 마음에 걸리는 거지?”
끄덕.
상급 정령이 처음으로 자신의 뜻을 표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상급 정령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50골드의 대가라면 이미 넘치도록 받은 상황에서 상급 정령까지 바라는 건 과욕이었다.
“의리 있네.”
갈등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그는 이내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는 정령에게 말했다.
“돌아가. 나도 너까지 계약할 생각은 없어.”
그 말에 상급 정령이 홀가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허공중으로 흩어졌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백작님.”
긴장이 풀렸는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정령사가 몇 번이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둘씩이나 되는 정령에게 계약 해지를 당한 사실 따위는 이미 머릿속에서 싹 사라진 듯한 모습이었다.
“줄리앙.”
그의 부름에 줄리앙이 나섰다. 품에서 50골드에 해당하는 금화가 들어있는 주머니를 꺼낸 그녀가 정령사에게 주머니를 넘겨주었다.
“받지 않겠습니다.”
정령사는 상급 정령을 거두어가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할 뿐이라며, 한사코 돈을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린 종자는 자신의 주인이 다른 이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아간 파렴치한이 되게 둘 수는 없다며 기어이 값을 치렀다.
“오늘의 대가가 모자라다 생각하면 언제고 나를 찾게. 당분간은 왕성에서 지낼 생각이니까.”
김선혁은 중급 정령의 값은 따로 치를 용의가 있다며 정령사에게 몇 번이고 자신을 찾으라 당부하고는 자리를 떴다.
**
“음.”
정령사와 헤어진 김선혁은 한적한 곳에 서서 잠시 고민을 해보았다. 정령의 달라진 모습이 궁금하면서도 또 이번에는 누구를 쏙 빼닮은 정령이 탄생할지 몰라 걱정이 되었던 탓이다.
“이크람. 이즈디하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생 소환하지 않을 수도 없었던지라 그는 단단히 각오를 하고 정령을 소환했다. 정령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지 간에 놀라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다.
“이런 망할….”
하지만 정령들의 새로운 모습은 언제나 그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새롭게 계약을 맺은 물의 정령들은 절대로 닮아서는 안 될 존재를 닮아 있었다.
짧은 팔과 다리, 앳되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품이 있는 얼굴, 이크람과 이즈디하르는 왕녀 오필리아를 쏙 빼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돌아가. 어서.”
누가 볼 새라 소환을 해제하니 정령들이 입을 내밀고 불만에 찬 얼굴을 해 보였다. 하지만 정령들의 기분을 맞춰주다가는 자신이 왕족 모독죄로 사형을 당할 판국이었다.
“빨리.”
‘또 불러줘요. 다음에는 더 길게!’
‘또 봐요!’
주인의 속도 모르고 조잘조잘 떠들어대던 정령들이 사라졌다.
“미치겠네.”
기껏 계약을 맺은 정령들이 하필이면 왕녀의 모습과 닮았다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래서야 딱 오해 받기 좋은 상황이라 그는 이 처치곤란의 정령들을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절대로 아무도 보여주지 말아야겠군.”
결국 왕도에 머무는 동안은 어떤 일이 있어도 새 정령들을 소환하지 않을 것을 다짐해야 했다.
**
공교롭게도 물의 정령과 계약을 한 다음날이 왕녀와 약속한 골드레이크의 시승식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왕녀를 대하는 게 편할 리가 없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왕녀의 눈치를 불 수 밖에 없었다.
그 탓인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지경이었고, 나중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특제 안장에 올라탄 왕녀와 자신을 수많은 왕실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좋구나! 좋아! 그대는 이리 높은 곳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싸웠구나. 가히 일국의 장군과도 같은 위엄이로다!”
왕녀는 골드레이크가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연신 탄성을 토해냈다. 그간 보여주었던 위엄도 체면도 온데간데없는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다.
“그, 그렇습니까?”
“그대는 그리 긴장하지 않아도 되느니, 혹여 내가 떨어지기라도 할까봐 그리도 걱정하는 것인가. 보아라. 트레일 경이 나를 이리도 꽉 잡고 있지 않느냐!”
왕녀와 그 단 둘이 포악한 괴수 위에 태우는 것은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레인하르트 후작은 왕가 수호대의 임무에서 배제된 아샤 트레일을 한시적으로 임무에 복귀시켜 시승을 함께 하도록 했다.
덕분에 단 한 명뿐인 기수를 위해 제작된 좁은 안장 위에 왕녀와 아샤 트레일이 올라타고 그 뒤로 그가 끼어 앉는 형태가 되었다.
물론 중무장을 한 기사를 붙어 앉아봤자 느껴지는 것이라고 해봐야 단단한 철제 갑옷의 차가움뿐이었지만, 자세가 민망한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백작께서 떨어지면, 왕녀께서도 위험합니다.”
억지로 몸을 빼다보니 자세가 어정쩡해졌다. 그리고 아샤 트레일은 그런 그를 두고 보지 않았다. 어설프게 자리를 잡은 그의 손을 쭉 잡아끌었다.
“헙.”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무게 중심을 앞으로 쏠려나가며 영락없이 아샤 트레일을 끌어안는 자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들이킨 숨 한 줌에 왕녀의 것인지 아샤 트레일의 것인지 모를 달콤한 향이 풍겨져 왔다.
“질주하는 골디의 모습이 그리 장관이라고 들었노라. 어디 나 또한 이를 느껴볼 수 있겠는가.”
왕녀의 말에 그가 진땀을 흘리며 레인하르트 후작을 바라보았다.
“너무 위험합니다. 이 정도로 만족하시고, 이만 내려오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후작의 말이 이렇게 반가운 적이 있었을까. 단언컨대 절대로 없었다. 김선혁은 후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골드레이크를 바닥에 엎드리게 만들었다.
“아쉽구나. 아쉬워. 내 언제 또 이렇게 골디의 등에 오를지, 오늘이 너무 아쉽도다.”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골드레이크의 곁에 이동식 계단을 붙였다.
“허나 내 욕심을 채우자니 볕 아래 고생하는 이들의 눈에 밟히는구나.”
왕녀는 아쉬운 얼굴로 푸념을 하고는 아샤 트레일의 손에 이끌려 좁은 안장에서 내렸다. 다른 기사들이 순식간에 들러붙어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하고, 그 사이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수고했노라. 드라흔 백작 덕분에 내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했구나. 언제고 오늘의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겠노라.”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한 왕녀가 몇 번이나 칭찬을 해주고는 종종거리며 기사들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왕녀께서 성으로 돌아가신다! 대열을 갖추고 사방을 경계하라!”
왕녀가 마차에 오르고, 수호대가 물 샐 틈 없이 그 주변을 둘러쌌다. 그리고 질서정연하게 왕성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도 이내 골드레이크를 중부군의 요새에 다시 맡기고는 털레털레 왕성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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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혁이 왕도에 도착한 지도 어언 2주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고 녹테인의 협상단과 아덴버그의 관료들은 전후 협상 막바지 과정에 거의 이른 상태였다.
“어디까지나 성의 문제요. 성의. 귀국이 피해를 입은 것처럼 말하지만, 따지고 들면 이 모든 일의 원인은 귀국에서 시작된 것이니, 이로 인해 아국이 입은 모든 피해를 보상해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소?”
격렬한 듯 보여도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아덴버그 왕국 측이었다.
“먼저 말한 조건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포로들은 몰라도 칼스테인 요새의 반환만큼은 장담할 수가 없소이다.”
시종일관 여유가 넘치는 아덴버그의 관료들과는 달리 아슈테인 후작과 협상단은 영 맥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저 어떻게든 아덴버그가 조건으로 제시한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마지막까지 조금이라도 낮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덴버그의 관료들은 한 번 손에 쥔 주도권을 절대로 놓지 않았다.
“지치는군.”
“몸도 온전치 못한데 잠시 쉬시겠소? 그러다 상처가 다시 도질까 염려가 된다오. 그리고 솔직히 방금 전부터 후작의 발음을 영 알아듣기가 어려웠던 차였소. 잠시 쉬었다 다시 시작하도록 합시다.”
아슈테인 후작이 입은 상처라고 해봐야 기마 이동 중에 혀를 깨물어 입은 상처밖에 없었다. 그 노골적인 조롱에도 녹테인의 협상단은 반박조차 하지 못했다.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아슈테인 후작이 반박하는 대신 수치심에 입을 다문 것이다.
칼 없는 전장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살벌한 협상에서 그렇게 어이 없이 기세가 눌리자, 가뜩이나 불리한 입장이었던 녹테인은 별다른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휴식할 거 없소. 그냥 이 자리에서 결과를 냅시다. 어차피 이번 협상에서 아국이 손해를 피할 수는 없으니, 귀국의 조건을 전부 수용하도록 하겠소.”
결국 교활한 후작마저도 입담을 자랑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백기를 들어야 했다.
“그것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요. 후작과 녹테인의 결단이 더 큰 희생을 막은 게요.”
길고 지루한 협상, 하지만 애초부터 승자는 정해져 있었다. 아덴버그의 관료들은 그다지 기뻐하는 기색도 없이 상투적으로 후작의 결단을 추켜 세워주었다.
“대신 아덴버그에서도 우리의 조건을 들어줄지 말지에 대해 대답을 하시오. 그 가부에 따라 어쩌면 나는 말을 번복할 수도 있소.”
“조건이라면….”
“드레이크 나이트의 자유로운 참전을 제한하는 것 말이외다.”
아슈테인 후작의 독기 가득한 음성에 대답한 것은 관료들이 아니었다.
“그 조건이라면 내가 대신 대답하도록 하지.”
“아덴버그의 온당한 지배자, 누구보다 존귀하고 현명하신 테오도르 티베리우스 로 아데스덴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갑작스러운 테오도르 국왕의 등장에 아덴버그의 관료들이 분분이 일어나 예를 표했다. 아슈테인 후작 역시 상대국의 수장에 대한 예의로 가볍게 무릎을 꿇어 보였다.
“그대들이 원하는 것은 드레이크 나이트, 드라흔 백작이 다시는 귀국의 국경에서 일어나는 분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렷다.”
“그러합니다.”
다소 꼿꼿한 대답에 관료들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후작을 노려보았지만, 그야말로 최소한의 예의를 차린 것만으로도 할 도리를 다 했다는 듯 후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대들이 제시한 조건은.”
테오도르 국왕은 그런 후작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