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97화 (97/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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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 마법사와 기사, 그리고 정령사 (2)

“마법사란 족속들이 워낙에 성질이 괴팍해서, 그나마 사람 같은 건 이 사람뿐이에요.”

신랄한 안유정의 말에 김선혁은 그녀가 지우고 남은 목록을 살펴보았다.

‘왕실 마법사단 소속, 선임 마법사, 아리아 아이젠, 그라두스 98위.’

“크실 아르카인은 실력은 괜찮은데 성격이 개차반이라, 왕실 마법사단장조차도 포기한 인간 말종이죠. 제이크 프라드무어는 성격도 무난하고 실력도 있다고 평이 좋긴 한데, 금기(禁忌) 마법을 익혔다는 소문이 있어요. 만약 소문이 사실이라면 영지에 데려갈 경우, 달마다 실종된 영지민에 대한 보고를 들어야 할지도 몰라요.”

그런 그를 보며 안유정이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진짜 마법사’라고 할 수 있는 종자 중에 정상적인 인간은 없어요. 미치지 않으면 마법사가 될 수 없고, 드물게 미치지 않은 사람이 마법사가 되더라도 금방 미치게 마련이니까요.”

가만히 듣고 있다가는 뭔가 마법사라는 족속들에 대해 선입견마저 생길 지경이었다. 이쯤 되면 그녀가 마법사들에 대해 원한이 있다고 해도 믿어질 정도였으니, 그만큼 그녀의 말은 신랄했고, 신경질적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중에 한 명은 있겠지요. 정상적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죠. 하지만 적어도 왕실 마법사단의 마법사들 중에는 없을 거라 장담해요.”

안유정은 미친 건 모두 매한가지고, 단지 곱게 미쳤는지, 아닌지의 차이일 뿐이라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럼 저는 아리아 아이젠이 곱게 미친 사람이길 바라야겠군요.”

김선혁의 말에 그녀가 피식 웃고는 화제를 전환했다.

“정보를 드렸으니, 계산을 해야죠?”

“끙. 바라는 게 따로 있습니까?”

정보라고 해봐야 마법사들이 전부 미친놈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밖에 없었지만, 이제 와서 말을 물릴 수는 없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바가지는 사양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보의 가치를 상회하는 값을 치를 생각은 없었던지라 그가 선을 그으니, 안유정이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을 뭘로 보고.”

다행스럽게도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정보가 그다지 가치가 있다 여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당장은 생각나는 게 없군요. 나중에 생각나면 따로 연락하도록 할게요.”

슬슬 속성 지배력의 영향이 느껴지는지 그녀가 다소 부자연스러운 얼굴로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끙. 마법사 대신 기사를 한 명 더 달라고 할까.”

안유정이 하도 겁을 주고 갔던지라, 지레 겁을 먹은 그가 마법사를 포기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태풍에 무너진 목책을 순식간에 복구해내던 마법의 효용이 자꾸만 눈에 밟혀 그러지도 못했다.

결국 그는 직접 아리아 아이젠을 만나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입하기 위해 들러붙는 이들 탓에 넌덜머리를 쳤던 자신이 이제는 다른 이를 영입하기 위해 발품을 팔아야 하게 생겼다는 사실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

아리아 아이젠을 영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전령을 통해 만나기를 원한다는 의사를 전했지만, 대답조차 들을 수 없었다. 몇 차례 연락 끝에 어렵사리 받은 답도 연구로 바쁘니 만날 수 없다는 거절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왕실 마법사단의 부단장과 따로 만남을 가졌다. 다행스럽게도 부단장은 다분히 정치적인 인물이었고 근래 들어 가장 큰 명성을 얻은 김선혁과의 만남을 거부하지 않았다.

“흠. 근래 들어 백작께서 마법사단의 마법사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혹시 오늘의 자리도 그와 관련된 것인지요?”

적당히 예의를 갖춘 인사와 사담이 오고 가고, 부단장이 방문 목적을 물었다. 그는 솔직하게 자신의 상황을 알려주고 부단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제가 아이젠 경과 다른 마법사들의 만남을 주선하겠습니다.”

물론 부단장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이렇게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부단장은 계산에 철저한 성격이었고, 왕실 마법사단의 인재를 빼가는 대가로 골드레이크의 비늘을 요구했다. 탈피를 수시로 하는 골드레이크이니만큼 그간 모아둔 비늘이 적지 않았던 그는 흔쾌히 그 제안을 수락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백작님도 그라두스인지 뭔지 그 허무맹랑한 걸 믿는 건 아니시겠지요? 기사라면 모를까 마법사에 관해서만큼은 그만큼 우스운 것도 없습니다.”

부단장은 마법사들이 기사들과는 달리 호승심이나 이름을 알리는 데에 대한 욕심이 없다며, 마법사의 순위를 매긴다는 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짓인지를 한참이나 열변을 토했다.

“그라두스가 없다고 해서 그들의 마법적인 재능을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한참을 떠들던 부단장은 실력 있는 마법사들 중 상당수가 연구와 실험에 매진하느라 그라두스는커녕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실정이라며 편견을 갖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음….”

부단장의 호출을 받은 마법사들이 차례로 부단장실을 찾아왔다. 그렇게 만나본 마법사들은 왜 안유정이 마법사라면 그렇게 넌덜머리를 쳤는지 알게 해주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괴팍한 성격에 안하무인이었다. 부단장에게 딱, 필요한 말만 하고는 곁에 있는 손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좋게 말하면 마법에만 일로매진하는 모습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사회성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먼저 만나본 자들 중에 마음에 차는 이가 있으셨는지요?”

“아이젠 경을 만나보도록 하죠.”

그의 말에 그럴 줄 알았다며 부단장이 아리아 아이젠을 호출했다. 그녀는 여느 마법사들처럼 부단장이 호출을 하고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모습이 이제껏 만나보았던 마법사들 중에 가장 심각했다.

대체 뭘 하다 온 것인지 마법사 특유의 로브는 너덜너덜 때가 꼬질꼬질 묻어 있었고, 금발 머리는 잔뜩 떡이 져 엉망진창으로 엉켜있었다. 마치 한 달은 씻지 않은 듯한 모습, 그가 난감한 얼굴로 헛기침을 하니 아리아 아이젠이 흐리멍덩한 시선을 보내왔다.

꾸벅.

왕국의 당당한 백작에게 하는 인사 치고는 지나치게 무례했지만, 아예 본 척도 하지 않던 다른 마법사들에 비하면 훨씬 나은 반응이었다.

“보시다시피 다른 이들에 비하면 아이젠 경의 상태가 그나마 나은 편입니다….”

부단장이 민망한 얼굴로 다른 이들을 더 보아도 달라질 것은 없노라 한마디를 덧붙였다. 김선혁이 보기에도 마법사들의 상태가 하나같이 심각했던지라 잠시 고민하다 이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아이젠 경. 제안할 것이 있습니다.”

그는 아리아 아이젠을 영지로 데려가기로 마음먹고는 차분히 자신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생각하냐니요?”

“제 제안 말입니다.”

“뭐라고 제안하셨는데요?”

“…….”

그런데 아리아 아이젠은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주의가 어찌나 산만한지 대화를 하면서도 신경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었고, 김선혁은 했던 말을 하고 또 하고 수차례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고민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을 면전에 두고 다른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쯤 되면 성격이 어지간히 대범한 그라고 해도 황당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이젠 경.”

“아, 부단장님. 안녕하세요.”

내내 자리에 동석해 있던 부단장을 이제야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인사를 건네는 그녀의 모습에 김선혁은 질끈 눈을 감았다.

“끙. 이만 돌아가 보게. 따로 연락을 주도록 하지.”

부단장의 말에 그녀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너덜너덜한 로브를 휘날리며 문 너머로 사라졌다.

그녀가 활짝 열어 젖혀놓고 간 부단장실의 문을 닫으며 부단장이 변명처럼 한마디를 남겼다.

“죄송합니다. 원래 마법이라는 학문이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리는지라 아무래도 저 무렵의 마법사들은 사회성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부단장님께서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진심 어린 그의 위로에 부단장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어차피 오십보백보입니다. 그러니 고민하셔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겁니다.”

이쯤 되니 부단장이 마법사단의 골칫덩이 중 하나를 슬쩍 떠넘기려는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끙. 아이젠 경으로 하지요.”

“그럼 제가 발 벗고 나서서 아이젠 경을 설득해보겠습니다. 물론 왕실의 마법사를 빼가는 것이니 백작께서 왕녀께 미리 말씀을 드려야겠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아리아 아이젠을 데려가겠다는 그의 말에 부단장의 표정이 저렇게 밝아질 리가 없었다. 마치 짐덩이라도 치우듯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하는 부단장을 보며 그는 자리를 나서는 내내 고민해야 했다.

“그래도 마법산데 제 몫은 하겠지.”

그나마 아리아 아이젠의 성격이 나빠 보이지 않는다는 걸 위안 삼으며 그가 왕실 마법사단의 거처를 나섰다.

“아리아 아이젠은 생각하던 대로의 인재였습니까?”

“모르겠다. 내가 잘하는 짓인지.”

짧은 시간동안 피로가 가득 쌓인 그의 얼굴을 보던 줄리앙이 언뜻 호기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인내심 강한 그녀답게 금세 호기심을 누르고 다음 일정을 안내해 주었다.

“시간이 생각보다 지체되었습니다. 위치가 위치이니만큼 조금 늦는 건 흠이 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너무 늦으면 상대가 앙심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서두르시지요.”

하필이면 오늘 정령사와의 약속까지 겹쳐버렸다. 정신 나간 마법사들을 벌써 몇 명이나 만났던지라 잔뜩 지친 그였지만, 겨우 잡은 정령사와 만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정령사는 좀 정상적이기를 바라야겠네.”

“제가 만나본 바로는 조금 까탈스럽긴 했지만 대하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마법사들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줄리앙의 위로 아닌 위로를 받으며 그는 서둘러 약속 장소로 향했다.

**

왕도 밖에서 만난 물의 정령사는 부드러운 인상의 중년 남성이었다. 정령사라는 자신의 직업에 꽤나 자부심이 있어 보였지만, 왕국의 백작을 상대로 그 자존심을 함부로 드러내보이지는 않는 처세술 정도는 있었다.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런 물의 정령사가 표정관리도 하지 못한 채, 이건 또 무슨 미친 소리냐는 듯한 눈빛으로 김선혁을 바라보았다.

“백작님께서는 귀하의 하급 정령 하나를 구매할 의사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군요.”

이제 정령사는 그가 미친놈이라고 확신하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이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척 보기에도 이 미친놈을 어떻게 돌려보내야 뒤탈이 없을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일단 가격을 제시하고, 정령만 소환한다면 나머지는 백작님께서 알아서 하실 겁니다. 그러니 귀하께서는 팔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가부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줄리앙의 또박또박한 목소리에 정령사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뭐, 딱 50골드만 받겠습니다. 물론 물건은 알아서 수령하셔야겠지요.”

50골드라면 혈통 좋은 전마 한 필을 구입하거나, 정예 기병 둘을 1년간 영지에 고용할 수 있는 큰돈이었다. 허황된 요구의 대가로는 지나친 대가, 하지만 정령사는 실제로 그 돈을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저 이 정도 가격을 부르면 그가 지레 포기할 거라 여겼던 모양이다.

“좋소. 어디 한번 소환해보시오.”

하지만 김선혁의 입장에서는 정령만 얻을 수 있다면 50골드가 아니라 100골드라도 치를 용의가 있었다. 선뜻 제안을 받아들이니 이번에는 정령사가 당황한 얼굴을 해보였다.

“내가 실패하든 말든, 귀하에게 책임을 떠넘길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고 소환이나 해보시오.”

“정말로 무르기 없습니다.”

정령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의 정령들을 불렀다.

“기왕 부르는 거, 하급 말고 중급과 상급의 아이들도 불렀습니다. 희귀한 상급 정령까지 봤으니 50골드의 대가가 크게 손해 보는 건 아니실 겁니다.”

정령사는 당연히 이 허황된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 여겼고, 좋은 구경이라도 시켜주어 상대가 이 일로 원망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를 바라는 눈치였다. 제 딴에는 선심을 쓴다고 제 휘하의 정령들을 일시에 모두 소환한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정령사의 실수였다. 정령의 냄새를 통해 상대가 정령과 관계가 있음은 진즉에 눈치챈 듯 보였지만, 그 뒤에 있는 사정까지 짐작하지 못한 것이 바로 정령사의 가장 큰 실수였다.

팟.

정령사가 소환한 정령들이 일시에 김선혁을 쳐다보았다.

“호오.”

벌써부터 입질이 오는지 몸을 움찔거리는 몇몇 정령들의 모습이 마치 종합 선물세트라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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