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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7. 마법사와 기사, 그리고 정령사 (1)
한창 눈을 빛내고 있던 왕녀도, 당사자인 아샤 트레일도 그대로 멈춰 버렸다. 뭔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분위기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김선혁은 뒤늦게 자신의 말이 다소 이상하게 전달되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제가 아는 한 가장 유능하고 기사다운 성품을 지닌 기사는 트레일 경입니다. 다른 기사들도 실력이야 당연히 출중하겠지만, 그 궁합이 저와 맞을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대의 말은 트레일 경과는 궁합이 잘 맞는다는 소리로구나.”
왕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단지 방금 전까지의 왕녀가 유독 신이 나 있었던 것뿐이다. 그 때문인지 그 간극이 심각할 정도로 와 닿았다.
침묵이 내려앉고,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묘하게 무거워졌다. 김선혁은 괜스레 마른 침을 삼키며 왕녀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아끼는 기사를 달라 하여 기분이 상한 것일까. 그도 아니면 이제 갓 백작에 오른 주제에 상급 기사 씩이나 되는 인재를 달라 한 것이 주제넘게 느껴진 것일까.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이 있다면 왕녀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는 것뿐이었다.
“먼저 트레일 경의 의사를 듣는 것이 우선이리라.”
이제 바통은 왕녀에게서 아샤 트레일에게 넘어갔다. 김선혁이 왕녀의 눈치를 살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왕족의 생명을 제 생명처럼 여기며 헌신하는 왕실 기사단 소속이니 만큼 왕녀의 체면이 상하는 일이 생기게 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마조마한 심정이 드는 것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기껏 그녀를 염두에 두고 소원 찬스까지 썼는데, 당사자가 거부하면 소중한 소원 찬스만 날리는 꼴이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다행스럽게도 아샤 트레일은 왕녀의 결정을 따르겠노라며 그 어떤 거부감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원치 않으면 내 곁에 남겠다는 뜻이렷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왕녀가 엉뚱한 말을 했다. 평소 왕실의 위엄과 체면을 생각해 말 한마디에도 천금과도 같은 무게를 두었던 왕녀가 어쩐 일인지 대답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왕녀께서 원하신다면….”
아샤 트레일이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반복하자, 왕녀가 고민을 시작했다. 대체 얼마나 아샤 트레일을 아끼길래 왕족의 약속을 두고 저리 저울질을 하는지, 그는 뒤늦게 다른 이를 선택해야 했나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는 아샤 트레일을 원했다. 그녀는 그라두스 46위에 빛나는 존재이며 진중한 성품과 유능함으로 주변에 정평이 난 기사였고, 직접 겪어 본 바 주변의 평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이제 왕녀는 내적 갈등이 외면에 보일 정도로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뭔가 못마땅한 듯 이쪽을 바라보다 다시 또 아샤 트레일을 보기도 하고, 짧은 시간 동안 표정이 수도 없이 변했다.
하지만 결국 왕녀는 결정을 내렸다.
“왕족의 말은 천금과도 같은 것, 쉽게 앞뒤를 바꾸어서야 누가 그 말을 믿고 따르겠는가. 그대의 청은 이루어지리라.”
원하던 것은 이루어졌지만, 김선혁은 결코 좋아할 수 없었다. 왕녀의 표정이 여전히 떨떠름했던 탓이다.
“트레일 경은 오늘 이후로 왕가 수호대의 임무에서 손을 떼도록 하라. 정리할 것이 있다면 미리 정리하여 드라흔 백작의 귀환 일정에 맞추어 움직일 수 있도록 하라.”
아무리 자신이 아샤 트레일을 달라고 했다고, 설마 이렇게까지 즉각적으로 조치를 취할 줄은 몰랐던 김선혁은 왕녀의 전격적인 결정에 놀라고 말았다.
“트레일 경의 빈자리는 레인하르트 후작과 상의하여 수호대에서 적당한 인사를 취하도록 하여라. 다만 수호대는 내가 트레일 경의 빈자리를 느낄 수 없도록 인선에 만전을 기하라.”
그런데 어쩐지 시원시원하기까지 한 왕녀의 결정이 마음에 걸렸다. 꼭 심통이 난 아이가 다 필요 없다고 아끼던 물건을 죄다 집어던지는 것처럼 보였던 탓이다.
끙. 그 정도로 트레일 경을 아꼈나.
“트레일 경이 자주 왕도를 찾을 수 있도록 배려하도록 하겠습니다.”
뒤늦게 왕녀의 기분을 달랜다고 이야기를 해보았지만, 토라진 왕녀는 좀처럼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살짝 고개를 돌린 채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는 왕녀의 모습이 이대로 돌아갔다가는 그간 쌓아온 좋은 관계가 다 허사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 정도였다.
결국 김선혁은 아껴두었던 비장의 수를 꺼내보았다.
“날이 참 화창합니다. 이런 날 골드레이크를 타고 달리면 꽤나 기분이 상쾌하지요.”
왕녀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은 얼굴을 해 보이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골드레이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귀를 쫑긋 세웠다. 왕녀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왕녀께서도 그런 기분을 느껴보시면 참 기분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왕녀의 눈빛이 변했다. 착, 하고 가라앉아있던 눈동자가 별처럼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혹시 왕녀께서 원하신다면….”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한 왕녀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끼를 물었다.
“오오! 원하다 마다!”
미끼를 물고 좋아서 짧은 손발을 파닥거리는 왕녀를 보며, 김선혁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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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기사단에 들어오라니까, 도리어 왕실 기사단의 인재를 빼가는구나.”
벌써 보고를 받은 것인지 사라졌던 레인하르트 후작이 나타나 불평을 했다. 지은 죄가 있는지라 김선혁은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피해야 했다.
“왕가의 후광을 눈 똑바로 뜨고 마주 볼 수 있는 기사는 수호대에도 많지 않다. 그렇기에 왕녀께서도 트레일 경을 몹시 아끼셨지.”
후작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이미 오늘 왕가의 체면과 아샤 트레일을 두고 고민하는 것을 보고 왕녀가 얼마나 그녀를 아끼는지 실감한 차였다.
“덕분에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온다. 트레일 경을 대신할 만한 실력자이면서 왕녀의 말 상대를 해줄 정도로 담대한 자를 찾아야 하니까.”
“수호대의 기사들이 상관의 눈치를 보는 자들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불평과는 달리 수호대에 인재가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의 말에 후작이 혀를 차며 대답했다.
“쯧. 아데스덴의 피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왕녀께서 어리다고 하여, 편히 대했다가는 언젠가 왜 아데스덴의 이름 아래 수많은 귀족들이 납작 엎드리게 됐는지, 너 또한 실감하게 될 것이다.”
후작은 상관도 상관 나름이라며 한참이나 타박을 하고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덕분에 귀찮은 일을 떠안게 됐어. 트레일 경의 후임을 결정하는 것도 골치 아픈데, 괴수의 시승을 제안하다니. 네가 벌인 일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바빠졌는지 알기나 하는 게냐.”
정작 그렇게 말하는 후작이야말로 바쁜 일 제쳐두고 여기 와서 불평이나 하고 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김선혁은 굳이 그런 사실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어쨌건 왕녀께서 괴수를 시승하시는 건, 3일 뒤다. 준비가 끝이 나면 알려줄 터이니, 혹시라도 왕녀의 옥체에 터럭만 한 흠이 생기는 일이 없도록 해라.”
“예이. 여부가 있겠습니까.”
김선혁의 성의 없는 대답에 레인하르트 후작이 눈을 부릅떴다가 금세 한숨을 내쉬며 표정을 풀었다.
태도를 꼬집어 잔소리를 하자니, 자신부터 법도를 따라야 할 판이라 차라리 서로 편하게 대하는 쪽을 선택한 듯한 눈치였다.
“그럼 그날 보도록 하지.”
“살펴 가십시오.”
마지막만큼은 연장자, 상급자를 대하듯 깍듯이 인사를 한 김선혁이 내성을 힐끗 돌아보고는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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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일 경도 알고 있었는가.”
“전혀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그토록이나 어여삐 여기던 괴수를 타볼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에 기분이 많이 풀린 것인지, 다행스럽게도 왕녀의 표정은 비교적 평온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아샤 트레일의 대답은 똑같았을 것이다.
정말로 드라흔 백작이 자신을 지목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이제 와서 새삼 거짓을 고할 이유가 없었다.
“만약 그대가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했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지 궁금하구나. 드라흔 백작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왕도를 떠났을지, 그도 아니면 왕도에 남는 것을 선택했을지 어디 솔직하게 말해 보거라.”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왕녀의 이번 질문은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하여 대답을 드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과연 트레일 경이구나. 다른 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기꺼이 내 곁에 남겠노라 답했으리라.”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대해 확답을 하는 것만큼 경솔한 행동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내가 어리석었군. 허나 나는 여전히 그대의 결정이 궁금하도다. 그대가 과연 어떤 결정을 내렸을지, 알고 싶구나. 그대는 지금부터라도 고민하여 왕도를 떠나기 전까지 답을 생각해두어라.”
차라리 집요할 정도로 캐묻는 왕녀의 태도가 아끼던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문제는 그 장난감이라는 게 자신인지 드라흔 백작인지가 모호했다는 게 문제였다.
“왜인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녀는 의문을 속에 담아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만약 다른 이였다면 이리 집요하게 묻지 않았을 것이니라. 하지만 트레일 경이기에, 그대가 거짓을 고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에 묻는 것이다.”
그렇게 말한 왕녀가 똑바로 시선을 보내왔다. 그런데 그 투명한 눈빛이 어린아이의 그것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심유하고 속을 알 수가 없었다.
“트레일 경은 단지 소속이 왕실 기사단 소속이기에 왕실의 기사인가. 내 곁에 있기 때문에 나의 기사인가.”
착, 하고 가라앉은 음성에 서린 위엄이 마치 테오도르 국왕을 쏙 빼닮았다. 아샤 트레일은 저도 모르게 자세를 정돈하고는 왕녀에게 무릎을 꿇었다.
“왕도가 아닌 곳에서의 그대는 어떤가. 그래도 여전히 왕실의 기사이고, 나의 기사인가.”
왕녀의 질문에 아샤 트레일이 대답했다.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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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땅의 정령사는 왕실 직할지의 파종에 앞서 지기를 북돋기 위해 파견을 나간 상태이며, 왕도에 체류 중인 정령사는 오직 물의 정령사뿐입니다. 물의 정령사라도 만나실 생각이라면 따로 기별을 보내 날을 잡아보겠습니다.”
김선혁이 왕녀와 만나고 온 사이 벌써 정령사의 소재를 파악했는지 줄리앙이 따로 만남을 주선할지 여부를 물어왔다. 거부할 이유가 없었던 그는 당연하게도 최대한 빨리 일정을 잡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목록에 있는 마법사들 말입니다.”
“그래. 좀 알아봤어?”
영지로 데려갈 기사가 이미 결정 났으니, 이제 남은 건 마법사뿐이었다. 기대하는 표정이 된 그가 줄리앙의 대답을 기다렸다.
“쉽지가 않습니다. 기사들에 대한 소문이나 평가는 비교적 상세한 데 반해, 왕실 마법사단 소속의 마법사들은 원체 외부활동을 하지 않으니 도통 그 정보를 얻기가 힘듭니다. 따로 마법사를 통해 평을 듣는 거라면 모를까, 제가 주변을 수소문하여 정보를 얻는 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말로는 힘들 것 같다면서도 줄리앙은 용케도 방법을 제시했다.
“전에 백작님께 초청장을 보내거나 면담을 요청했던 사람들 중에 마법사단과 관계가 있는 자가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 정보를 얻으면 될 것 같습니다.”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는 법이 없는 줄리앙이라 그가 감탄을 토하며 그게 누구인지를 물었다.
“왕실 마법사단 소속의 이방인들입니다.”
“아….”
이 간단한 걸 왜 떠올리지 못했던 것인지 그가 멍한 얼굴을 해 보였다. 친분이 아예 없는 수석 마법사 이은서는 둘째 치고서라도 안유정이라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법도 했다.
그는 당장 전령을 통해 안유정과의 약속을 잡았다.
“전에 말했던 거, 아직 유효합니까?”
안유정은 그 앞뒤 다 잘라낸 말에도 용케 뜻을 알아듣고는 웃어 보였다.
“당연하지요. 대가만 충분하다면 언제든.”
“그럼 정보 좀 얻읍시다.”
김선혁은 망설이지 않고 미리 준비했던 목록을 넘겨주었다.
“이들의 능력에 대한 평가나, 평판이 궁금합니다.”
‘왕실 마법사단 소속, 선임 마법사, 제이크 프라드무어, 그라두스 73위.’
‘왕실 마법사단 소속, 선임 마법사, 아리아 아이젠, 그라두스 98위.’
‘왕실 마법사단 소속, 선임 마법사, 크실 아르카인, 그라두스 100위.’
목록이라고 해봐야 길지 않았던 탓에 안유정은 금세 다 훑어보고는 이유를 물었다. 그는 지난 공을 인정받아 왕실이 마법사를 영지에 파견하기로 했노라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왕실이 제대로 밀어주는군요. 중앙에서 아등바등 거리던 내가 다 자괴감이 느껴질 지경이네요. 차라리 저도 국경에 있을 걸 그랬나 봐요.”
설명을 들은 그녀가 탄성을 내뱉었다.
“가능하겠습니까?”
오래 있다간 꼼짝없이 지배력에 휘말려 또 거북스러울 정도의 호감을 보일까 염려된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시늉을 해보이더니, 어디선가 펜을 꺼내들고는 목록 위에서 스윽스윽 손을 움직였다.
그렇게 그녀가 펜으로 지우고 남은 목록의 이름은 하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