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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6. 왕족의 약속 (3)
김선혁은 하루종일 숙소에 틀어박혀 그라두스 순위를 보며 인재를 추렸다.
“너무 높으면 데려가기도 부담스럽고, 일 시키기에도 부담스럽지.”
그중에서 그라두스가 너무 높은 자들은 제외했다. 왕녀가 도움을 준다고 해서 그라두스 상위의 인재들이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따라올 거라 생각할 수도 없었거니와, 설령 영지까지 데리고 가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제대로 부릴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가 필요한 건 편하게 부릴 수 있는 유능한 인재였지, 영지에 고이 모셔둘 상관이 아니었다.
“이방인들도 제외.”
그리고 거기에 이방인들 역시 제외했다.
“대충 이 정돈가….”
그렇게 거르고 추린 인재의 수가 총 셋이었다.
‘왕실 마법사단 소속, 선임 마법사, 제이크 프라드무어, 그라두스 73위.’
‘왕실 마법사단 소속, 선임 마법사, 아리아 아이젠, 그라두스 98위.’
‘왕실 마법사단 소속, 선임 마법사, 크실 아르카인, 그라두스 100위.’
하나같이 20대의 나이로 능력을 인정받은 촉망받는 인재들이었다. 그리고 전부 기사가 아닌 마법사이기도 했다. 가만히 곁에서 지켜보던 줄리앙이 기사 후보는 추리지 않냐고 물으니, 김선혁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기사는 벌써 결정했어.”
“벌써 말입니까?”
하루종일 그라두스에 적힌 이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함께하게 될지 모를 기사를 이렇게 빨리 결정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로서는 결코 성급하게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왕녀에게 소원을 말할 때도 이를 염두에 두고 미리 못을 박아둔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왕도에 오기 전부터 영지에 영입할 기사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게 누굽니까?”
줄리앙은 역시 기사를 지망하는 스콰이어답게 영지의 첫 기사 전력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줄리앙을 보며 알 듯 모를듯한 얼굴로 가만히 손가락을 뻗어 그라두스 순위의 중간쯤을 가리켰다.
“실력 있고, 인품도 검증된 인재, 딱이지 않아?”
마치 칭찬이라도 기다리는 듯한 김선혁의 얼굴을 본 줄리앙이 멍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리고 한발 늦게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실력과 인품이야 믿을 수 있다지만, 그냥 기사도 아니고 왕가 수호대의 기사를 대체 어떻게 빼 오실 생각이신 겁니까.”
황당하게도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기사의 이름은 그도 알고 줄리앙도 아는 여기사의 것이었다.
‘왕실 기사단, 왕가 수호대 소속, 상급 기사 아샤 트레일, 그라두스 46위.’
“어떻게 빼오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줄리앙을 본 김선혁이 뻔뻔스럽게 지껄여댔다.
“왕녀한테 말해야지. 트레일 경을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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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단순하고 명확한 결투라는 방식을 통해 그라두스의 순위가 매겨진 기사들과는 달리 마법사들의 그라두스가 결정되는 데는 조금 더 복잡한 요소가 작용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실에 처박혀 마법을 연구하고 실험을 하는데 사용하는 마법사들이 갑작스레 미치지 않는 이상 마법을 난사하며 결투를 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마법사들의 그라두스는 당사자가 익힌 마법들을 확인하여, 전쟁에 투입되었을 경우 적들을 상대로 얼마만큼의 저지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를 가정하여 매겨진 것이었다.
이를테면 기사들이 돌진하여 적을 분쇄하는 전차 취급이라면, 마법사들은 한자리에 고정되어 화망을 구성하고 적을 저지하거나 섬멸하는 포대취급을 받는 식이었다.
“그라두스 최하위의 기사와 마법사들이 최소 1개 중대 규모의 보병을 상대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개인의 힘이 일백의 잘 훈련된 병사들을 압도할 정도라니, 과연 마법과 정령을 비롯해 온갖 비현실적인 능력이 넘쳐나는 세상다운 기준이었다.
“근데 어차피 전쟁에 나가지도 못할 텐데.”
“그러니 더욱더 그라두스에 목을 맬 수밖에 없겠지요. 그라두스라도 없으면 전쟁이 나지 않는 이상 자신의 실력을 입증할 기회가 없을 테니까요.”
줄리앙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기껏 죽을 고생을 해서 초인적인 힘을 손에 얻었는데, 정작 손발이 묶여 힘을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얼마나 갑갑하고 억울할까.
그런 점을 생각해보면 과거 무례하게 결투를 신청했다가 개망신을 당한 평기사들의 마음이 이해가 갈 법도 했다.
“어쨌건 어차피 전장에 투입하지도 못할 거, 기왕이면 다재다능한 마법사로 뽑자고. 이렇게 고민해서 데려갔더니 할 줄 아는 게 불덩이 만들어내고 벼락을 쏟아내는 것뿐이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지.”
김선혁이 미리 적어두었던 영지 마법사 후보 명단을 줄리앙에게 건네주었다.
“이 중에서 공격 마법 외에도 특출난 재능을 보이는 자가 있거나, 그쪽으로 파고드는 인물이 있는지 알아봐줘.”
“기사들과 다르게 왕실 마법사단의 마법사들은 외부 활동이 뜸해 정보를 얻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상관없어. 어차피 협상이 끝나야 전쟁의 포상을 받고, 포상을 받아야 나도 왕도를 뜰 테니까. 그 안에만 알 수 있으면 괜찮아.”
그의 말에 줄리앙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방을 나섰다. 역시나 성실한 그녀다웠다.
“후. 그럼 내성에나 들러볼까.”
마침 시간도 왕녀가 티타임을 즐기는 시간이었다. 그는 시녀를 불러 내성으로 안내하라 말하고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아주 왕성을 제집 드나들 듯 하는구나.”
그런데 그곳에서 별로 반갑지 못한 인물을 만났다. 중부군 소속의 이방인들을 반 폐인으로 만들면서 대하기가 다소 껄끄러워진 레인하르트 후작이 그곳에 있었다.
“왕녀께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알고 있다. 내성의 출입자를 확인하는 게 내 일인데, 아무렴 내가 그걸 모를까.”
그렇게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내뱉은 후작이 시녀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잠시 백작과 나눌 말이 있다. 자리를 비켜주려무나.”
시녀가 잠시 김선혁의 눈치를 살펴보이다가 그가 고개를 끄덕여주자 저 멀리 사라졌다.
“뭔가 할 말이 있으십니까?”
“왕도는 어떻던가. 위치가 달라지니 보이는 세상 또한 달라지지 않던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말단 기병에 불과했던 과거와 비교도 할 수 없는 호사를 누리고 있었으니까.
“왕도라는 게 그렇다. 힘이 있는 자에게는 더없이 안락하고 즐거운 곳이지만, 반대로 힘이 없으면 달려들어 물어뜯으려는 온갖 잡놈들에게 시달리는 법이지.”
“그런 것 같습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이런 말을 늘어놓는 것인지 김선혁으로서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서 후작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너는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권세와 명성이 있고 왕가의 신뢰를 받고 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왕도에서만큼은 너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자가 없을 거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듯 눈을 똑바로 마주 보는 레인하르트 후작의 모습에 그도 자세를 바로 했다.
“그래서 말인데. 왕도에서 지내볼 생각은 없나?”
“그게 무슨….”
이건 또 무슨 말인지, 그가 의아한 얼굴을 해 보이자 후작이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왕실 기사단에 입단할 생각이 없냐는 말이다.”
갑작스러운 제의에 김선혁은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덴버그에서도 가장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아데스덴의 혈족들을 수호하는 일이다. 그 영광과 명예는 이루 말할 수도 없고, 아데스덴의 성을 물려받은 이들 외에는 어느 누구도 네게 명령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끌리지 않느냐?”
후작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대답할 필요는 없다. 지금 당장 너를 데려갔다간 맹스크의 노인네가 왕도까지 찾아와 나를 못살게 굴 거다. 그러니 천천히 생각하고 이런 길이 있다 정도만 머릿속에 넣어두면 되겠지.”
척 보기에도 그가 별로 내켜하지 않는 기색임을 눈치 챘는지, 후작의 태도는 드물게 부드럽기만 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이번에도 면전에서 거절을 당하지 않아 다행이라며 껄껄거리며 웃어대던 후작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혹시라도 야전 체질이니 뭐니 그런 핑계는 생각도 하지 말아라. 어차피 너도 곧 알게 되겠지만, 너도 야전에서 구를 날이 오래 남지 않았으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녹테인에서 이번 협상의 조건으로 너를 걸고넘어졌다.”
국가와 국가 간에 이루어지는 협상에서 일개 개인의 이야기가 언급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인상을 찌푸린 그가 설명을 요구하자 후작이 느릿느릿하게 대답해주었다.
“녹테인과 우리가 확전을 피하기 위해 주전력이라 할 수 있는 마법사와 기사들을 가급적이면 전선에 투입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너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건 그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번에 녹테인에서 드레이크 나이트를 상급 기사 정도의 주력으로 분류하여 향후 분쟁에서 기사 전력과 똑같이 배제할 것을 요청해왔다. 그게 녹테인 놈들이 우리 왕국이 제시한 대부분의 조건들을 수용하는 대신 걸어온 조건이다.”
“아….”
뒤늦게 상황을 이해한 그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녹테인의 요구가 꼭 어린아이들이 주먹다짐을 하며 규칙을 정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탓이다.
“그걸 받아들인답니까?”
“아직 결정이 난 것은 아니지만, 아마 높은 확률로 받아들이겠지. 당분간은 녹테인 놈들이 먼저 국경을 넘어올 일도 없거니와, 설령 그렇다고 한들 녹테인의 요구 조건은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수준의 것이니까.”
그런데 후작의 말을 듣고 있자니 아덴버그의 관료들이 꽤나 긍정적으로 그 제안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 너도 이제 고위 귀족이 되었으니 곧 알게 될 거다. 왜 기사들이 손발이 묶이고, 마법사들의 입이 봉해졌는지. 그리고 그걸 알게 됐을 때쯤이면 너도 다른 기사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신세가 되어 있을 거다.”
후작의 얼굴에 짙게 그늘이 졌다. 그런데 잔뜩 무게를 잡은 후작의 표정과는 달리 김선혁의 표정은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그저 조금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기색이 떠올랐을 뿐, 기사들처럼 전장에 나서지 못하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불안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그 사실을 눈치 챈 것인지 후작이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분하지 않은가? 날지 못하는 새가, 달리지 못하는 표범이 될 수도 있다.”
레인하르트 후작의 질문에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날지 못하고 달리지 못하는 게 뭐가 대숩니까. 닭처럼 살고 고양이처럼 살면 그만이지요.”
애초에 그는 전쟁에 꼭 참가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어쩌다 보니 명령을 받고 싸우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공을 세웠을 뿐이다. 이제 와서 전장에서 배제된다고 해서 아쉬울 이유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지긋지긋한 전장에 불려가 끔찍한 꼴을 보지 않게 되었으니, 차라리 다행이라 여겨질 지경이었다.
그런 내심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에 후작이 뒤늦게 한숨을 내쉬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어쨌건 지금 상황이 그러하니, 변방이 지루하다 느껴지면 언제고 왕도로 와라. 왕실 기사단은 언제든 너를 환영할 것이다.”
뭔가 페이스가 흐트러진 듯한 느낌이었는지, 궁색하게 한마디를 늘어놓은 후작이 부리나케 걸음을 옮겼다. 후작이 사라지자 멀리 물러났던 시녀가 다시 다가와 마저 안내를 해주었다.
“실로 공교롭도다. 나도 이제 막 차를 마시려던 참인데, 드라흔 백작이 이곳을 찾을 줄이야.”
왕녀는 그렇게 놀러오라고 온몸으로 부탁을 하더니 지금은 마치 그런 일 따위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이제는 그도 왕녀의 이런 언행 불일치가 익숙해졌던지라 그저 웃는 얼굴로 왕녀에게 인사를 해주었을 뿐이다.
“마침 전에 쓰던 창이 부러져 곤란하던 차에 왕녀께서 배려해주신 덕에 좋은 창과 갑옷을 얻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왕도 최고의 장인들이 몇 달에 걸쳐 공을 들여 만든 것이니라. 철을 정련하고 틀을 만드는 데 들인 열과 성이 가히 필생의 역작을 만드는 듯했으니, 그대가 만족하는 게 당연하리라.”
거창하게 말했지만, 결국은 자기가 그만큼 대단한 선물을 해주었다고 생색을 내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왕녀가 바라는 대로 적당히 감동을 받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마치 어린 조카라도 생긴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그 조카의 아비가 되는 자가 왕국의 수장이니만큼 대하기가 조심스럽기는 했지만 의젓함과 천진난만함을 동시에 지닌 왕녀와 만나는 것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 전에 말씀드렸던 영지에 상주할 마법사와 기사 말입니다.”
“오오. 벌써 결정을 내린 것인가.”
“일단 마법사는 조금 더 고민을 해봐야겠지만, 기사는 결정했습니다.”
잔뜩 기대하는 표정이 된 왕녀가 가뜩이나 동그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며 번쩍거렸다.
“그래. 어떤 기사가 위명이 자자한 드레이크 나이트의 마음에 든 것인지, 실로 궁금하도다.”
이미 마음을 먹고 찾아왔다지만, 왕녀의 근접 호위를 빼가는 것이니만큼 마지막 순간 망설여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자신의 결정을 이야기 해주었다.
“트레일 경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