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94화 (94/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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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5. 왕족의 약속 (2)

“영지에 상주할 마법사와 기사를 제가 선택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잔뜩 기대하고 있던 왕녀의 얼굴에 다소 실망스러운 기색이 스쳐갔다.

“그대의 영지에 머물 이들이니 영주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은 당연한 바, 그대의 소원은 나의 약속을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노라.”

왕녀는 훨씬 더 대단한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데, 왜 고작 이 정도의 소원을 빌었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제가 다소 욕심을 부려 분에 넘치는 인재들을 청하더라도 왕녀께서는 부디 오늘의 약속을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김선혁은 조금도 아쉬운 기색 없이 똑같은 말을 반복했을 뿐이었다. 잠시 못마땅한 듯 혀를 차던 왕녀가 뒤늦게 눈을 빛냈다.

“혹여 마음에 둔 인재가 있는가.”

“아직은 딱히 없지만, 왕도에 머무는 동안 결정을 내릴 생각입니다.”

지금 당장 말할 생각은 없다는 투로 대답을 해주니, 왕녀가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만약 정해진다면 가장 먼저 나에게 말해줄 수 있겠느냐.”

“꼭 그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좋구나. 좋아.”

왕녀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손뼉까지 쳐가며 좋아했다.

“내 그대의 안목을 지켜보리라.”

한참을 좋다고 웃다가 뒤늦게 헛기침을 한 왕녀가 평소의 의젓한 태도로 시녀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동안 감히 끼어들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나서 테이블 위에 잔을 올려두고 향 좋은 차를 따라주었다.

그 뒤로는 소소한 대화가 이어졌다. 왕녀는 기이할 정도로 전쟁에 관한 화제는 배제하고 주로 골디에 관한 이야기를 묻거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당연히 전장에서의 무용담 따위를 물을 거라 생각했던 김선혁으로서는 이러한 왕녀의 태도가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심 전쟁이라면 지긋지긋했던 그인지라 이런 상황이 오히려 반갑기만 했다. 덕분에 대화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고, 그는 어린 왕녀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즐겁게 들어주었다.

“흠.”

한참을 그렇게 이야기하다 보니 아샤 트레일이 눈치를 주었다. 이미 시간이 꽤나 흘렀음을 깨달은 김선혁이 왕녀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자유로이 내성을 오갈 수 있도록 허락해줄 터이니, 백작은 달과 별이 없는 시간 동안은 내성의 정원을 이용하는 데 망설이지 말라.”

왕녀의 말에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마치 특별한 상이라도 내리는 듯한 말투였지만, 결국은 본인이 심심하니 또 놀러오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나 또한 이곳의 풍취를 보며 차를 즐겨 마시니, 때가 맞는다면 차 한 잔 정도는 더 대접할 수 있을 것이니라.”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의젓한 표정을 해보인 왕녀였지만, 하얀 드레스 자락을 꼭 움켜쥔 앙증맞은 손이 행여라도 그가 다시 내성을 찾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심정을 대변해주었다.

“배려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골려주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은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을 해주니 왕녀의 동그란 눈매가 보기 좋게 휘어 올랐다.

**

왕녀와의 다과 시간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김선혁은 뜻밖의 선물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대로 새로운 갑주와 창을 주문할 생각이니라. 다시는 그대와 드레이크가 적들의 창칼에 허무하게 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노라.’

스쳐가듯 했던 말이라 잊고 있었는데 왕녀는 정말로 약속을 지켰다.

“왕녀께서는 백작님을 놀라게 해주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전에 받았던 것보다 몇 배는 공을 들인 듯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창과 금빛 갑주를 본 그는 홀린 듯이 창을 잡아 보았다.

“아….”

그리고 저도 모르게 감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미묘하게 달라진 무게 중심과 슬쩍 움직일 때마다 탄력 있게 꿈틀대는 창이 말 그대로 손에 착, 하고 감겨왔다. 다소 변칙적인 그의 기형 창술에 딱 맞는 무게와 탄성이라 그는 대번에 한때 자신을 지도해주었던 아샤 트레일의 손이 닿았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한번 입어보시겠습니까?”

줄리앙이 다가와 갑옷을 들이댔다. 그는 잠시 창을 내려놓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갑옷을 입었다.

“드레이크의 모양이라니, 이걸 만든 장인은 예술적인 감각도 뛰어나군요.”

드레이크의 머리를 형상화한 듯한 투구에 요소요소마다 발톱과 비늘이 세공된 갑주는 차라리 예술품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을 완벽하게 감싼 갑주의 느낌은 단단하고 안정적이었고 실용성과 외형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이 훌륭했다.

“여기. 망토도 있습니다.”

전방 기병의 상징과도 같은 푸른색 바탕에 금빛 드레이크가 새겨진 망토를 두르고 나니, 줄리앙이 감탄을 내뱉었다.

“그야말로 드레이크 나이트라는 이름에 걸맞는 모습입니다.”

그녀의 말마따나 갑주는 차라리 예술품에 가까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번쩍이는 금빛이나 생김새가 전장에서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했다는 것뿐이었다.

“이거 입고 나갔다는 단숨에 몰매 맞을 거 같은데.”

번쩍거리는 광채와 화려한 생김새가 적들의 집중공격을 받기에 딱 좋아 보였다. 하지만 줄리앙은 그게 무슨 문제냐는 투로 도리어 그를 타박했다.

“어차피 골드레이크 위에 탄 백작님은 수백 미터 밖에서도 눈에 띕니다. 이제 와서 새삼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거대한 괴수 위에 올라탄 그를 보고도 정체를 짐작하지 못할 적은 없었으니, 이제 와서 갑자기 그 유난스러움을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너무 받기만 했어. 다음에 뭐라도 선물을 드려야 하나.”

“당장 받으신 선물의 격에 걸맞는 보답을 하시려면, 영지의 예산을 꽤나 끌어다 써야 할 겁니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왕족에게 하찮은 공물을 바치는 건 모욕이나 다름없으니, 만약 선물을 하시려거든 충분히 고민한 뒤에 반드시 제게 먼저 말해주십시오.”

상대가 상대다보니 보답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김선혁은 줄리앙의 말에 그러마하고 대답해주고는 슬쩍 거울 앞에 나가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좀 과한 거 같긴 해.”

졸부의 그것처럼 가벼워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과도할 정도의 예술혼이 들어간 갑주가 필요 이상으로 화려한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왕녀의 소녀적인 취향이 잔뜩 담긴 듯한 느낌이었다.

**

하루가 지나자 이곳저곳에서 다시 전령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면담 요청은 거절했지만, 그래도 개중에 계속해서 거절하기는 신경 쓰이는 자들을 추려 만남을 가졌다.

그중에는 바람의 정령사 안유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이제는 백작님이라 불러야 하나요?”

안유정은 더 이상 그에게 파벌의 가입을 권유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그녀와 그녀의 파벌이 품기에는 너무도 커버렸고, 도리어 고개를 숙여야 할 상황이었다.

“먼저 또 한 번 전공을 세운 걸 축하해요.”

“고맙습니다.”

그녀를 통해 아티야를 얻었던 전적이 있어 내심 채무감을 지니고 있는 그였지만, 사실 인연 자체가 깊지 않았던지라 따로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묘한 어색함 속에 그가 말똥말똥 눈만 뜨고 있자, 그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령의 냄새가 강해진 걸 보니, 그 아이가 성장이라도 한 모양이군요.”

“어쩌다 보니.”

“제 정령도 성장했어요.”

그러고 보니 지금쯤이면 속성 지배력의 영향에 휘말려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야 할 안유정의 표정이 평온했다. 아무래도 정령이 성장하며 어느 정도 영향력으로부터 내성이 생긴 모양이었다.

“제 정령은 상급이랍니다.”

그런데 중급 정도일 거라 생각했던 그녀의 정령은 무려 상급 바람의 정령이었다. 김선혁이 그녀를 만난 뒤로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자 안유정이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나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어요.”

정말로 그게 용건이었는지, 그녀는 몇 마디 말을 건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저를 찾아와요. 물론 대가는 받겠지만, 지금의 당신이라면 충분히 그 값을 치를 능력이 있어 보이네요.”

김선혁은 말없이 그녀를 배웅해주었다.

“또 봐요.”

안유정은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다 짧게 인사를 남기고는 사라졌다.

“음….”

아마도 그녀는 성장한 자신이 아직도 그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지 확인 차 방문한 것이 틀림이 없었다. 그로서는 그녀가 이곳을 나서기까지 속성 지배력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지, 아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방문을 나서기 전에 보였던 짧은 망설임을 통해 막연하게나마 그녀가 서둘러 자리를 일어난 것이 속성 지배력 때문이었을 거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때는 동급, 지금은 저쪽이 상급이고 이쪽이 중급이라 그런가.”

등급의 차이가 있음에도 여전한 속성 지배력의 영향력을 곱씹어 가늠하던 김선혁이 문득 멍한 얼굴을 해보였다.

“가만. 왕도에는 물이나 땅의 정령사가 있을 법도 한데….”

안유정에게 아티야를 빼앗아 왔듯이, 지금이라면 물의 정령과 계약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새로운 목표를 찾아 궁리를 거듭하고 있는 사이, 잠시 자리를 피해주었던 줄리앙이 돌아왔다.

“줄리앙. 혹시 왕도에 정령사가 있어?”

“알아볼 수는 있습니다. 급하신 겁니까?”

“급한 건 아니지만,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일단 성공하든 실패하든 시도해볼 가치는 있었다. 그의 말에 줄리앙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품에 안고 있던 책 한 권을 건넸다.

“말씀하신 잡지, 구해왔습니다.”

“오. 고마워.”

잡지를 펼친 김선혁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왕국의 창, 드레이크 나이트의 활약상을 말하다.’

‘제 629회 아·녹 전쟁의 주역은 누구인가. 왕국의 방패인가, 왕국의 창인가.’

‘드레이크 나이트가 치른 22차례의 전투, 그리고 22차례의 승리.’

표지에서부터 자극적인 문구가 보인다 싶더니, 초반 몇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계속해서 자신에 관련된 기사가 실려 있었던 탓이었다. 단지 몇 문장을 읽어보았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 무시무시한 미사여구와 미화된 내용에 질색을 한 그가 빠르게 잡지를 넘겼다.

“최신자 그라두스!”

잡지의 말미에 붙어 있는 일백 기사와 마법사의 리스트를 본 김선혁이 재빨리 자신의 이름을 찾았다.

‘중앙군 서부방면 소속, 라인펄 백작령의 영주, 용기병 선혁 라인펄 김 드라흔, 그라두스 78위.’

그라두스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보다 무려 11계단이나 상승한 그라두스 순위, 그는 반사적으로 라이든 레이라크를 찾았다.

‘중앙 기사단 소속, 선임기사, 라이든 레이라크 79위.’

바로 아래 라이든 레이라크의 이름이 있었다. 볼 것도 없이 자신이 전쟁터를 구르는 동안 라이든 레이라크가 부지런히 그라두스의 순위를 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가 씨익, 하고 웃었다.

지난 재판 결투에서 상대의 방심을 이용한 끝에 승리를 얻었다지만, 마지막까지 결투가 진행되었다면 결국 패배한 것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다 과거의 일이었으니, 지금의 그는 벼락의 검을 실력으로 꺾을 자신이 있었다.

어차피 왕도에 온 김에 스스로의 힘을 시험해보기로 한 지금, 벼락의 검은 연습 게임 상대로 딱이었다.

“줄리앙. 정령사를 찾는 김에 라이든 레이라크가 왕도에 아직 남아있는지 확인 좀 해줄래?”

“네. 확인해보고 오늘 중으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연고도 없는 왕도에서도 여전히 믿음직스러운 줄리앙의 모습에 그가 고맙다 말해주고는 다시 잡지로 시선을 돌렸다.

레인하르트 후작이 자리 잡은 그라두스의 상위권은 여전히 각기 왕실 기사단과 중앙 기사단, 그리고 왕실 마법사단의 간부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순위 변동이 조금도 없었다. 아샤 트레일이 랭크된 중상위권의 그라두스 역시 큰 변동 사항은 없었다.

순위 변동이 있었던 것은 오직 하위권의 그라두스뿐이었다.

“어?”

한때 자신의 것이었던 그라두스 89의 위치에 낯익은 이방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왕실 마법사단 소속, 수석 마법사, 자작 이은서. 89위.’

아니,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라두스 순위에는 병과로 전직한 이방인들의 이름이 하나도 아니고 무려 셋씩이나 자리를 잡고 있었다.

‘왕실 마법사단 소속, 바람의 정령사, 자작 안유정 85위.’

‘중앙 기사단 소속, 수도사, 자작 공현진 62위’

게다가 그중에는 듣기만 해서는 평화주의자의 그것처럼 들리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온몸을 무기로 사용하는 호전적인 병과, 수도사로 전직한 이방인이 무려 62에 랭크되어 있었다.

“62위면 진짜 상급 기사 급이네.”

자신보다 훨씬 높은 그라두스에 애초에 별로 있지도 않던 호승심이 잠시 솟구쳤지만 금세 사라졌고, 김선혁은 이내 다시 그라두스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쓸 만한 놈이 어디 있을 텐데.”

단순히 그라두스를 올리기 위해 대전 상대를 찾는다기에는 다소 이상한 모습, 가만히 지켜보던 줄리앙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혹시 그동안 왕녀께서 약속하신 기사와 마법사에 대해 따로 알아보라는 지시가 없으셨던 게….”

“응? 그런 걸 뭐하러 알아봐.”

줄리앙의 질문에 김선혁이 콧노래를 부르며 대답했다.

“여기 이렇게 완벽한 리스트가 있는데.”

그러고 보니 잡지를 뚫어져라 살펴보는 그의 모습이 꼭 저쪽 세상에서 인터넷 쇼핑을 하기 전에 장바구니를 꾸리는 모습과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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