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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 왕족의 약속 (1)
협상단의 이동 경로는 철저하게 왕실의 매뉴얼을 따랐다. 취약한 곳은 숨기고, 강한 곳만 드러내 세를 과시하려는 왕실의 안배였다. 하지만 정작 협상단의 아슈테인 후작과 그 수하들은 한가하게 주변의 영지를 구경할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감각이 사라진 엉덩이가 안장에서 떨어지지 않게끔 필사적으로 버티며, 질주하는 괴수를 따라 개처럼 끌려다녀야 했다.
살인적인 강행군, 협상단은 속도를 늦춰 달라 부탁하는 대신 독기가 잔뜩 오른 얼굴로 고통을 참아냈다. 그러다가 그것마저 힘들어지니 슬쩍 속도를 늦추고 뒤로 쳐지는 잔머리를 굴렸다. 설마 호위대가 자신들을 버리고 가겠냐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물론 김선혁은 아슈테인 후작과 협상단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친절을 베풀 생각도 없었다. 그는 슬쩍 뒤를 바라보고는 골드레이크를 몰아 협상단의 뒤에 따라붙었다.
크르르릉.
골드레이크가 낮게 목을 울리자 슬며시 속도를 낮췄던 협상단의 말들이 꽁지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달음박질을 쳤다.
“어억!”
기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내달리는 말 위에서 협상단의 인물들이 비명을 질렀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보다 상황이 더욱 악화된 것이다.
그 일이 있었던 뒤로 협상단은 더 이상 잔머리를 굴리지 않았다. 오직 독기와 자존심으로 강행군을 버텨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딱 방금 전까지의 이야기였다.
“이보시오. 드, 드라흔 백작.”
아슈테인 후작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김선혁을 불렀다. 악과 깡도 통하지 않는 상대, 게다가 잔머리도 통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버텼다가는 협상이고 나발이고 왕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게 생겼으니,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제, 제발 속도를 좀 늦춰주시오….”
자존심을 꺾고 부탁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배, 백작….”
하지만 김선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해서 질주했을 뿐이었다.
그걸 보고 아슈테인 후작은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방금 전보다 훨씬 더 큰 목소리로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
“드라흔 백… 억!”
가뜩이나 기마 이동에 익숙하지 않은 후작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상태에서 고함을 지르다 혀를 깨물고 말았다. 순식간에 입가를 타고 피가 흘러내리고, 비명을 내지른 후작이 말에서 굴러 떨어질 것처럼 비틀거렸다.
멍청하기는.
힐끗 뒤를 돌아본 것만으로 상황파악을 끝낸 김선혁이 혀를 찼다.
“속도 늦춰. 완보(緩步), 정지.”
아무리 녹테인이 밉다고 해도 협상단의 대표로 혀가 잘려 말 못하는 상태로 왕실에 인도할 수는 없었다. 그는 기병들 중 둘을 추려 인근 영지에서 사제를 수배해 데려오도록 했다.
“조심 좀 하지 그랬소. 할 말이 있으면 휴식할 때 하면 됐을 것을.”
“도대체 그 휴식이라는 게 있긴 있습니까? 여태 해가 지기 전에 대열을 멈춰 세우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김선혁의 말에 협상단의 수하 하나가 발끈해 나섰다.
“아니. 대체 어느 나라의 호위대가 이렇게 일국의 대표를 가혹하게 몰아친단 말입니까!”
“지금이 전시도 아니거늘, 이리 일정을 잡은 건 일부러 골탕을 먹이려는 게 아닙니까.”
한 번 말문이 트이자 그간의 불만이 봇물 터지듯이 밀려 나왔다. 후작 역시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눈빛으로 항의를 했다.
“진즉에 말을 하시지. 왜 이제야 따지는지 이해가 안 가는군.”
마치 상대가 말을 하지 않아 몰랐다는 투로 대답을 하는 그의 모습이 엄청나게 뻔뻔했다. 이쯤 되니 오히려 협상단을 미련하다고 질책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익!”
“그리고 급한 건 내가 아니지. 난 귀국이 그 정도로 여유가 있는 줄 몰랐소.”
한시라도 빨리 요새를 돌려받고 국경을 안정시켜야 하는 건 녹테인이었지, 아덴버그가 아니었다. 아덴버그의 입장에서는 협상단이 내일 도착하든 이듬해에 도착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 사실을 콕 짚어 이야기를 해주자 협상단은 말문이 막힌 듯, 입만 벙긋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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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 치유술을 받았으나 아슈테인 후작의 혀는 완벽하게 치료되지 않았다. 사제의 말로는 자신의 신앙이 부족해 어쩔 수가 없었다지만, 후작을 대하는 냉랭한 태도를 보니 일부러 제대로 치료를 하지 않은 듯했다.
하기야 사제라고 해도 결국은 인간, 최소한 아덴버그 왕국 내에서만큼은 녹테인의 인물에게 호의적인 사람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아슈테인 후작은 꼼짝없이 이번 일정 동안은 어눌한 말투로 협상에 임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협상단의 분위기는 끔찍할 정도로 가라앉았다.
“이건 너무 느린 거 아닙니까?”
“급하게 가다 귀국의 대표가 부상을 입었으니, 이제부터라도 조심해야 하지 않겠소.”
이번에는 지독스러울 정도로 느린 행군 속도에 후작을 대신해 그 수하가 항의를 했지만, 통할 리가 없었다. 김선혁은 그야말로 제 기분 내키는 대로 일정을 조율했고 덕분에 왕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협상단은 완전히 지쳐버리고 말았다.
“앞으로! 왕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드라흔 백작님. 여기서부터는 저희가 협상단의 호위 임무를 잇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수고하도록.”
왕도에서 꽤나 먼 거리까지 마중을 나온 왕도 수비대의 기병들에게 협상단을 인계한 김선혁은 후작을 한 번 바라보았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죄수처럼 왕도 경비대에게 끌려가는 협상단의 모습이 처량해 보일 지경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저렇게 기가 꺾였으니, 온전하게 원하는 것을 얻기는 꽤나 힘들 것이다. 녹테인이 손해를 볼수록 서부 국경이 안정되니 김선혁으로서는 칼 한 번 뽑지 않고 나름대로 서부의 안녕에 기여를 한 셈이었다.
“가자.”
그의 말에 일백의 중갑 기병들이 앞서 나가는 왕도 경비대를 따라 이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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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거창한 개선식도 환영식도 없었다. 그저 마중 나온 왕도 경비대의 안내를 받아 조용히 왕도에 들어섰을 뿐이었다. 당연하게도 존재 자체로 시선을 끄는 골드레이크는 왕도 밖에 주둔 중인 중부군에게 맡겨야 했다.
“드레이크 나이트와 함께 했다는 걸 평생의 명예로 여기겠습니다.”
“부디 다시 만나 뵐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기존 드레이크 기병대의 대원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중부군 소속이었기에 김선혁을 따라온 대부분의 기병들은 주둔지에 남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다시 만날 때는 부디 부르면 한 번에 오도록.”
그의 말에 중대장들이 민망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그 어디에도 서부군과 중부군의 자존심 싸움을 핑계로 명령마저 무시하던 과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지.”
다소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가 물러나자, 중갑 기병들이 일제히 정자세를 취했다.
“드라흔 백작님께 대하여 경례!”
“드레이크 나이트의 앞날에 영광만이 가득하기를!”
역시나 드높은 자존심만큼이나 사내다운 기병들의 이별 인사에 그 역시 마주 군례를 취해 보였다.
“행운을 빌겠다.”
사내들의 진한 정에 왠지 코끝이 찡해져 코를 문지르던 김선혁은 문득 기이한 열기가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금방 찾아뵙겠습니다.”
눈이 마주친 김우영이 비장한 얼굴로 하는 말에 김선혁이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마음대로 해. 왕실이 퍽이나 허락하겠다.”
“저도 까짓거 이번에 공 좀 세웠으니, 전역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한마디도 지지 않는 김우영의 태도가 진지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는 마음대로 하라며 대충 손을 흔들어 주었을 뿐이다.
“자식들. 좀 있으면 드레이크 기병대에 넣어달라고 바짓가랑이 잡을 기셉니다.”
중부군의 주둔지를 나온 김선혁에게 클라크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왕실에서 드레이크 기병대를 재편하여 그 이름을 잇겠다는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대부분의 대원들이 전사한 지금에 와서 새롭게 만드는 드레이크 기병대가 과거의 드레이크 기병대일 리가 없었다.
김선혁은 클라크를 비롯한 고참병들과 상의 끝에 기병대를 재편하는 것을 재고해줄 것을 요청했다. 물론 지휘부는 어떻게든 그들을 설득하여 사스테인을 꺾고 다섯 배의 적을 상대로 사투 끝에 승리를 거둔 기병대의 이름을 이어 나가려고 했다.
그와 고참병들은 끝까지 거부했다. 결국 지휘부의 바람은 바람으로 끝이 났고, 드레이크 기병대는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소속을 잃은 클라크와 생존자들은 전부 전역을 신청했고, 라인펄 영지로 소속을 바꿨다. 이제 막 돌아가기 시작한 광산으로는 많은 수의 기병을 유지하기 빠듯했지만, 김선혁은 불구가 된 대원들을 포함하여 모두를 받아들였다.
그것이 전우에 대한 당연한 의리고 예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백작님.”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줄리앙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살아남은 고참병들과 어린 종자가 한결같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경비대가 기다립니다.”
“그래. 가자.”
괜스레 곁의 사내들을 한 번씩 툭툭 친 그가 저 멀리 경비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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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두 번째 찾은 왕도였지만, 김선혁은 마치 처음 왕도를 방문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작 말단 기병에 불과했던 과거의 그와 지금의 그는 아예 다른 존재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 위상이 남달랐다.
왕실은 수많은 시종과 시녀를 보내 그의 편의를 봐주었고, 수행원 자격으로 따라온 줄리앙과 기병대원들에게도 온갖 혜택을 베풀었다.
“와. 진짜 이 정도면 왕도에 살 만 하겠는데?”
눕는 것이 미안해질 정도로 잘 정돈된 침대는 원목으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것이었고, 숙소에 배치된 가구들이 하나같이 기품 있고 비싸 보였다.
그 드높은 품격에 압도당한 김선혁이 눕지도 앉지도 못하고 방을 서성이자 줄리앙이 별 희한한 놈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백작가에서 자란 줄리앙은 이 엄청난 호사가 아무렇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여상스럽게 찬장을 뒤져 음료를 꺼낸 그녀가 컵에 따라 건네주었다.
“크. 이제 좀 살 것 같네.”
대체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냉기 가득한 음료가 주는 청량함에 그가 부르르 몸을 떠는데 시녀가 찾아왔다.
“왕녀께서 전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아. 왕녀께서?”
“왕녀께서 말씀하시기를, 여독이 풀리는 대로 편한 시간을 잡아 가볍게 다과를 들었으면 좋겠다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왕녀에게 받을 것도 있었던 그인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기가 서부 국경도 아닌데, 그 차림으로 만나실 겁니까? 최소한 먼지를 씻고 차림을 단정히 하셔야지요.”
그녀의 말마따나 먼 길을 달리느라 먼지 가득한 옷과 복장이 영 지저분하기만 했다. 그가 민망한 얼굴로 웃어 보이자 한숨을 내쉰 줄리앙이 시녀에게 말했다.
“왕녀께서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내일 아무 때고 찾아뵙겠다고 말씀을 전하라.”
그녀의 말에 시녀가 알았노라 대답을 하고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시녀가 찾아왔다.
“안유정 자작께서 드라흔 백작님과의 면담을 요청하셨습니다.”
“왕녀와의 선약이 있다. 면담은 그 뒤에나 가능할 것이다.”
전에는 불쑥 찾아왔던 이들이 이렇듯 전령을 보내 먼저 일정을 묻는 것이 생소하기만 했지만, 줄리앙은 당연하게 여기는 듯했다. 그녀는 능숙하게 왕녀와의 선약을 핑계로 전부 결정을 뒤로 미루었다.
“백작부터는 왕족이라고 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고위 귀족입니다. 사실 봉토를 다스리는 영주가 되신 후부터 당연히 그랬어야 했는데, 백작님께서 너무 격의가 없으셨지요.”
임무가 끝나기가 무섭게 시작된 그녀의 잔소리에 그가 딴청을 피웠다.
그녀의 말 대로였다. 많은 이들이 명성 높은 드레이크 나이트를 만나기를 원하노라 청해왔지만, 그중 단 한 명도 무례하게 불쑥 방문하는 이는 없었다.
“어. 나 왕도가 갑자기 좋아지려고 하는데.”
지난 왕도행이 그다지 좋지 못한 기억으로 남은 것은 귀족들과 다른 이방인들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렸던 스트레스가 컸다. 그때도 지금처럼 사람들이 예의를 지켰다면 어쩌면 그는 서부가 아닌 왕도에 잔류하는 것을 택했을지도 몰랐다.
시류에 휘말려 전장을 전전하게 되었지만, 애초에 그는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 삶의 목표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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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왕녀의 시녀가 찾아왔다. 정오쯤으로 약속을 잡고 복장을 다진 김선혁은 곧장 왕실의 내성으로 향했다.
“이곳을 방문할 수 있는 분은 왕국에 그다지 많지 않답니다.”
안내를 맡은 시녀가 웃으며 건넨 말에 그가 주변을 둘러 보니, 과연 시녀의 말마따나 내성을 오고 가는 이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고작 해야 곱게 복장을 차려 입은 시녀와 시종들이 이따금씩 보였을 뿐이다.
“왔구나.”
내성의 정원에 마련된 테이블 하나, 그리고 의자 몇 개. 왕녀는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의자에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몸 탓에 발이 땅에 닿지 않아 대롱거리는 것이 영 귀엽기만 했지만, 말투만큼은 언제나처럼 위엄이 넘치는 왕녀였다.
“먼저 큰 공을 세운 것을 축하하노라.”
왕녀의 말에 감사 인사를 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니 조금은 물러나 있던 아샤 트레일이 눈인사를 건네 왔다.
그도 마주 눈짓을 해주고는 시녀의 인도를 받아 왕녀의 맞은편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그래. 소원은 생각해보았는가.”
왕녀는 뭐가 급한지 상기된 얼굴로 대뜸 소원을 물었다. 잔뜩 기대하는 표정이 영락없이 선물꾸러미를 눈앞에 둔 아이처럼 보여 그는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생각해둔 것이 있기는 합니다.”
그의 대답에 왕녀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 말해 보거라.”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하는 왕녀의 모습이 누가 소원을 빌고 누가 소원을 들어주는 입장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는 웃음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애써 표정을 다잡고는 자신의 소원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