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92화 (9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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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 반격 (4)

전쟁은 끝이 났지만, 전후 협상 과정이 끝이 나지 않았다. 맹스크 사령관이 이끄는 2개 연대 규모의 보병대들은 여전히 녹테인의 칼스테인 요새를 점거한 채였고, 양국의 전사(戰史)에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대규모의 포로가 요새에 남아 있었다.

아덴버그가 녹테인에게 요새를 반환할지, 또는 그대로 자국의 영토로 흡수할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하나만큼은 명확했다. 이번 전쟁에서 상당한 손해를 본 녹테인이 요새와 포로들을 돌려받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가 적지 않을 것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들은 양측 왕국의 수뇌부들이 결정할 일이었다. 일개 지휘관으로 전쟁에 참전했던 김선혁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사안들이었다.

“후.”

다만 협상 결과에 따라 칼스테인을 중심으로 다시 한 번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었기에 완전히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국경을 넘었던 김선혁과 기병들은 칼스테인 요새를 거쳐 마침내 맹스크로 귀환했다. 전쟁의 시발점이 된 녹테인의 침공으로부터 벌써 4개월이란 시간이 흘렀을 즈음의 일이었다.

“혁혁한 전공을 세우시고 무사히 귀환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렇게 귀환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칼스테인 요새로 자리를 옮긴 맹스크 사령관을 대신 서부군을 총괄할 임시 사령관의 직위였다. 협상의 방향에 따라 국경이 소란스러워질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탓에 책임자의 자리를 비워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은 맹스크 사령관의 참모들이 잔류하며 대부분 처리하는 통에 명목뿐인 사령관 자리였지만, 그 권위만큼은 진짜였다.

서부의 귀족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인사를 하고 어떻게든 친분을 다지기 위해 호의를 보였다. 개중에는 일전에 광산을 문제로 재판 결투까지 치렀던 레이라크 남작도 있었다.

“과거의 일일랑 사내답게 털어버리고 잘 지내봅시다. 다 같이 서부를 위해 싸운 전우 아니요.”

김선혁은 차마 나서지 못하고 끄트머리에 서서 눈치만 살피는 레이라크 남작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당시 일을 벌였던 그 검은 속내가 괘씸하기는 했지만, 결국 손해를 본 것은 레이라크 남작가였다. 그가 손해(?) 본 것이라고 해봐야 벼락의 검을 꺾고 그라두스를 얻어 다소 귀찮은 파리들이 꼬였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명예 백작의 작위를 얻은 그에게는 과거의 일에 불과했다. 정신 나간 기사라고 해도 왕국의 백작에게 무례하게 결투를 신청할 자는 없었으니까.

“감사합니다. 과연 왕국의 창다운 배포십니다. 앞으로도 이웃된 영지의 영주로서 귀 영지의 곁을 단단히 지키겠습니다.”

레이라크 남작은 자신이 어찌 처세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고, 그 어느 귀족보다 필사적으로 우호를 다지기를 원했다. 김선혁은 그 모든 호의를 받아주었다.

사실 전쟁을 치르고 나면 그전에 있었던 일들은 어지간히 멀게 느껴지게 마련이었다. 햇수로는 고작 두 해를 넘기지 않은 일이건만, 그의 기억 속에서는 마치 10년도 전에 일어난 해묵은 사건처럼 느껴졌고, 당연하게도 당시의 억울함과 분노는 이미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이제 와서 새삼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와 같은 마음을 갖게 된 것은 김우영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원정에 참가하기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 한 켠에 원망을 담고 있던 사내의 눈동자에서 어느 순간 원망이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오만하고 허영심만 가득했던 김우영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부쩍 말수가 줄었고, 눈빛이 깊어진 게 그간 경망 되게 살아왔던 스스로를 돌이켜 반성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김선혁이 생각했던 것처럼 영 구제 불능의 쓰레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근데 왜 자꾸 따라다녀.”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전쟁이 끝이 난 뒤로 이상할 정도로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김우영의 행동이었다.

“더 이상 죄를 물을 생각도 없고, 네가 세운 공을 축소해서 보고할 생각도 없어. 충분히 고생했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니 전공 걱정은 말고, 원래 있던 곳으로 어서 돌아가.”

혹시라도 죗값을 셈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전공이 축소될까 봐 이리 요새를 떠나지 못하는가 싶었지만,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복귀 지시가 아직 내려오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요새를 떠날 생각을 않는 김우영의 태도는 한결 같았다.

“미치겠네. 그만 따라다니라고.”

스토커 하나가 생긴 듯한 느낌이라 그가 질색을 하자 곁에 있던 클라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거 잭슨과 스콰이어 줄리앙에 이어 세 번째 추종자가 생긴 것 같군요.”

“웃지 마. 줄리앙은 귀엽기라도 하지. 시꺼먼 사내놈들이 쫓아다니는 건 징그러워서 사양하고 싶어.”

몇 번의 전쟁을 겪으며 이제는 평대가 익숙해진 김선혁은 새삼 자신을 따르는 사내들을 돌아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열 명 남짓 원정에 참가한 기존의 드레이크 기병대원들은 모두 살아남았다. 온몸에 흉터가 그득한 모습이긴 했지만,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고도 그 정도 부상만 입은 것은 천운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늘 자신들의 지휘관을 따라 가장 과격한 전장을 전전했다. 비록 무모하기까지 한 드레이크의 단독 돌격에 함께 나서 처음부터 전장에 뛰어들 수는 없었지만, 전장을 이탈하는 것만큼은 늘 자신들의 대장과 함께 해온 것이다.

“여기가 전쟁터도 아닌데 다들 왜 이렇게 나를 졸졸 따라다녀.”

“임시라고 해도 서부군의 사령관이신데 호위도 없이 다녀서 쓰겠습니까. 구색은 맞춰야지요.”

김선혁이 버럭 성질을 내보았지만, 뒤를 따르던 열 명의 기병들은 그저 낄낄대며 웃었을 뿐이었다. 그 능청스러운 모습에 한숨을 쉰 그가 또 그런 사내들의 모습을 부러운 듯이 쳐다보고 있는 김우영을 보며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넌 또 뭐가 부러워서!”

**

간신히 사내들을 따돌린 김선혁은 사령관실에 앉아 가만히 전투를 되짚어 보았다.

한겨울 혹독한 기후 속에서 치러진 원정은 끔찍할 정도로 가혹했다. 오죽하면 전투로 입은 아군의 피해보다 추위로 인해 생긴 피해가 더욱 많았을 지경이었다. 그 과정에서 아티야가 큰 활약을 했다.

기병대의 주위를 맴돌며 살을 에는 칼바람을 전부 차단한 것이다. 그 덕분에 그 끔찍한 추위 속에서도 동사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아티야의 활약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바람을 제 몸처럼 다루는 정령이었고, 날 세운 칼처럼 차갑고 예리한 바람은 모두가 그녀의 편이었다. 날카로움에 더해 혹한의 추위를 머금은 정령의 바람 앞에서 적들은 손발이 얼어붙어 제대로 무기조차 잡지 못했다.

그 덕분에 그렇게 많은 전투를 치르면서도 김선혁이 이끄는 중갑 기병대의 기병들은 큰 피해 없이 녹테인의 병사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럼 상 주세요.”

아티야가 허공을 떠돌다 바닥에 내려앉아 불쑥 실체화를 이루었다.

“상? 무슨 상?”

정령에게는 무슨 상을 내려야 할지 딱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난감한 표정으로 고민을 거듭하자 성큼성큼 다가온 아티야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저도 소원 들어주세요.”

“무슨 소원?”

종잡을 수 없는 태도에 그가 머뭇거리다 물으니, 아티야가 묘한 기색을 보이며 웃었다.

“그건 나중에.”

어쩐지 곤란한 소원을 빌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그는 애써 넘겼다. 설마 정령이 주인을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만들까, 생각하고 말았다.

게다가 어지간한 소원이라면 전부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이십여 차례에 달하는 전투를 치르며 아티야가 세운 공이 적지 않았고, 그 덕에 그 역시 또 한 번 성장할 수 있었다.

13에 불과했던 레벨이 어느덧 15에 이르렀고, 각종 스킬이 최대치에 근접하게 성장한 것이다.

지금이라면 그렇게 압도적인 힘의 격차를 보여주었던 아샤 트레일을 상대로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음. 왕도에 가게 되면 그라두스나 한 번 올려볼까.”

힘이 생기니 자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

김선혁이 맹스크 요새에서 원정 내내 꽁꽁 얼어붙었던 추위를 녹이고 있는 동안, 녹테인의 협상단이 칼스테인 요새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들은 당장에라도 협상을 통해 요새를 돌려받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혹한의 날씨에 협상단을 출발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모든 전후 협상은 볕이 따뜻해진 후로 미루겠다.”

하지만 이번 전쟁의 승자는 명백하게 아덴버그였고 칼자루를 쥔 것도 아덴버그였다. 아덴버그 왕국은 추위를 핑계로 협상단의 출발을 미루었고, 녹테인의 협상단은 한때는 자신들의 요새였지만 이제는 숙적의 전초기지가 된 칼스테인에 머물며 겨울을 나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봄이 왔다. 하지만 여전히 아덴버그의 협상단은 왕도를 나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양국의 중간지점에서 동등하게 협상 테이블을 마련하기를 원했던 녹테인의 협상단은 치욕을 감수하고 마치 패전국이 승전국에게 선처를 구하듯 아덴버그 왕국의 왕도로 향해야 했다.

“아국 내에서 녹테인의 협상단에게 일이 생기면 이 또한 아국의 불명예이니, 드라흔 백작과 1개 중대의 기병들로 하여금 녹테인의 협상단을 호위케 하라.”

이제 슬슬 자신의 영지가 그리워지던 김선혁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우리 왕국 역사에서도 이 정도의 대승은 드문 편입니다. 이럴 때 최대한 녹테인의 기를 죽여 놔야지요. 협상을 왕도에서 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저쪽은 패배감을 느낄 겁니다. 이를테면 상징성 같은 겁니다. 상징성.”

그가 불평을 토하니, 클라크가 입이 댓 발은 튀어나온 자신의 중대장을 달랬다.

“게다가 어차피 포상 때문에라도 왕도에 한 번 들리실 예정 아니었습니까. 좋게좋게 생각하시지요.”

그러고 보니 연이어 터진 전쟁 탓에 지난 전공의 포상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상태였다. 다른 건 몰라도 기사 하나와 마법사 하나는 꼭 챙겨야 했다.

“하긴, 받을 거 받으려면 직접 왕도로 가는 게 빠르긴 하지.”

어차피 협상 직후 논공행상이 있을 예정이라니, 협상단의 호위가 아니더라도 왕도에 들리기는 들려야 했다. 그가 생각을 고쳐먹은 듯하자 클라크가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지금 녹테인 입장에서 가장 이가 갈리는 원수가 누구겠습니까. 바로 드레이크 나이트 아니겠습니까. 그런 원수의 호위를 받다니, 왕실이 아주 이번 기회에 단단히 녹테인에게 수치를 줄 모양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여러모로 이번 호위 임무는 나쁘지 않았다. 그 역시 녹테인에 대한 원한이라면 왕국의 어느 누구에게도 못지않았던 탓이다.

“간 김에 왕녀가 약속한 것도 챙겨야겠군.”

전쟁이 끝난 후에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노라 약속했던 왕녀의 말이 떠오른 그가 뒤늦게 실실 웃기 시작했다.

**

골드레이크에 올라탄 김선혁과 일백의 중갑 기병들이 요새 앞에 도열한 채, 녹테인의 협상단을 기다렸다.

“저기 오는군.”

약속했던 시간이 되자 저 멀리서 맹스크 기병에게 둘러싸인 협상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덴버그의 영내에 들어서며 호위 병력을 제한 당한 것인지 녹테인의 병사로 보이는 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앞으로! 맹스크 제 4 경기병 중대, 중대장 조세프 아할슨입니다! 명성 높으신 드라흔 백작님과 다시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때 사스테인을 상대로 합동 작전을 펼쳤던 중대장의 반가움 가득한 인사에 김선혁이 마주 웃어 보였다.

“나 역시 살아서, 자네와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게 생각한다.”

“감개가 무량할 뿐입니다.”

아할슨 중대장은 한동안 선망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사담을 건네다, 조금은 늦게 임무를 인수인계했다.

“녹테인 협상단 17명, 드라흔 백작님께 신변을 인도합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맹스크에 그대들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으니, 여독을 풀도록.”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아할슨 중대장이 군례를 올리고는 요새를 향해 사라졌다.

“협상단을 왕도까지 책임지게 된 드라흔 백작이오.”

골드레이크에 올라탄 채 지긋이 내려다보며 건넨 인사에 협상단의 대표로 보이는 장년의 사내가 나서 마지못해 나서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인사를 건네 왔다.

“반갑소. 게르니안 로하임 아슈테인 후작이외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것이 무려 후작이나 되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건넨 인사가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상대라는 게 녹테인의 입장에서는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드레이크 나이트였으니 속이 쓰린 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가는 동안은 철저하게 지시에 따라주시오.”

하지만 김선혁의 입장에서는 적국, 그것도 원한 깊은 녹테인의 귀족을 상대로 배려를 해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호위는 맡겠지만, 좋아서 맡는 건 아니라는 기색을 풀풀 풍겨댔다.

“그렇게 하리다.”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니 아슈테인 후작이 눈을 질끈 감았다.

동정의 여지는 없었다. 이 모든 수모는 인근의 국가들을 상대로 약탈을 자행하던 녹테인이 당연히 치러야 할 죗값이었다.

“그럼 출발합시다. 왕도까지는 거리가 머니, 조금은 험한 행군이 될 수도 있소.”

그의 말은 그저 하는 말이 아니었다. 김선혁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골드레이크의 속도를 올렸다. 거의 전속력에 가까운 속도였다. 일반적인 기병들도 따라가기 힘든 그 쾌속 이동에 협상단이 기겁을 하고는 따라 붙었다.

“절대 뒤처지지 마시오. 최소한 이 서부에서만큼은. 그쪽의 정체를 알게 되면 씹어 먹겠다고 달려들 사람들이 최소한 연대 규모 이상이니까.”

그의 경고에 협상단이 더욱더 기를 쓰고 말을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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