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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 반격 (2)
“소식을 전해 들은 이방인 다섯이 드라흔 백작을 만류하러 갔으나, 오히려 똑같이 명령 불복종의 죄를 추궁당했다고 합니다.”
김우영이 애타게 찾아도 기밀 회의에 들어가 만나볼 수 없었다던 레인하르트 후작과 맹스크 사령관은 회의실에 틀어박혀 김선혁이 일으킨 소란을 속속들이 보고받고 있었다.
“그 말은 결국 두들겨 팼다는 거지?”
후작의 원색적인 질문에 전령이 망설이다 긍정했다.
“에잉. 이거 저번 일로 좀 쓸만해 졌나 했더니, 아직 멀었구만.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을 그리 무르게 대한 것을 보면, 아직 한참 멀었어.”
이방인들을 맡아달라 했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맹스크 사령관이 황당한 얼굴을 해보였다.
“물론 전시 상황에서의 명령 불복종 죄가 당장 목을 베도 할 말이 없는 중죄라고는 하나, 왕실의 관리하에 있는 이방인들을 그리 즉결처분하기에는 상황이 조금 그렇지 않은가?”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것인지 사령관의 말은 격의 없고 친근했다. 그에 대답하는 후작의 태도도 마치 친구를 대하듯 여상스러웠다.
“바로 그게 문제라는 거요. 이방인 놈들도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거든. 그래서 그런지 처음에는 안 그렇던 놈들이 어느 순간 영 못 쓰게 돼버렸지.”
왕실이 직접 관리하며 챙기다 보니 정작 일선 지휘관들이 이방인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지간히 잘못을 저질러도 왕실을 통해 징계를 요청해야 하는 상황에서 왕실의 눈치를 보느라 유야무야 일을 넘기게 된 것이다.
“차라리 이번에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한두 놈 본보기로 목을 벴으면, 나머지는 정신을 차렸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이거 하는 걸 보니까 그른 모양이요. 동향이라 그런 건지 원래 성격이 그리 무른 건지, 몇 번 두들겨 패고 말다니.”
김선혁의 조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혀를 차는 후작을 보며 맹스크 사령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그에게 신경을 쓰는 건가? 자나 깨나 왕실의 안위를 생각하느라 바쁜 후작께서 변방의 귀족 하나를 이리 신경 쓸 이유가 있나?”
사령관의 질문에 은근히 날이 서 있었다.
“어허. 이 양반이 또 발톱을 세우고 달려드시네. 아무렴 내가 드라흔 백작을 왕도로 빼갈까 봐 그러는 거요?”
“그게 후작이 할 말은 아니지. 서부에서 빼간 인재가 벌써 다섯이지 않은가.”
아무래도 후작이 혹시라도 김선혁을 왕실 기사단으로 불러들일 궁리를 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아직은 그럴 생각 없으니, 쓸데없는 걱정일랑 할 필요도 없소.”
“아직이라는 건 언젠가는 그럴지도 모른다는 말이군.”
애매모호한 대답에 사령관이 노골적으로 싫은 표를 냈다.
“걱정할 거 없다니까 자꾸 그러시네. 그리고 지금 하는 짓 보니까, 앞으로도 데려갈 일 없을 것 같소. 왕실의 기사는 필요하다면 친인도 베어낼 정도로 마음이 독해야 하지. 이런 무른 성격은 볼일 없소.”
후작의 말을 들은 사령관은 김선혁이 까다로운 후작의 기준에 들지 못했다는 걸 좋아해야 할지 안타까워해야 할지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게 믿겠네. 후작이 올 때마다 서부 국경을 떠받들 동량이 왕도로 불려가니, 이거야 원 무서워서.”
가만히 있다가는 꼼짝없이 한풀이를 들어줘야 할 판이라 후작이 은근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작이 벌인 일도 끝날 때가 되어가니, 슬슬 움직여 봅시다.”
불편한 이야기는 피하겠다는 의지가 노골적으로 보였지만, 사령관도 못 이기는 척 후작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사령관도 김선혁의 조치가 어떤 식으로 마무리되었을지 궁금하긴 매한가지였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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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이거 내가 아무래도 생각을 잘못 했군.”
널따란 연병장 한구석에 빨래처럼 내걸린 열 명의 이방인들의 상태를 본 레인하르트 후작은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처음 보고를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적당히 손을 봐주고 품으려는 행동인 줄 알았다. 그래서 그 안일함을 비웃었다. 어설프게 벌집을 건드려 일만 키운 꼴이라 생각했던 탓이다.
하지만 드라흔 백작의 조치는 결코 무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훗날의 화근을 남겨둘 정도로 어설프지도 않았다.
“적당히 두들겨준 줄 알았는데, 이거 완전히 걸레짝을 만들어놨어. 이 정도 부상이면 개중 몇 놈은 살아도 병신 신세를 면치 못하겠구만.”
후작의 말마따나 명령 불복종의 죄를 추궁당한 이방인들의 상태는 심각했다. 백작의 엄명이 있어 사제의 치유술도 받지 못하고 본보기 삼아 방치된 이방인들은 그야말로 반쯤은 시체나 다름이 없는 상태였다.
“아주 마음에 들어. 일군을 이끌 지휘관이라면 응당 이 정도 독심은 있어야지. 기어오르는 놈들은 철저하게 밟아야 제 등이 칼꽂이가 되지 않는 법이거든.”
왕실이 끔찍할 정도로 챙기는 이방인 열이 반병신이 된 꼴을 보고도 후작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다지 세련된 방법은 아니야. 차라리 본보기로 한두 놈 목을 벴으면, 일이 이렇게 커지지도 않았을 테고, 손해도 적었겠지. 아직 어설픈 면이 있군.”
“과연 드라흔 백작이 그걸 몰랐을까?”
후작의 말에 맹스크 사령관이 알 듯 말 듯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럼 사령관께서는 백작이 전력의 약화를 알면서도 무시했다고 생각하는 거요?”
만약 사실이라면 그 무책임한 행동에 추궁이라도 할 듯, 후작의 기세는 사나웠다. 하지만 그에 반해 맹스크 사령관은 여전히 느긋한 태도였다.
“후작도 너무 왕도에 너무 오래 처박혀 있었어. 아니면 중부군 출신이라 팔이 안으로 굽는 겐가.”
“그게 무슨 말이요.”
“이들이 참전하지 않는다고 과연 전력이 약해질지 아닐지는 두고 봐야 안다는 말일세.”
아마도 사령관은 실전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이방인들을 데려가 봐야 오히려 발목만 붙잡힐 거라는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드라흔 백작 스스로가 그러했듯이, 이들도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소? 한둘 쯤 본보기로 삼고 나머지는 잘 굴리면 쓸만한 기사가 될 텐데, 어찌 그리 근시안적인….”
“레인하르트 후작.”
맹스크 사령관이 정색을 하고 후작의 말을 잘라냈다.
“후작이 간과하는 게 있네. 이들을 성장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하물며 이번 전쟁은 국경 안쪽이 아닌 그 너머에서 치러지는 것일세. 이들이 이곳에서 하듯 저 너머에서 강짜를 부린다면, 아군의 피해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는 말이야.”
사령관은 신음조차 내뱉지 못한 채 미동도 없는 이방인들을 보며 마뜩찮은 얼굴을 해 보였다.
“지지는 않겠지. 드라흔 백작은 그 명성만큼 능력이 있는 자니까. 이런 자들을 데리고도 어떻게든 잘 해낼 걸세.”
“그럼 된 거 아니요? 그 정도의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이들은 키울만한 가치가 있는 자들이요.”
사령관과 후작은 그간의 친근한 태도가 무색하게 첨예하게 대립했다.
“후작은 아직 드라흔 백작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군. 드라흔 백작의 출신이 어땠는지 기억하는가?”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백작은 조장급도 아닌 말단 기병에서부터 시작한 자라네. 밑에서부터 그들과 함께 구르며 함께 싸워왔지. 그런 백작에게 있어 병사들은 동료이며 전우일세. 필요하다면 희생해도 될 존재들이 아니란 말이지. 백작은 최소한 초인들의 성장을 위한 밑거름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병사들을 밑거름으로 쓰겠는가.”
사령관은 단언했다. 말단에서부터 시작한 드라흔 백작만큼 병사들을 아끼는 자는 없으며, 그러니만큼 소수의 이방인들을 성장시키고 공을 세우기보다는 당연하게 병사들의 생환에 더 중점을 두었을 거라고 사령관은 확신에 차 있었다.
“잊지 말게. 전장은 초인들의 놀이터가 아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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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이 당당한 귀족이듯 나 또한 당당한 자작이요. 작위의 높고 낮음은 있으나 당신은 날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오. 나는 서부군 소속이 아닌 왕실 직속이니까.”
변명이랍시고 주워섬긴 김우영의 말에 김선혁은 차라리 웃고 말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멍청해도 이렇게 멍청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로 멍청한 자는 근래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마법사 이은서는 오만했을지언정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고, 정령사 안유정은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 움직이는 자제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에 반해 김우영은 어떠한가. 전시 상황의 위중함을 판단할 눈치도 없었고, 정치적 판단을 고려해 상대와 협상을 하는 수완도 없었다. 갖고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병과에 대한 자부심과 오만함뿐이었다.
운 좋게 상급 병과로 전직해 어쩌다 패거리의 중심이 된 자의 됨됨이는 그렇게 얕고도 보잘 것 없었다.
“그게 네 변명인가.”
“왕녀께서 요새에 계신다는 걸 잊지 마시오.”
끝까지 못난 모습을 보이는 김우영은 정말로 최악의 인물이었다. 하는 말마다 왕실을 언급하고 이를 방패삼으려고 하니, 그로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날 정도였다.
“하기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넘어왔으니, 개중에 너처럼 멍청한 놈이 있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지.”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간 보아온 이방인들마다 유능하고 태도가 진중했던 것이 도리어 신기한 일이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넘어왔으니 개중에 이런 무능하고 아집에 찬 인물이 있는 게 당연하다 여긴 것이다.
“검.”
김선혁의 말에 클라크가 망설임 없이 제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주었다.
“들으라. 자작 김우영은 동료들을 사주하여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도록 만들었고, 이는 전시 상황에서 즉결 처단해도 과하지 않은 중죄이다. 하지만 김우영은 끝까지 왕실을 방패삼아 뉘우치는 태도조차 없으니 참작의 여지가 없다.”
판관과도 같은 근엄한 말에,
“하여 나는 상관된 도리로 그 죄를 엄하게 추궁하여 다시는 이와 같이 기강이 해이해지고 아군의 화기를 해치는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겠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우영은 왕실의 비호를 믿는 것인지, 여전히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여유도 오래 갈 수 없었다.
성큼성큼 다가선 김선혁이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두른 것이다.
쓰걱.
소름끼치는 소음과 함께 어깨부터 피를 왈칵거리며 퍼득 거리는 팔뚝이 바닥에 떨어졌다.
“어?”
김우영은 휑하게 비어버린 어깨를 보며 멍한 얼굴을 해 보였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여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죄의 중함을 생각하면 단숨에 목을 쳐도 과하지 않지만, 네놈에게 기회를 주겠다. 너는 앞으로 나와 함께 부대의 선봉을 맡을 것이다. 내가 물러나기 전까지는 도망칠 수도 없고, 내 곁에 끝까지 남아야 할 것이다.”
그의 선언에도 김우영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핏발 선 눈으로 잘려나간 어깨와 바닥에 떨어진 팔뚝을 번갈아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아, 아아아악!”
한참 늦은 비명이 그제야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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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열넷이 반죽음이 되었고, 하나는 완전히 병신이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떠돌았다. 병사들은 드라흔 백작의 조치에 당연하다는 반응이었고, 개중에는 당장 목을 쳐도 이상하지 않을 중죄를 너무 무르게 처리한 게 아니냐고 과격하게 떠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던 자들도 연병장에 본보기 삼아 방치된 이방인들의 꼴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반죽음이라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모진 손속에 납득한 것이었다.
가장 애가 탄 것은 서부군과 중부군의 자존심 싸움을 핑계로 어영부영 움직이던 중부군 소속 중대장들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상관의 명령에 핑계를 대지 않았고, 호출이 떨어지면 눈썹이 휘날리게 달려와 자리를 지켰다. 혹시라도 뒤늦게나마 자신들에게 불똥이 튀지 않을까 염려하는 눈치였다.
한동안 어수선했던 요새의 분위기가 안정이 되고, 원정 준비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때쯤 돼서 왕녀가 나섰다.
그녀는 자신을 따라온 사제들에게 지시해 부상당한 이방인들을 치료해주었다. 김선혁도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이미 원하던 대로 지휘권을 공고하게 확립한 이후였던 탓이다.
“으으….”
사제의 치료를 받은 이들 중에는 김우영도 있었다. 신앙 깊은 사제의 고매한 치유술 덕에 잘려져 나간 팔도 다시 붙일 수 있었다. 마치 왕녀가 나설 것을 예견이라도 한 듯, 김선혁의 수하 하나가 잘려져 나갔던 팔뚝을 온전하게 돌려준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잘렸다가 붙은 팔은 온전하지 않았다. 움직임이 다소 부자연스러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조금이라도 힘을 쓸라치면 끔찍한 고통이 찾아와 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김우영.”
“네? 네!”
김우영은 김선혁과 마주칠 때면 마치 뱀 앞의 개구리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운 좋게 상급 병과로 전직한 것 빼고는 특별한 게 없는 자였으니만큼, 감히 원망하고 복수할 마음을 품는 대신 납작 엎드린 것이다.
“팔이 어느 정도 회복되는 대로, 기동 훈련에 참가하도록.”
온몸을 골고루 두들겨 맞아 당분간은 거동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들에 비하면, 김우영의 상세는 차라리 깔끔했다. 그저 팔 하나가 불편했을 뿐, 다른 상처는 없었던 덕이다.
그렇게 김우영을 포함한 원정대가 출진을 앞두고 마지막 훈련에 박차를 가하는 동안, 왕녀가 김선혁을 불러들였다.
“만족하는가.”
가타부타 설명도 없는 왕녀의 말에 김선혁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였을 뿐이다.
“그럼 되었노라. 애초에 그대에게 그들의 생사여탈의 권한을 준 것은 나였으니, 혹여 이번 일로 문제가 생긴다면 이에 대한 책임 역시 내가 짊어지겠노라.”
왕녀는 이방인 열다섯 중 열넷이 원정대에서 제외되어, 자신의 부탁이 무색하게 되었음에도 그리 기분 나쁜 기색이 없었다.
“부디 그대의 앞길에 무운이 있기를 바라겠다. 무사히 돌아와 다시 이야기할 그 순간을 고대하고 있겠노라.”
왕녀는 짧게 인사를 남기고는 눈발이 멈춘 어느 날 요새를 떠났다. 그리고 그 다음날 맹스크 요새의 병력이 일시에 요새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