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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 반격 (1)
중부군 소속의 기병 지휘관들을 상대로 소집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이제껏 소집 명령을 무시하고 불응했던 이들이 이제 와서 그의 명령을 들을 리가 없었다. 마지못해 끌려 나온 이들이라고 해봐야 각 기병대의 말단 지휘관급 인사들뿐이었다.
그들은 텅 빈 자리를 보며 민망한 얼굴을 해 보였다. 가재는 게 편이라지만, 출진을 코앞에 두고 번번이 이런 민망한 상황이 벌어지니 눈치가 보였던 탓이다.
“이게 다 모인 건가?”
드라흔 백작은 크게 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실망하지도 않았다. 그저 여상스러운 말투로 한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지휘관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다.
“중대장님께서는 현재 급작스러운 용무가 생긴 관계로….”
“저희 중대장님께서도….”
왠지 지금 나서서 변호하지 않으면 무서운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본능적인 예감, 지휘관들이 황급히 나서서 제 중대장을 변호했다.
“그렇겠지. 어련하시겠어. 상관의 소집에도 이리 번번이 불응할 정도니 얼마나 중요하고 급한 일이겠어. ”
여전히 평이한 말투였지만, 지휘관들도 슬슬 확신이 서고 있었다. 이 자리가 드라흔 백작이 주는 마지막 기회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도 어지간하면 좀 나왔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말을 마친 백작이 뒤에 늘어서 있던 제 수하들에게 몇 마디 지시를 내렸다.
“당장 하던 일 중단하고 내가 보잔다고 전해. 핑계도 변명도 더 이상은 용납하지 않을 거라고.”
그 말에 절도 있게 군례를 취해 보인 사내들이 흩어졌다.
“앉아. 앉아서 편히들 기다려. 아무래도 시간이 오래 걸릴 거 같으니까.”
몇 번이나 백작이 권했지만, 지휘관들 중에 자리에 앉는 자는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군기 바짝 든 신병처럼 부동자세를 취한 채, 가만히 백작의 눈치를 살폈을 뿐이다.
시간이 흐르고 지시를 받고 흩어졌던 백작의 수하들이 돌아왔다.
“앞으로!”
중부군의 자부심을 앞세워 이제껏 소집에 응하지 않았던 중대장들과 부관들이 슬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그들도 이번 소집 명령이 최후통첩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던 모양이다.
“그래. 바쁘다 들었는데, 만사 제쳐놓고 와줘서 고맙다.”
차라리 그간의 일을 트집 잡아 한바탕 했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저리 비꼬듯 고맙다 말하니 중대장들은 뭐라 변명도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끝까지 나오지 않은 자는 열다섯인가.”
가만히 백작을 다시 살펴보니 짜증도 불쾌함도 떠오르지 않은 표정이 덤덤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다소 뻣뻣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중대장들은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하고 말았다.
백작의 덤덤한 말투가 어쩐지 도살해야 할 돼지의 수를 헤아리는 도살자의 그것처럼 들렸던 탓이다.
“얼굴 봤으니, 오늘 소집은 이걸로 마치겠다. 해산.”
미처 백작의 의중을 파악하기도 전에 해산 명령이 떨어졌다. 기껏 여기까지 걸음을 했는데 바로 돌려보내는 행동에 불평을 표할 만도 했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아무래도 많이들 바쁘신 모양이니, 한가한 내가 직접 찾아뵙는 수밖에 없지.”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에 모두가 망설이고 있을 때, 백작이 제 수하들을 앞세우고 어딘가로 향했다.
**
“정말 우리 안 가봐도 될까?”
사내의 말에 한데 모여 앉은 이방인들의 표정에 께름칙하게 변했다.
“지금 중대장들도 전부 나갔다는데, 우리만 이러고 있다가 진짜 큰일 나는 거 아니냐고.”
“맞아. 이번에는 핑계고 뭐고 대지 말고 무조건 모이라던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이방인들은 방금 전에 다녀간 전령의 태도를 떠올리며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전시에 명령 불복종은 즉결 처분해도 할 말이 없다던데….”
즉결 처분이라는 말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건 빽 없고 능력 없는 일반 병사들 이야기고. 우리가 어디 그냥 보통 병사야? 제깟 놈이 백작이고 나발이고 감히 우리를 어떻게 건드리겠어. 게다가 우리 소속이 어딘지 잊었어?”
개중 하나가 자신들의 소속이 왕실임을 내세워 동료들을 안심시켰다.
“중앙의 내로라하는 귀족들도 우리를 함부로 못 대하는데, 그깟 서부의 촌놈이 무서울 게 뭐가 있어.”
말을 하면서 점차 스스로도 안심이 된 것인지, 나중에 가서는 상관을 욕하고 험담하기를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하급 병과로 출발한 드라흔 백작이 대수롭지 않은 공을 좀 세웠다고 상관의 자리에 올라 거들먹거리는 꼴이 영 보기 불편했다.
까놓고 말해서 그래 봐야 결국은 일반 기병들 몇을 처리한 공에 불과하지 않은가. 자신들도 전투에 참가하기만 하면 그 이상의 전공을 올릴 자신이 있다며, 마치 승작이 당연한 것처럼 떠들어댔다.
“그리고 무슨 일 생기면, 우영이 형님이 막아줄 거다. 상급 병과에 자작 위면 중앙에서도 먹어주는 끗발 아니냐. 우리는 형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자신들의 파벌을 이끄는 리더이자 상급 병과로 전직하여 꽤나 입지를 다진 김우영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오자, 이방인들은 이제 완전히 안심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니 걱정 말고 우리는 어떻게 하면 공을 세울지나 궁리해보자고. 이번에 전부 승작해야 안유정이나 이은서 쪽 애들한테 안 밀리지.”
“끙. 안유정이 그년이 쥐꼬리만 한 공 세운 걸로 쭉쭉 나가니, 우영이 형님이 영 기분이 안 좋은 거 같더라. 게다가 어디 듣도 보도 못한 용기병이라는 새끼까지 설쳐대니, 형님 속이 속이겠냐.”
죽고 죽이는 전쟁을 코앞에 두고도 파벌 싸움에만 혈안이 된 모습이 한심하기 그지없었지만, 이들은 그런 생각 자체가 없는 듯했다. 그저 어떻게 하면 상대 파벌들을 누르고 자신들의 입지를 다질지, 그것만이 유일한 관심사처럼 보였다.
“어쨌건, 혹시라도 애들 눈치 보다가 슬쩍 나가는 일 없도록 해. 형님 기분 나빠지면 전부 죽어 나가는 거 알지?”
“형님 성질이야 우리가 제일 잘 알지. 그건 걱정마. 형님 난리 치는 꼴 보기 무서워서라도 개인행동 하는 놈은 없….”
쾅!
그 순간 갑작스레 문이 터져나가며, 일단의 무리가 방 안으로 난입했다. 난데없는 상황에 당황한 이방인들이 대화를 멈추고는 각자 무기를 챙겨 들었다.
“누구냐!”
“쯧쯧. 얼마나 바쁘시길래 불러도 오지 않나 했더니. 여기서 티타임이라도 갖고 계셨나.”
문을 열고 들어선 사내는 칼을 뽑아 들고 버럭 고함을 지르는 이방인 다섯을 보고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도 안 오길래 내가 직접 찾아왔다.”
그의 말에 이방인들이 그제야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리고는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칼 안 내려? 명령 불복종 죄에 상관 시해 미수도 포함해줄까?”
“너, 너는….”
“김선혁…?”
상황 판단이 느려도 어쩜 이렇게 느린 것인지, 반말로 지껄여대는 이방인들의 태도에 사내, 김선혁의 눈썹이 단번에 솟구쳤다.
“너? 김선혁?”
뒤늦게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은 것인지 이방인들이 당황한 얼굴을 해 보였지만, 어느 누구 하나 나서서 사과를 하는 자가 없었다.
“아무리 당신이 백작이라고 해도 이렇게 함부로 남의 방에 들어오는 건….”
개중에 하나는 나서서 항의를 하기까지 했다.
“하. 이 새끼들이 정신을 못 차렸네.”
김선혁은 화를 내는 대신 차라리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온화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았고, 차라리 찡그리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살벌해 보였다.
꿀꺽.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기세에 압도당한 이방인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그런 그들을 보며 끝까지 웃는 낯으로 성큼성큼 걸어 바로 앞에 섰다.
“클라크 선임 조장. 전시에 명령 불복종 죄는 보통 어떻게 처리하지?”
숨결이 닿을 듯 이방인의 앞에 바짝 붙어 선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지휘관의 판단 여하에 따라 다릅니다. 다만 지금 같은 경우는 심각할 정도로 부대의 기강을 해치고 조직력을 저하시키는 중대한 죄를 저지른 경우에 속합니다. 즉결 처분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아주 아주 강력하게 처벌을 해도 된다는 뜻이군.”
그제야 김선혁이 작정하고 찾아왔음을 눈치챈 이방인들이 한곳에 뭉쳐 항의했다.
“우리는 왕실 소속이다! 만약 불만이 있으면 왕실을 통해 정식으로… 억!”
꼿꼿하게 버텨대던 사내 하나가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이방인들이 뒤늦게 고함을 쳤다.
“지금 뭐하는 거….”
이번에도 그는 상대가 말을 마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또다시 주먹이 날아들고, 항의하던 사내가 그대로 바닥에 나자빠졌다. 쓰러진 사내는 코가 깨진 것인지 줄줄 흘러내리는 핏물에 금세 엉망진창의 꼴이 되었다.
“뭐하냐고? 지금 즉결 처분하는 중이시다.”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대화는 없었다. 그저 고함과 비명만이 울려 퍼졌을 뿐이었다.
“끄아.”
난생처음으로 누군가의 살기를 접한 이방인들은 그 자신하던 스킬도 능력도 발휘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때리는 대로 두들겨 맞고, 차는 대로 걷어차이는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그 김선혁이라는 자가, 감정에 못 이겨 난동을 피우면 그냥 맞아줘. 아주 좋은 구실이 될 테니까.’
개중에 비교적 상황을 판단할 정신이 있던 이방인들도 있었지만, 파벌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김우영의 지시를 떠올리며 격렬하게 저항하는 대신 무력하게 맞는 것을 선택했다. 이번 일을 통해 상대를 실각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윽!”
혹시라도 화가 나서 달려들면 정말로 하극상이 되어버린다. 처음에는 정신없이 얻어맞던 이방인들은 훗날의 복수를 위해서 이를 악물고 구타를 참아냈다.
오늘의 치욕과 고통이 더 큰 복수가 되어 돌아올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이쯤이면 상대도 훗날의 여파를 생각하여 물러났어야 했는데, 상대의 구타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 잠깐… 억!”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이방인들 중 하나가 손을 뻗어 김선혁을 만류하려다가 발에 채여 이빨이 깨졌다.
“왕실이 두렵지도 않… 끄악!”
“이러고도 무사할….”
항의를 하던 자들이 차례로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더욱 가혹한 구타가 이어졌다.
“으으. 그, 그만….”
“제, 제발….”
처음에는 무서워서 맞았고, 나중에는 복수하려고 맞았다. 그리고 지금은 정말로 아프고 무서워서 감히 반항할 수가 없었다.
“제발 그만….”
이방인들은 뒤늦게 상대가 적당히 끝낼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겁에 질렸다.
하지만 김선혁은 손과 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애초에 이들을 적당히 두들겨 패서 말을 듣게 해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처음 올 때까지만 해도 두들겨 패서라도 끌고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밖에서 이들의 대화를 듣고는 모든 생각이 바뀌었다.
전쟁을 병정 놀음으로 알고 제 출세에 이용할 생각이나 하는 쓰레기들, 이들과 함께 전장에 나서는 것은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안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김선혁은 차라리.
“반쯤 죽여 놓으면, 이번 원정에 끼고 싶어도 못 끼겠지.”
짐덩이를 깡그리 치워놓고 홀가분하게 전장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
김선혁의 난동은 금세 맹스크 요새 전체로 퍼져나갔다. 중부군 소속의 이방인들 다섯이 동료를 변호하기 위해 나섰다가 휘말려 똑같은 신세가 되었다. 그 결과 남은 자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왕녀께서 요새에 아직 머물고 계시다. 빨리 가서 상황을 알리도록.”
이방인들의 리더, 김우영이 인상을 찡그리며 동료 하나를 왕녀에게 보냈다.
“생각보다 막 나가는 놈이었어. 아주 물려도 된통 물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김우영은 초조해하지 않았다. 왕실 소속의 이방인들을 함부로 상하게 했으니 상대가 곧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왕녀께서 추위에 몸이 상하셨는지, 오늘 오전부터 주무시고 계신답니다. 형님. 호위 기사들에게 말을 남기긴 했지만, 언제 깨어나실지 모르니….”
그런데 전령 삼아 보냈던 왕녀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레인하르트 후작님은?”
“어제 저녁부터 맹스크 사령관님과 기밀 회의 중이시라….”
일이 꼬여도 어떻게 이렇게 꼬였는지, 하필이면 지금 이럴 때 아프고 기밀 회의인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혹시 이거 짜고 치는 거 아닙니까? 뭔가 낌새가 좋지 않은데….”
“그럴 리가 있나. 왕실이 이방인들을 얼마나 끔찍하게 관리하는지 몰라서 그래?”
“근데 저쪽도 이방인인 건 마찬가진데….”
상황을 당장 무마할 수 없게 되었지만, 상대가 이미 크나큰 과오를 저질렀다는 증인은 넘치도록 확보했다. 그래서 김우영은 비열하게 웃고 말았다.
하지만 그 안일함도 잠시뿐이었으니, 문제의 미친개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명령 불복종 죄의 책임을 물으러 왔다.”
미친개가 피 묻은 주먹을 들어 올리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변명이 있다면, 빨리해. 이제부터는 변명할 기회도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