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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8. 영웅과 범인의 차이 (2)
“나는 맹스크로 가겠다.”
어쩌면 돌아서자마자 지금의 성급한 결정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맹스크로 가지 않으면 평생을 더 큰 후회 속에서 살게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김선혁은 차라리 전쟁에 참가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런 그의 결정에 클라크와 살아남은 고참병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라앉은 눈빛을 보니 그들도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대다수의 생존자들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기야 무리도 아니었다. 부대가 와해될 정도로 끔찍한 전투를 치르고 바로 또 전쟁에 참가하라는 건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었다. 그래서 김선혁은 그들을 나무라는 대신 적당히 그들이 잔류할 구실을 주었다.
“나머지는 전부 남아서 부상자들을 돌보도록 한다.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기왕이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하면 좋겠지.”
그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내도 있었고, 자괴감에 불끈 주먹을 쥐는 자도 있었다. 그는 그들이 어떤 모습이든 차별하지 않고 다가가 하나씩 어깨를 끌어안아 주었다.
“수고했다. 그리고 부상자들을 부탁한다.”
“잘 싸워주었다.”
“빨리 회복해서 다시 함께 말을 달릴 수 있기를 바란다.”
사내들이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푹 숙인 얼굴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김선혁은 도리어 그들에게 웃어주었을 뿐이다.
“너희들이 있어서 마음 편히 떠날 수 있다. 고맙다. 그리고 큰 짐을 남겨서 미안하다.”
어쩌면 전쟁터로 향하는 자들보다 남겨진 자들이 짊어져야 할 짐이 훨씬 더 무거울지도 몰랐다. 다시는 창을 잡을 수 없게 된 부상자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건, 전쟁터로 떠나는 자들이 아닌 남겨진 자들이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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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은 났지만 당장 주둔지를 떠날 수는 없었다. 클라크를 비롯한 고참병들의 몸이 완전히 낫기까지 다소 시간이 필요했던 탓이다. 물론 김선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골드레이크가 아직도 깨어나지를 않은 것이다.
- 숙면 중, 허기
하지만 그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이미 상태 창을 확인하여 골드레이크의 부상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드레이크가 깨어나지 않는 것은 딱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탈피.
언젠가 허물을 벗고 더욱 거대해졌던 것처럼 골드레이크는 다시 한번 성장을 위한 수면에 들어간 것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이따금 골드레이크가 파묻힌 대지를 찾을지언정 억지로 괴수를 깨우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골드레이크가 너무 늦지 않게 깨어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며칠이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제들의 집중적인 치료 속에서 클라크를 비롯한 고참병들의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다. 김선혁 역시 완전히 고갈되었던 기력이 거의 예전만큼 돌아온지라 언제든 주둔지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치 때를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골드레이크가 깨어났다.
크르르르르.
이방인들의 맹공에도 견뎌내며 톡톡히 그 단단함을 입증했던 비늘들은 이제는 한 겹이 아니라 이중 삼중으로 돋아나 틈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지난 전투에서 집중적으로 공격받아 너덜너덜하게 변했던 가슴의 상처는 그 위로 돋아난 두꺼운 비늘로 인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회복한 모습, 더욱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머리통 한가운데에 솟아난 뿔은 마치 거대한 창을 매단 것 같았고, 목둘레를 따라 돋아난 투박한 돌기는 사자의 갈기를 보는 것 같았다.
흙더미 속에서 몸을 일으킨 골드레이크는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덩치가 커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지 단단해 보일 뿐이었던 생김새가 훨씬 더 공격적으로 변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전보다 몇 배는 강하고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와….”
김선혁은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전의 골드레이크가 단단한 장갑차(裝甲車)였다면, 지금의 골드레이크는 포 대신 뿔을 달고 적진을 분쇄하는 전차(戰)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크르르르르.
골드레이크가 자신의 변화를 자랑이라도 하듯 낮게 목을 울렸다. 그 순간 비스듬히 눕혀져 있던 목의 돌기가 완전히 일어났다.
“어, 음….”
제 딴에는 과시랍시고 한 행동이겠지만, 김선혁이 보기에는 영락없는 목도리 도마뱀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는 모호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강해 보이기는 한데, 분명 강해 보이는 건 맞는데, 묘하게 우스꽝스럽다. 아무래도 골드레이크가 강력한 힘을 얻는 대가로 희생한 것이 적지 않은 것 같았다.
“가급적이면 돌기는 세우지 말자.”
그의 말에 골드레이크가 금세 돌기를 도로 눕히며,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
골드레이크가 깨어난 즉시 김선혁은 지원자들과 함께 주둔지를 나섰다. 그가 다시 전방으로 향한다는 소식에 주둔지의 거의 모든 병사들과 민간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거대한 괴수의 위엄에도 굴하지 않고 다가와 한마디라도 말을 건네기 위해 애를 썼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은혜 갚겠습니다.”
병사들은 성치 않은 몸으로 군례를 올리며 경애의 감정을 표현했고, 민간인들은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없이 그의 무사귀환을 기원했다.
“가자!”
김선혁이 골드레이크의 속도를 올리자, 클라크와 기병들이 말허리를 걷어차며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그들은 맹스크 요새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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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서부군의 사령부가 위치한 맹스크 요새는 그 중요성 탓에 항시 3개 연대에 가까운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거기에 중부군의 2개 연대 병력이 더해지자 요새는 그야말로 병사들로 미어터질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병사들이 많이 몰려들었음에도 요새는 조용하기만 했다. 마치 폭풍전야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요새가 간만에 소란스러워졌다.
“드레이크 나이트가 왔다!”
“드라흔 백작께서 오셨음을 알리고, 어서 요새의 문을 열어라!”
그 어떤 확인 절차도 없었다. 요새의 병사들은 김선혁을 발견한 즉시 법석을 떨며 문을 열었다. 하기야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세상 어디에도 거대한 드레이크를 타고 다니는 기사는 그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금빛 괴수는 그 자체로 그의 신분증이나 다름이 없었다.
“편하긴 한데, 눈에 너무 뜨이는군.”
애초부터 조용히 요새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은 없지만, 끝도 없이 몰려드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벌써부터 숨이 막혀올 지경이었다. 김선혁의 앓는 소리에 클라크가 웃으며 대꾸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좋게 생각하십시오. 덕분에 눈 맞으면서 고생하지 않게 되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진눈깨비 내리는 서부의 황야를 달려온 지라 손발이 꽁꽁 얼어있던 기병들은 아무려면 어떻냐는 표정이었다.
“그만큼 많은 공을 세웠다는 뜻 아닙니까. 이제는 좀 받아들이십쇼.”
클라크의 말마따나 근래 벌어진 전쟁에서 김선혁만큼 혁혁한 공을 세운 자는 없었다. 아덴버그 기병들의 천적이라 불리던 사스테인 기병단을 전멸시키고, 절대적으로 패배가 확정되었던 22연대 주둔지 방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기사와 마법사들이 더 이상 전장에 나서지 않는 시대에 그만큼 눈에 도드라지는 행보를 하는 자는 없었다.
“그래도 대단하긴 하군요. 폐하께서 직접 오시면 모를까. 이 정도 환대를 받는 군인이 중대장님 말고 또 있을까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해도 맹스크 요새 병사들의 환대는 과했다. 그리고 그들은 곧 그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기사와 마법사들 같은 초인이 나서지 않는 전장에서 드레이크를 탄 이방인만큼 믿음직한 아군은 없었다. 강력한 우군의 존재는 곧 자신들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올라간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곧 출진을 앞둔 병사들이 그의 합류에 저리 열광을 할 만도 했다.
저벅, 저벅.
환호하던 병사들이 갑작스레 조용해졌다. 왜 그런가 했더니 레인하르트 후작과 맹스크 사령관을 뒤에 세운 왕녀 오필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병사들은 뭔가 기대라도 하는 듯한 얼굴로 어린 왕녀와 새로운 영웅의 만남을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트레일 경과 레인하르트 후작이 그렇게 말했음에도 믿지 않았건만, 정말로 왔구나.”
평소에도 온갖 수식어를 붙여 알아듣기 힘든 왕녀의 말이었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심했다. 앞뒤 다 자르고 혼자 탄식인지 감탄인지 모를 말을 늘어놓는 왕녀를 보며 그가 고개를 숙였다.
“묻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말도 많지만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몸으로 먼 길을 달려온 그대를 붙잡고 있을 수도 없구나.”
다행스럽게도 왕녀는 그를 오래 잡아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잘 왔다. 왕국의 창이여. 맹스크는 그대를 환영한다.”
그녀의 짧은 인사에 침묵하고 있던 병사들이 갑작스레 환호했다. 이 아무것도 아닌 대화 속에서 무엇을 본 것인지 병사들은 완전히 흥분해 있었다. 그 연유를 알 길이 없었던 김선혁과 왕녀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해 보였다.
아마도 그들은 앞으로도 알지 못하리라. 병사들이 무엇을 기대했고, 무엇을 보고 환호했는지 아마도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
겨울이 찾아온 요새, 그리고 흩날리는 진눈깨비 속에서 마주한 어린 왕녀와 드레이크 나이트의 모습은 다른 이들이 보기에 제법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새하얀 모피를 두른 왕녀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고결하고 아름다웠고, 그 앞에 무릎을 꿇은 기사와 고개 숙인 괴수의 모습은 장엄하기만 했다.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두 남녀의 모습은 마치 그림과도 같았고, 아주 오래전 대륙을 질타하던 영웅의 일대기를 떠올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한겨울 눈 내리는 요새에서 이루어진 왕녀와 용기병의 만남은 그렇게 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들이 영웅시의 시작을 지켜보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고, 그 모든 것이 그들을 열광에 이르게 만든 것이었다.
어린 왕녀와 용맹한 용기병은 그만큼 영웅담의 시작이라고 하기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그 사실을 알 길이 없는 왕녀는 단순히 드레이크 나이트에 대한 병사들의 신뢰가 상상 이상이라고 생각했을 뿐이고, 김선혁은 반대로 왕녀의 인기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다고 여겼을 뿐이었다.
“올 줄 알고 있었다.”
흥분한 병사들 탓에 왕녀의 안위가 염려가 된 호위 기사들이 어린 왕녀를 모시고 사라졌고, 레인하르트 후작이 남아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후작님께서 올 수밖에 없게 만드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도 오늘은 좀 사람 같구나. 전날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나아 보인다.”
시큰둥한 얼굴이지만 의외로 말투에는 걱정의 기색이 느껴졌다. 그게 신기해 그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제가 사람 같지 않았습니까?”
“온 세상의 짐이란 짐은 전부 혼자 떠안은 것 같았지. 술이라도 먹고 털어버리면 될 걸, 고집스럽게 잔을 부여잡고 버티길래 내 일부러 술을 퍼먹였다. 이제 좀 내 깊은 뜻을 알겠냐.”
“아….”
그날 보였던 레인하르트 후작의 태도가 그저 복수 때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실제로 레인하르트 후작과의 대작 이후로 가슴 속에 커다란 돌이 내려앉은 것처럼 꽉 막혀있던 속이 조금은 트였다. 뒤늦게 그 모든 것이 후작의 배려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고맙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낯 간지러운 말은 그만해라. 온몸에 두드러기가 날 지경이니까.”
이제는 후작의 이런 날 선 태도가 단순히 성격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김선혁이 넉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관님.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한 켠에 남아 어떤 말도 하지 않았던 맹스크 사령관이 그제야 그의 말에 아는 척을 해왔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그가 아닌 저 너머를 향해 있었다.
“죄송합니다. 고집이 워낙 완강해서 도저히 꺾지 못했습니다.”
노사령관이 제 손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던 그가 고개 숙여 사과를 했다. 사령관이 쓴웃음을 한 번 지어 보이고는 손을 저었다.
“내가 확실히 은퇴할 때가 된 모양이네. 이렇게 자꾸 사심이 앞서서야….”
사령관은 근래 들어 부쩍 나이가 든 모습이었다. 일전의 정정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적당히 쉬고 아무 때고 사령부로 찾아오게. 이야기는 그때 나누도록 하지.”
맹스크 사령관이 금세 자리를 뜨자 레인하르트 후작이 입맛을 다셨다.
“저 양반이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 부쩍 저런단 말이야.”
“괜찮으시겠습니까? 자책감이 크신 것 같은데.”
지난 전쟁의 피해를 자신의 무능함 때문이라 생각하는 사령관이다. 그런 개인적인 감정이 혹시라도 작전에 지장을 주는 것은 아닐까 우려되어 그렇게 말하니 후작이 황당하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
하기야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령관을 걱정하기에는 자신의 경험이 아직 일천했다. 그가 민망한 얼굴을 해 보이자 레인하르트 후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금세 정색을 했다.
“여기까지 왔다는 건 각오가 되었다는 뜻이렷다.”
“네. 각오는 충분히 했습니다.”
그가 대답하자 후작이 언제 그렇게 정색을 했냐는 듯이 시원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 더 이상 꺼릴 게 없군.”
그런데 그 웃음이 심상치 않았다. 그가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나니, 후작이 냉큼 따라붙으며 말했다.
“네가 중부군을 맡아라.”
“네?”
갑작스러운 말에 그가 얼빠진 얼굴을 해 보이자, 후작이 뒤늦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중부군 소속의 이방인들을 전부 네가 맡으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