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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5. 전설의 시작 (4)
그렇게 눈을 뜬 김선혁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밧줄과 사슬로 온몸이 얽힌 채 난동을 부리는 골드레이크와 밧줄의 반대편에 매여 씩씩거리며 용을 쓰는 전마들의 모습이었다.
“아….”
뒤늦게 정신을 잃기 전의 상황을 떠올린 그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 널린 시체를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가 이내 적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고정되어 있던 화살들이 꺾이고 비틀리며 눈앞이 번쩍 뜨일 정도의 고통이 밀려왔다.
“으억!”
억눌린 비명 소리에 소란을 일으키던 기병들과 골드레이크가 순간적으로 멈췄다. 소란스럽던 현장에 밧줄을 끄느라 씩씩대는 말의 숨소리만이 남았다.
“대, 대장!”
“자작님!”
정적은 길지 않았다. 뒤늦게 그를 발견한 사내들이 비명과도 같은 환호를 내지른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흉성을 잃지 않은 드레이크 탓에 감히 달려들지는 못하고 먼 곳에서 발만 동동 굴러댔다.
“일단 골디부터 풀어줘.”
타오르는 불속에 내던져진 듯 끔찍한 통증에 정신이 혼미했지만, 김선혁은 꾸욱 참아내며 명령했다. 자신 이상으로 상처가 깊은 골드레이크가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듯 보였던 것이다.
털썩.
팽팽하던 밧줄이 느슨해진다 싶더니 여기저기서 서걱거리며 잘려나갔다. 겨우 자유를 얻은 골드레이크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내리깔았다.
푸르르르.
코앞까지 다가선 괴수의 콧잔등이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깨어진 비늘 사이사이로 박혀든 창만 수십 자루, 그 만신창이의 몰골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정신을 잃고 난 뒤에 골드레이크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주인을 지켜낸 것인지 알 것 같았다.
크르릉.
채 멎지 않은 피가 꿀럭대며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본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울컥해서 골드레이크의 코 위로 손을 얹었다. 팔이 떨어질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지만, 참아야 했다. 위태롭게 숨을 몰아쉬는 충성스러운 괴수는 충분히 칭찬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고맙다. 골디. 네가 날 지켜줬구나.”
골드레이크가 낮게 목을 울리고는 천천히 목을 뉘였다.
“고생했다.”
느리게 껌뻑거리는 눈동자가 이내 어느 순간이 되자 완전히 닫히고, 거칠게 몰아쉬던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 들어간다.
“이제 편히 쉬어.”
말이 끝나는 순간 땅이 흔들린다 싶더니, 거대한 괴수가 빨려들 듯 대지 속에 파묻혔다.
“아….”
그 절절한 모습에 이들이 먹먹한 얼굴을 해보였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보병 몇이 기어이 눈물을 흘렸다.
“뭣들 하십니까! 지금 바로 자작님을 치료하지 않고!”
그 사이에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줄리앙이 사제들을 다그쳤다. 숙연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사제들이 뒤늦게 달려와 치유술을 퍼부어댔다.
온몸에 박혀 있던 화살이 뽑혀져 나가고, 그 위로 성스러운 빛이 뒤덮였다. 다섯의 사제가 펼친 치유술이 김선혁의 상처를 빠르게 재생시켰다.
“감사합니다.”
청량한 감각이 온몸을 주무르는 사이에 감사 인사를 표하니, 사제들 중에 가장 나이가 지긋한 노사제가 온화하게 웃어주었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으신 모양입니다. 신께서 이런 명백한 죽음마저도 눈 감고 모른 척 해주신 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지요.”
고통이 많이 가라앉은 그가 몇 번이나 더 감사의 말을 건네고는 곧장 드레이크 기병대를 불렀다.
“아….”
그런데 그렇게 그의 곁으로 몰려든 대원들의 수가 턱없이 적었다. 그 빈자리가 눈을 후벼 파는 것 같아 당장에라도 눈을 감고 싶었지만, 그는 지휘관의 의무를 잊지 않았다.
“피해 상황.”
갈라지고 쉬어버린 그의 음성에 클라크가 나서서 대답했다.
“드레이크 기병대! 총원 구십사! 전사 삼십팔! 열외 이십이! 현재 인원 서른 넷!”
보고를 하는 클라크 본인도 몸이 성치 않은지 안색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클라크는 비틀대면서도 끝까지 꼿꼿한 자세로 보고를 이어갔다.
“마지막 전투에서 열넷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녀석들 중에도 다시는 창을 잡을 수 없는 놈들이 많습니다. 그나마 제 발로 걸을 정도로 몸이 멀쩡한 건 저희들뿐입니다.”
안타까움에 입이 열리지 않았다. 왈칵 치솟는 눈물에 김선혁은 눈에 힘을 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숙였다간 당장에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던 탓이다.
“그래도 녀석들은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대장님이 이렇게 살아있고, 민간인들도 모두 살았습니다. 그러니 그런 얼굴 하지 마십시오. 사나이는 눈물로 동료를 전송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클라크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미 지난 사스테인과의 전투에서 절반 이상의 동료들이 전사했다. 새롭게 병력을 보충받았지만, 전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고참병 태반이 이번 전투로 죽어버렸다.
비교적 경험이 많고 완숙한 고참병들이 위험한 곳을 도맡고, 선봉에 섰던 탓이었다. 기존의 대원들이 대다수 전사한 지금, 드레이크 기병대는 더 이상 예전의 드레이크 기병대가 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살아남은 몇몇 기병들의 얼굴이 그리도 씁쓸한 것이리라.
“수고했다. 그리고….”
사제들이 하나둘 치유술을 펼치던 손을 떼어내고는 숙연한 얼굴로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살아남아 주어서 고맙다.”
그의 말에 기병들이 몸을 바로 세우고는 가슴을 두들겼다. 그 말 없는 군례에 너무도 많은 의미가 담겨 있어 김선혁도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
당장 위급한 상처는 치료되었지만, 고갈된 기력과 체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게다가 출혈이 워낙에 심했던지라 당분간은 꼬박 요양에만 매달려야 할 판국이었다. 홀로 설 힘도 없어 들것에 의지해 주둔지로 실려 와야만 했고, 그런 김선혁을 수많은 이들이 반겨주었다.
“드레이크 나이트 만세!”
“드라흔 자작님 만세!”
수백의 기병들을 향해 홀로 뛰쳐나가 사투를 벌였던 용기병의 모습은 모두의 기억에 강렬하게 새겨졌다. 그가 어떻게 싸웠고, 어떻게 쓰러졌는지, 마지막 순간 의식을 잃고도 꽉 움켜쥔 창을 놓지 않았던 그를 모두가 지켜봤고 기억했다.
“용기병 만세!”
“자작님 덕분에 저희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환호를 지르는 사람들의 눈가에 염려가 가득했다. 그와 한 짝을 이루어 전장을 누비던 금빛 괴수가 더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애써 안타까움을 억누르며 환호했다. 마치 자신들의 환호가 그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보병들 자리도 많이 비었네.”
가만히 김선혁을 따르던 줄리앙이 그의 말에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막판에 자작님과 드레이크 기병대를 구원하겠다고 뛰쳐나가는 바람에 많이들 죽었습니다. 연대장도 전사했고 중대장들도 모두 전사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애써 만들어낸 미소로 그를 위로했다.
“그래도 민간인들 중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팔 거들겠다며 나선 사내 몇이 다치긴 했지만, 모두가 무사합니다.”
“그래. 그거면 됐지. 그거면 된 거야.”
애초에 민간인을 지키기 위해 기동력마저 포기하고 한 자리에 버티고 서서 적을 맞아 싸운 것이다. 만약 그들마저도 지키지 못했다면 지금보다 몇 배는 마음이 무겁고 참담했으리라.
“잠이 오는군. 영 몸이 좋지 않아….”
“조금 주무십시오.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으셨습니다.”
“그럴까. 그럼 조금 있다가 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게슴츠레 뜨여있던 그의 눈이 감겼다. 그리고 이내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
“기적입니다. 사실 어느 정도 후유증은 각오해야 하지 않나 싶었는데, 이런 회복세라니 도무지 믿겨지지가 않습니다. 누가 지금의 자작님을 보고 전날의 그 처참함을 떠올리겠습니까.”
몇 차례에 걸친 치유술 끝에 상처가 크게 호전되자 노사제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야말로 신께서 굽어살피신 격이니 그 은총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노사제의 말에 김선혁은 대답 대신 작게 웃었다.
신이 굽어살피신 게 아니다. 자신이 이토록이나 빠른 회복세를 보이는 것은 신의 은총 때문이 아니었다.
- 수(水) 속성의 효과로 상처의 통증이 둔화됩니다.
- 수(水) 속성의 효과로 상처가 빠르게 회복됩니다.
- 수(水) 속성의 효과로 상처의 후유증 발병 가능성이 현저하게 낮아졌습니다.
그 모든 건 속성을 지배하는 용기병의 힘 덕이었다. 덕분에 위중한 상처를 입고 며칠이나 방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을 연명할 수 있었고, 이렇듯 빠르게 회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사실을 세세하게 말해줄 수는 없었던 탓에 그는 적당히 노사제의 열광적인 설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보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비록 미물이라지만 주인을 위하는 마음이 여느 기사 못지않았는데, 삼가 애도를 표합니다.”
주름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신을 찬양하던 사제가 안타까운 어조로 그를 위로했다. 순간적으로 무슨 말인가 눈만 말똥거리던 그는 뒤늦게 그 애도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골드레이크 말입니까?”
“네. 왕녀께서 친히 이름을 지어주셨다더군요. 자상하신 분이니 이 소식을 들으시면 얼마나 안타까워하실까요.”
그 진한 애도의 감정에 김선혁이 고개를 저었다.
“안 죽었습니다.”
“그렇지요. 모든 생명체는 죽어도 죽은 게 아니니, 신의 품 안에서 영생하게 마련입니다.”
“그게 아니라, 그 녀석 안 죽었다는 말입니다.”
상처 입은 괴수를 그가 직접 땅에 파묻는 것까지 본 노사제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소리를 하니 심각한 얼굴로 머리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하는 얼굴을 해 보였다.
“원래 흙 속을 좋아하는 놈이라. 흙 속에 있어야 상처가 빨리 회복하니까 땅속에 묻어둔 겁니다.”
골드레이크의 속성은 땅이었고, 지기(地氣)가 강한 곳일수록 힘이 강해지고 신체 능력이 상승하는 특성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땅 깊은 곳일수록 회복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었다. 지맥이라도 근처에 있다면 더욱 좋으련만, 일단 아쉬운 대로 김선혁은 골드레이크를 되도록 깊은 땅속에 묻어 회복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것만으로도 이 생명력 질긴 아룡이 죽음을 모면하기에 충분했다.
“분명 제 눈에는….”
“절대로 매장한 게 아닙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는 영락없이 생명이 다한 괴수를 매장한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그는 왜 요즘 들어서 사람들이 자신을 볼 때면 그렇게 애틋한 얼굴을 해 보이는지를 알게 되었다.
“허어. 그런 기이한 일이 다 있나.”
“아마 좀 지나면 상처를 다 회복하고, 배고프다고 저를 들들 볶을 겁니다.”
만약 골드레이크가 잘못되었다면 당장 스테이터스 창이 알려주었을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테이터스를 확인하는 그의 눈에 떡하니 아룡의 상태가 보였다.
- 회복을 위한 수면, 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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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몸이 회복된 김선혁이었지만, 한 번 고갈된 기력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육체적 피로와는 별개로 그는 한참을 더 침상에 누워 지내야 했고, 22연대의 주둔지를 떠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주둔지로 귀한 손님이 찾아올 거란 소식을 들었다.
“이번 전쟁으로 터전을 잃고 가족을 잃은 백성들을 위무하고 전선의 병사들을 치하하기 위해 왕녀께서 직접 행차하실 예정이랍니다.”
“아. 왕녀께서?”
적의 잔당까지 말끔하게 소탕되었다지만, 국경이 멀지 않은 곳까지 왕족이 찾아오는 것은 절대로 안전하지 않았다.
“번거롭게….”
괜히 또 귀찮은 일이 생길까봐 걱정부터 든 그가 그렇게 말을 하니, 줄리앙이 황급히 그의 말을 잘라냈다.
“중부군을 일부 거느리고 오신다니, 자작님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어쩌면 기사단 하나가 통째로 호위로 나설지도 모르지요.”
그런 정도의 방비가 있다면 부상자에 불과한 그가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와락 인상을 찡그린 것은 골드레이크를 끔찍이 아끼는 왕녀가 무슨 소리를 할지 몰라서였다.
게다가 그녀가 하사한 용기병 전용 무기도 부러지고 깨어져 고철이 되어버렸으니, 왕가의 하사품이라면 가보 모시듯 하는 이곳 세상의 분위기상 괜스레 찝찝한 마음이 든 것이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몸이라도 멀쩡하면 핑계라도 대고 자리를 뜨련만, 그는 아직 운신이 자유롭지 않았고 골드레이크 역시 아직까지 회복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끙. 알았어.”
“그리고 맹스크 사령관님께서도 피해를 입은 부대들의 정비가 끝이 나는 대로, 이곳을 찾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흩어지고 갈라져 마을을 지키다 피해를 입은 보병 중대가 적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을 개편하여 새롭게 부대를 정비하려면 꽤나 머리가 아플 것이다. 하지만 사령관의 주변에는 유능한 참모들이 많이 있었으니, 그가 걱정할 거리는 아니었다.
“모르겠다. 일단 살았으니, 그걸로 된 거지.”
절반쯤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전장에 뛰어들었다. 이제껏 수도 없이 힘을 갈고 닦으면서도 단 한번도 이렇게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인 적은 없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속성의 힘만큼은 미량이나마 남겨두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는 생명이 경각에 달한 상태에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힘을 끌어다 썼고, 그 결과 풍 속성의 힘이 고갈되어 아티야가 소환 해제되고 말았다. 덕분에 무방비하게 적의 저격에 노출되어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전화위복이 되었다. 마지막까지 쥐어짜내 텅 비어버린 그릇 안에 야금야금 차오르기 시작한 풍 속성의 기운이 어느 순간이 되자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주인님.”
그 과정에서 소환하지도 않은 아티야가 세상에 현신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전과는 너무도 달라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