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83화 (83/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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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4. 전설의 시작 (3)

전투는 끝이 났다. 주둔지를 습격했던 녹테인의 기병들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소수만이 살아남아 도주했다.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주둔지의 방어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승리를 위해 치러야 할 희생이 너무도 컸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결사 항전하던 22연대의 보병들이 절반 이상 희생되었고, 용맹하게 주둔지를 뛰쳐나가 적의 기세를 제압한 기병대는 전력이 반 토막이 났다. 그나마도 인근 영지에서 사제단이 지원을 오지 않았다면 얼마나 희생이 늘어났을지 알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제단이 오지 않았다면, 저 녀석들도 내일을 볼 수 없었을 겁니다. 한숨도 못 주무셨을 텐데, 지금이라도 눈 좀 붙이시지요. 앞으로도 좋은 일 하셔야 할 분께서 혹시 쓰러지시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닙니까.”

전사한 지휘관들을 대신해 거듭 감사 인사를 건네는 선임 보병 조장의 말에 사제가 퀭한 얼굴로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이 정도로 쓰러질 정도로 저희 사제들의 수행이 얕지는 않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틀을 꼬박 샌 탓에 눈 밑이 거뭇거뭇하게 변해버린 사제들이었지만, 퀭한 가운데에도 눈동자만큼은 정광(晶光)이 흐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상 그들이 치료한 부상자의 수는 많지 않았다.

“안타깝습니다. 저희가 조금만 용기를 냈다면, 더 일찍 왔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전투는 부상자들마저도 팔 거들고 나서야 할 정도로 격렬했고, 결국 과격한 전투가 끝이 났을 때는 대부분의 부상자들이 전사하고 말았다. 사제단이 당도했을 때는 주둔지의 한곳에 눕혀둔 전사자들의 시체만이 가득했을 뿐이었다.

“그보다 드라흔 자작은 여전합니까?”

하지만 이제 와서 죽은 자들만 떠올리고 한탄만 할 수는 없었다. 모든 부상자들을 치료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이의 부상만큼은 손도 대지 못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제 주인을 생각하는 충성심이야 기특하지만, 정작 그 때문에 치료를 할 수가 없으니, 참으로 답답할 노릇입니다.”

온갖 방법을 다 시도해보았지만 괴수는 제 주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제 놈도 당장 숨이 넘어갈 것처럼 숨을 꼴딱대면서도 끝까지 주인을 지키고 버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괴수를 제압하자니 소란 중에 드라흔 자작이 잘못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어 함부로 자극할 수도 없었다.

“오늘 중으로 기병들이 어떻게든 수를 낸다니, 그들에게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겠군요.”

사제의 말에 선임 조장이 목책 밖 평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날카로운 발톱은 깨어져 몇 개 남지 않았고, 철갑을 두른 듯 단단하던 육신은 흉물스럽게 헤집어져 피를 울컥댄다. 금빛 찬란하던 비늘 위로 온통 검붉은 핏물을 뒤집어 쓴 괴수는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수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주변에 가득한 시체와 흩어진 병장기, 전투는 이미 끝이 났건만 괴수의 주변만큼은 아직도 전투의 한복판인 것처럼 피냄새가 자욱했다.

바스락.

작은 발소리에 피 웅덩이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괴수가 힘겹게 목을 치켜들었다.

크르르르륵.

경계하듯 목을 울려대는 괴수의 행동이 마치 상처 입은 어미 새가 제 새끼를 보호하는 듯, 절박해 보였다. 하지만 그 경고조차도 위협적이라기보다는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위태로웠으니 보는 이가 다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오늘 기병들이 찾아올 거야.”

언제 다가온 것인지, 체구 작은 소녀가 그런 괴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마 이번에는 어떻게든 너를 치우려 하겠지. 더 이상 시간이 없거든.”

괴수는 경계심이 가득한 눈동자로 소녀를 노려보았다.

“그 과정에서 네게 위해가 가해질 수도 있어. 너도 자작님만큼이나 많이 다쳤으니까 죽을 수도 있어. 아니. 아마 죽을 거야. 자작님께서 무사히 깨어나신다면 많이 슬퍼하실지도 몰라. 어쩌면 화를 내실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래도 방법이 없어.”

하지만 거대한 괴수를 앞에 두고도 소녀는 위축되기는커녕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직 제대로 된 종자 노릇도 못했는데, 이렇게 자작님을 보낼 수는 없어. 나 말고도 자작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골디 네가 그걸 망치도록 둘 수는 없어.”

중상을 입고 쓰러진 제 주인이 멍청한 괴수 탓에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 소녀, 줄리앙의 목소리는 이제 설득을 넘어 날카롭게 날 선 원망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러니 제발 비켜줘. 골디. 자작님은 이런 곳에서 돌아가실 분이 아니야. 그러니 골디. 제발.”

원망을 쏟아내던 줄리앙이 금세 또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하지만 괴수, 골드레이크는 여전히 낮게 목을 울리며 그녀를 위협할 뿐이었다.

한참이나 더 말을 걸던 줄리앙이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그녀가 완전히 저 멀리 떨어진 주둔지의 낮은 목책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들고 버티던 골드레이크가 푹, 하고 고개를 쓰러트렸다.

크르르.

피가래 끓는 신음을 내뱉으며 괴수는 제 품에 눕혀진 주인을 바라보았다.

온몸에 화살이 꽂힌 채 부러진 창을 땅에 박아 넣은 채 버티고 선 괴수의 주인은 여전히 전장 한복판에 있는 것처럼 굳건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감은 눈은 뜨이지 않았고, 창을 움켜쥔 손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으니, 그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미약하게나마 움직이는 가슴뿐이었다.

크르르르르.

미미하게 움직이는 주인의 가슴께를 바라보던 괴수가 다시 힘없이 목을 늘어트렸다.

**

오색찬란한 검광에 갈기갈기 찢겨진 중갑 기병의 신체가 허공을 날고, 목 잘리고 발이 베인 전마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하지만 그 강력한 검력으로도 모든 기병들을 막아낼 수는 없었고 검을 사용하던 이방인들은 죽음을 불사한 돌격에 짓밟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게 되었다.

지휘관을 잃은 녹테인의 기병들은 황급히 몸을 뺐고, 잠깐 사이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드레이크 기병대 역시 자신들의 중대장과 함께 빠르게 물러났다.

“또 온다!”

하지만 적들은 완전히 물러난 것이 아니었다. 흩어지고 엉망으로 망가진 대열이 수습되자 다시 한 번 파상공세를 퍼부었다. 큰 피해를 입기는 했으나 300여 명 가까이 남은 적 기병대는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궁기병들의 집중 사격에 궁병들이 먼저 쓸려져 나갔고, 목책을 넘은 기병들의 칼과 창에 수많은 창병들이 희생되었다. 돌격의 피로가 채 풀리지 않은 드레이크 기병대가 다시 목책 안쪽을 따라 돌며 담을 넘은 적을 상대했다.

피아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적들이 물러간다!”

저녁이 되자 적이 물러났다. 그리고 다음 날 해가 뜨기가 무섭게 다시 한 번 공격이 시작되었다.

전날 전투에서 대부분의 기력을 소모한 김선혁은 아직 회복이 되지 않는 몸으로 전투에 나섰다. 하지만 괴수나 기수나 모두 지치고 부상을 입은 상태인 건 마찬가지인지라, 전날과 같은 위용을 보일 수는 없었다.

겨우 겨우 적들의 파상공세를 막아냈을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도 공방이 이어졌다. 김선혁은 비틀거리며 겨우 창을 움켜잡은 채 골드레이크 위로 올라탔다. 마지막을 예고하듯 목숨을 도외시한 적 기병을 요격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만 버티면, 적을 몰아낼 수 있어! 그러니 조금만 더!”

수많은 동료들이 전사했다. 그리고 그보다 많은 보병들이 죽었다. 하지만 김선혁은 사자를 애도하는 대신 산 자들을 위해 싸우는 것을 선택했다.

그는 크게 소리쳐 외치고는 적을 향해 단신으로 돌격했다. 이미 큰 피해를 입은 드레이크 기병대원들은 목책을 넘는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주둔지에 남겨둔 채였다.

“오늘만 버텨라. 골디.”

이방인들에게 당한 가슴팍의 상처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골드레이크는 그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하지만 무적이라 생각했던 괴수의 비늘이 일부나마 벗겨진 것은 크나큰 약점이었다.

적들은 집요할 정도로 상처를 노리고 창을 찔러댔고, 시간이 갈수록 골드레이크의 상처는 더욱 깊어졌다.

미안하다. 골디.

울부짖는 괴수를 보면서도 김선혁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적의 허리를 끊지 않으면 밀려드는 공세를 아군이 버틸 수가 없었다.

“어?”

한창 창을 찔러가며 적들을 상대하던 김선혁은 무언가가 어깨를 파고드는 이질적인 감각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개를 숙인 그의 눈에 깃만 남겨두고 깊게 파고든 화살 한 대가 보였다.

“적 지휘관이 맞았다! 쏴!”

낯익은 음성에 고개를 돌리니 전날 전사한 줄 알았던 이방인 궁사가 이쪽을 노려보며 고래고래 악을 쓰고 있었다.

“쏴! 쏴! 저 새끼만큼은 죽여야 해!”

그 광기 어린 지시에 궁기병 수십이 활을 들어 올렸다.

“쏴!”

이윽고 화살 비가 쏟아져 내렸다.

‘주인님! 저도 이제 더 이상은!’

이미 쉬지 않고 이어진 전투에 속성의 힘마저 고갈된 상황, 아티야가 한 차례 화살 비를 막아내고는 그대로 흩어져 버렸다. 화살 비를 막아주던 투명한 우산이 사라진 그 순간, 그는 여지없이 치명적인 소나기에 노출되고 말았다.

파바박.

전날의 과격한 전투로 깨어진 갑주들 틈으로 십수 대의 화살이 파고들었다.

“아….”

기이할 정도로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돋아난 것처럼 화살이 박혀든 몸뚱아리가 마치 제 것이 아닌 듯했다. 가만히 상처를 바라보던 그가 작게 속삭였다.

“가자, 골디.”

그 말에 상처 입은 드레이크가 쿵쾅거리며 내달렸다.

“너, 너만큼은 죽여버릴 거야! 이 괴물 새끼야!”

악에 받친 이방인 궁사가 섬광을 잔뜩 머금은 화살을 속사포처럼 날려댔다.

그는 더 이상 화살을 막아낼 그 어떤 수단도 갖고 있지 않았고, 계속해서 화살이 몸에 박혀 들었다. 하지만 그는 돌진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화살을 쏘아대던 이방인 궁사의 가슴에 창을 박아 넣을 수 있었다.

그렇게 최후의 초인을 전장에서 제거한 그는 갑작스레 몰려드는 통증에 눈앞이 하얗게 바라고 말았다.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던 그가 골드레이크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주춤주춤 물러나던 적 기병들이 그를 보고는 눈을 번뜩였다.

그들은 흉폭한 괴수를 넘어 그를 노리는 대신, 멀리서 창을 던졌다. 순식간에 수십의 창이 날아들었고, 괴수가 온몸으로 창을 막아냈다. 하지만 포위하듯 둘러싼 적의 모든 공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그가 창을 휘두르며,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공격을 쳐냈다.

“기병대 출진!”

저 멀리서 그의 위기를 발견한 드레이크 기병대원들이 황급히 대열을 갖추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오지 마.

꽉 막힌 듯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피만 울컥대며 쏟아져 나왔다.

오지 말라고. 이 바보들아.

달려드는 기병들을 보며 김선혁이 손을 저었다. 하지만 저 의리밖에 모르는 멍청이들은 돌아갈 줄을 모르고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들을 베어내면서 계속해서 달려오고 있었다.

오지 마! 안 돼!

무리한 돌격으로 속도를 잃은 기병대가 적에게 둘러싸이는 것을 본 김선혁이 마지막 힘을 끌어 모았다.

“돌아가! 이 멍청이들아!”

이미 완전히 고갈되어버린 바람의 힘 대신 거칠고 웅혼한 땅의 기운이 솟아났다. 순간적으로 기력이 돌아온 그가 모든 힘을 담아 창을 비스듬히 대지 위로 박아 넣었다.

쾅!

땅이 터져나가며 아군을 둘러싸고 있던 녹테인의 인마가 허공을 날고 구덩이에 처박혔다.

“돌아가라고, 이 바….”

채 말을 끝내기도 온몸에 힘이 빠지며, 소리가 사라졌다. 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완전히 침묵뿐이던 세상에 어느 순간 이질적인 소리가 파고들었다.

크아아아!

상처 입은 괴수가 울부짖는 소리, 말이 울부짖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머릿속을 울려댔다.

“드레이크가 힘이 빠졌다! 이대로 끌어내!”

“말, 말이 더 필요해! 놀고 있는 새끼들도 다 달라붙어!”

개중 침착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지시를 내렸다.

으으.

잠에 취한 듯 몽롱한 와중에 김선혁은 눈을 떴다. 하지만 눈꺼풀이 천근만근이 된 것처럼 떠지지가 않았다.

크아! 크아아아!

“으악!”

“끌어당겨! 끌려가지 말고, 달리라고!”

이 영문 모를 소란에 멍하니 있던 그가 순간적으로 눈을 번쩍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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