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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78화 (78/305)

<-- 34. 전장을 달리는 드레이크 -->

국경이 침범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즉시 김선혁은 드레이크 기병대를 소집했다. 날이 추워지며 외부 활동을 엄격히 자제하고 있던 기병대는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완전 무장을 한 채 집결했다.

“녹테인 놈들이 국경을 침범했다.”

중대장이 된 이후로는 처음 겪는 전쟁, 김선혁은 다소 긴장된 얼굴로 기병대의 대원들을 바라보았다. 대체적으로 고참 기병대원들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고, 뒤늦게 보충된 기병들은 기대와 두려움으로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전선에 합류해봐야 알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은 듯하다.”

전령을 통해 들은 전선의 상황은 영 좋지 않았다. 맹스크 요새 일대에 주둔 중인 상당수의 병력은 국경에 운집한 대규모의 적 보병대를 견제하느라 발이 묶인 상태였고, 2개 중대의 기병대만을 급파한 상태라 하였다.

그것만으로는 이미 내부로 파고든 적 기병대를 제대로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국경을 넘은 적의 수는 5개 중대 규모로 추정되며, 비교적 몸이 가벼운 경기병대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왕국의 서부군만으로도 충분히 소탕이 가능한 병력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중대 규모의 적이 부대를 잘게 쪼개 사방으로 흩어졌다. 덕분에 아군이 해야 할 일이 늘어나버렸다.”

이십여명으로 구성된 최소 기동 단위까지 쪼개진 적의 기병대는 각기 독립적으로 움직이며 국경 인근의 마을들을 유린하고 있었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잘 훈련된 1개 규모 이상의 보병대들을 각 마을에 주둔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정도의 방비로는 서부 전체를 지켜내기에 충분치 않았다. 각기 독립된 듯 사방을 헤집는 적 기병대들은 언제든 하나로 합쳐질 위험이 있었고, 자칫 잘못하면 수비를 위해 배치한 보병대마저도 잡아먹히는 일이 생길 수가 있었다. 급파된 맹스크의 기병대 역시 이런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기에 보병대의 지원을 받으며 소극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적과 동일한 규모의 기병대, 혹은.”

김선혁은 잠시 텀을 두고 드레이크 기병대의 대원들을 살펴보았다.

“최소한 3개 중대 규모의 경기병대를 압도할 만한 전투력을 가진 정규 기사단이 필요하다는 게 사령관님의 판단이다.”

20여명의 기사들과 80여명의 견습 기사들로 이루어진 정규 기사단이라면 3개 중대 규모의 기병대가 아니라 국경을 넘은 적 전체를 상대하고도 남을 여력이 있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기사단의 참전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안타깝게도 왕국은 이번 전쟁에 기사단을 투입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단순히 민간인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기사단을 투입한다는 건 지나치게 위험한 결정이었다. 중요자원을 허망하게 잃을 가능성은 둘째치고서라도 자칫 잘못하다가는 적 기사단을 도발하여 전면전으로 전쟁이 확전될 가능성이 있었던 탓이다.

그런 복잡한 사정이 있었기에 생겨난 것이 바로 사스테인 기병단이었다. 그들은 기사가 되기에는 검에 대한 재능이 부족했지만, 일반 기병들을 압도할 정도의 저력은 있었다. 실제로 얼마 전까지 왕국이 입은 피해 중 상당수가 그들로 인해 생겨난 것이었다.

한때 많은 귀족들이 견습 기사들을 추려 사스테인과 같은 부대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귀족들은 녹테인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정예 기병대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왕실은 그런 귀족들의 의견을 거부했다. 언제든 기사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재원들을 그렇게 소모할 수 없다며 계획 자체를 무산시켰다.

상대적으로 인재를 아끼는 아덴버그의 분위기가 도리어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다 지나간 과거였다. 그렇게 왕국을 괴롭혀대던 사스테인의 악마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니, 지난 전쟁에서 그들을 전멸시킨 새로운 기병대가 탄생한 것이다.

“사령관님은 우리가 충분히 그럴 역량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시다.”

그게 바로 드레이크 기병대였다.

많은 동료들을 잃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영광이 빛 바래는 것은 아니었다. 고참병들은 빛나는 전적을 떠올리며 자부심에 가득찬 얼굴을 해보였고, 보충병들도 서서히 그들의 분위기에 동화되었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사령관님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그 한마디에 기병들의 눈빛이 완전히 변했다. 방금 전까지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망설임과 두려움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대신 떠오른 것은 투쟁심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직접 우리가 누구인지 입증하는 것뿐이다.”

서서히 고조되어 가는 군기를 보며 김선혁이 힘주어 물었다.

“우리를 이 자리에 있게 만든 이름이 무엇이냐.”

“사스테인 슬레이어!”

불같은 함성 대신 꽉 억눌러 절제된 대답이 들려왔다.

“우리가 증명해야 할 이름은 뭔가!”

“드레이크 기병대!”

구호처럼 외친 한마디에 고조되었던 군기가 폭발했다.

**

드레이크 기병대는 해가 뜨기가 무섭게 최소한의 식량만을 각기 말에 실은 채 영지를 나섰다.

“오오!”

“번쩍번쩍하구만!”

“늠름한 자태 보소!”

짙푸른 제복 위로 빛나는 철갑을 차려 입은 기병들이 줄지어 마을을 빠져나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것은 바로 김선혁의 모습이었다.

크르르르.

잔뜩 날이 선 기병들의 기세에 자극을 받아 낮게 목을 울려대는 금빛의 드레이크가 대열의 선두에 서 있었다. 일백에 가까운 기병들이 내뿜는 기세보다 드레이크 하나의 존재감이 더욱 압도적이었다.

“그럼 영지를 부탁한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영지 걱정일랑 하지 마시고.”

“크. 엠마만 아니었으면 나도 따라가는 건데.”

요나슨과 한센, 잭슨은 이번 출정에서 제외되었다. 만에 하나라도 적 기병대가 라인펄까지 진출할 경우 영지를 방어할 사람이 필요했다. 세 명의 숙련된 기병과 고련을 통해 만능 전투원으로 성장한 50명의 영지병이라면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으리라.

“광산에 배치된 보병들 역시 긴밀한 협조를 약속했으니, 자작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마법사 아인스트 제네거도 영주의 출정이 무사히 끝나기를 기원해주었다.

“부디 추운 날, 몸이 상하지 않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안토인 몽테뉴의 배웅을 받으며 김선혁은 영지를 떠났다.

**

전선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급박해졌다. 적들은 철저하게 수비의 잇점을 빼앗고, 공격하는 쪽의 유리함을 지켜가고 있었다. 넓게 펼쳐진 전선에서 일어나는 산발적인 전투는 아군의 피로를 지나치게 강요했다.

필요에 따라 유기적으로 뭉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녹테인 기병들을 상대하느라 급파된 기병들은 한계까지 말을 혹사시키며 온 사방을 누비고 다녀야 했고, 전장에 넓게 흩어진 보병대들은 빠르게 지쳐가고 있었다.

“마을들은 포기해야 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보병들만 헛되이 잃을 뿐입니다.”

“기병대의 말들이 지쳤습니다. 여기서 더 몰아붙였다간 제 스스로 붕괴될 겁니다.”

서부 전체를 아우르는 방어전에 일선의 지휘관들은 차라리 마을을 포기하고 전선을 축소시킬 것을 제안했지만, 사령부의 입장은 단호했다.

“국경에 거주중인 민간인들 중 상당수가 병사들의 가족이다. 만약 우리가 피해의 누적을 핑계 삼아 저들을 포기한다면, 어느 누구도 왕국을 위해 싸우지 않게 될 것이다.”

제 가족을 지킨다는 것은 그 자체로 훌륭한 동기이자 소명의식이 되기도 했지만, 이런 경우에는 도리어 서부군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녹테인이 전력을 분산시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전선을 확대시킨 것은 아덴버그 왕국의 서부군이 지닌 이런 약점을 꿰뚫어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드라흔 자작이 이끄는 드레이크 기병대가 전선에 도착했습니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온통 비보(悲報)뿐인 전황, 그 와중에 합류한 정예 기병대의 소식은 그늘져 있던 사령부의 얼굴을 밝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현재 드레이크 기병대는 24연대를 뒤에 두고 빠르게 진군중이며,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적을 우선적으로 섬멸할 거라 보고해왔습니다.”

“모든 전선에 그들의 합류를 알려라. 믿을 수 있는 아군의 참전에 모든 병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단지 참전만으로도 아군의 사기를 올리는 기병대라니 얼마나 대단한가. 맹스크 사령관은 그 이름값을 톡톡히 이용할 작정이었다.

“적이 들을 수 있게 사방에 소문을 내도록. 만약 운이 좋다면, 흩어진 적들을 하나로 모을 수도 있을 게다. 사스테인을 꺾은 드레이크의 이름은 충분히 그 정도 무게가 있을 테니까.”

사령관의 지시에 전령을 태운 준마들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

“저희는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24연대와 함께 전선에 도착해 전황을 수집한 김선혁이 연대장에게 말했다.

“이미 아군 기병중대 하나가 상당한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절대로 안 될 말일세. 적들이 마구잡이로 일대를 헤집고 다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언제든지 2개 중대 규모로 다시 뭉칠 수 있도록 철저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있네.”

연대장은 가뜩이나 부족한 기병 전력을 위험에 노출시킬 수 없다며 극구 반대했지만, 그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야 죽었다 깨나도 빠르게 움직이는 적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의 작전은 섬멸전이 아니야. 우리는 땅이 얼어붙어 적들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까지만 전선을 유지하면 되네. 무리하게 병력을 소모할 필요가 없어.”

전례 없는 유격전을 펼치며 아군을 괴롭히는 녹테인이지만, 혹한의 계절이 찾아오면 언제나 그래왔듯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들이 노린 것은 겨울을 날 식량과 가혹하게 굴릴 노예들이었지 아덴버그 왕국의 영토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동안 민간인들의 피해는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을이 불타고 유랑민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겨울까지 버티기만 했다가는 서부 전체가 침체되고 맙니다.”

“감수해야지. 왕국의 국민들은 결코 나약하지 않아. 그들은 언제나처럼 다시 마을을 재건하고 다시 살아갈 걸세.”

도무지 씨알도 먹히지 않는 단호한 태도에 김선혁이 답답한 듯이 가슴을 쳤다.

“병사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소극적인 자세는 병사들의 신뢰를 잃게 만들겁니다.”

“만약 불만을 제기하는 자가 있다면 엄벌에 처할 걸세. 무릇 병사된 자로 왕국의 수호보다 개인을 우선하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네.”

과거 24연대의 중갑 기병 신분으로 복무를 할 때는 연대장이 제법 좋은 지휘관이라 생각했다. 함부로 병사들을 혹사시키는 일 없이 철저하게 필요한 임무만 수행하는 모습이 맹스크 사령관의 그것과 닮아있다 여긴 것이다. 하지만 그건 착각에 불과했다.

연대장은 효율을 중시하는 게 아니라 의욕이 없었던 것이었다. 전황을 타개하는 것보다는 현상유지에 급급한 모습이 무능한 지휘관의 전형이었다.

“만약 사령관님께서 그런 걸 바라셨다면, 기병대가 아닌 보병 연대들을 중앙군에 요청했을 겁니다.”

사령관을 언급하자 잠시 움찔 해보이는 연대장이었지만, 끝까지 태도를 달리 하지는 않았다.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어. 민간인들의 피해는 가슴 아프지만, 정규 기병대 하나를 만들기 위해 들이는 시간과 공에 비하면 그야말로 사소한 것에 불과하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김선혁으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연대장이 혈기 넘치는 무모함으로 치부하는 그의 계획은 철저하게 자신의 능력을 기반으로 수립한 작전이었다. 다른 기병대라면 모를까, 풍령을 통해 사방의 기척을 읽어내는데 능통한 그가 이끄는 드레이크 기병대는 적들의 기습이나 포위 섬멸전에 휘말릴 위험이 전혀 없었다.

만약 적이 부대를 하나로 뭉칠 기미가 보이면 빠르게 전선을 이탈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몇 번을 이야기 해보아도 연대장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고, 결국 그는 마침 연대장의 부관으로 참가해 있던 프레드릭에게 하소연을 했다.

“사령관에게 직접 여쭤보도록 하지. 어쩌면 자네 말대로 사령관님께서 바란 건 현상유지가 아닌 적의 섬멸일지도 모르니까.”

프레드릭은 요새로 전령을 보냈고, 고르고 고른 준마에 올라탄 전령은 불과 이틀이 지나기도 전에 사령관의 대답을 들고 왔다.

“자네와 드레이크 기병대의 독자적인 작전 수행을 허락하네.”

사령관은 그가 아닌 연대장에게 직접 지시를 내렸고, 전령이 다녀갔다는 사실을 모르는 연대장은 다소 께름칙한 얼굴로나마 독자적인 작전권을 허락해주었다.

“무리하지 말게. 자네는 모르겠지만, 전선의 병사들에게 사스테인을 꺾은 드레이크 기병대의 이름은 훨씬 더 무거운 것일세. 만약 그 믿음이 깨어지면, 마을 몇 개가 불 타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기가 떨어질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가급적이면 24연대와 하루 거리를 유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연대장의 당부에 몇 번이나 조심하겠다 대답한 김선혁이 막사를 나서 기병대원들을 찾았다.

“드디어 허락이 떨어졌다.”

전장에 도착한 뒤로는 제대로 말을 달려보지도 못했던지라 불만이 팽배해 있던 기병들이 함성을 질렀다.

“가자. 변경을 어지럽히는 도적떼를 쓸어버리러.”

그의 말에 기병대원들이 말 위에 올라탔다. 보병대의 느린 이동에 기동력이 묶여 있던 드레이크 기병대가 드디어 고삐를 풀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인프라가 워낙에 낙후되어 있는 나라라 악천후시에는 어김없이 정전이 되고는 합니다. 어제 오늘 24시간동안 무려 세 번이나 정전이 되고 몇 시간이나 그 상태가 이어지는 바람에 원고 작성이 늦어지고 말았습니다. 너른 마음으로 양해 부탁드립니다. ㅜㅜ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추천과 코멘트 역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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