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77화 (77/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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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정적이 흐르고 그의 폭언에 불쾌한 얼굴을 한 기사들이 볼멘소리를 냈다.

“지금 뭐라고...”

“입 다물고 숨부터 돌리라고. 그 상태 그대로 두들겨 맞고 싶지 않으면.”

“초면에 말이 너무...”

“너. 이름과 소속, 직급부터 밝혀라.”

괜히 나섰다가 김선혁에게 지목을 당한 기사가 낭패스러운 얼굴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코, 코널리 칙스요. 소속은 북부 호아킨 영지이며 따로 직책은 없고 제 작년에 서임을 받았소.”

“그럼 그 옆에 너는?”

“동부 케일리 남작가의 차남이며, 서임 받은 지는 4년이요.”

기세에 압도당한 기사들은 그의 질문에 마치 갓 입대한 신병처럼 군기 바짝 든 자세로 제 소속과 직급을 밝혔다.

“줄리앙. 평기사들의 대우가 어떻게 되지?”

“서부군 기준으로 평기사들의 대우는 특수병과의 조장, 또는 보병중대의 중대장에 준하는 직급이 주어지며, 실질적으로는 하급 장교의 대우를 받습니다..”

“그럼 귀족으로서 저들이 나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들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자작님께서는 무려 국왕폐하께 친히 자작 위를 서임 받은 귀족이시며, 맹스크 변경백에게 봉토를 수여 받은 라인펄 일만 영지민들의 로드(Lord)이십니다. 일반적으로 로드는 기사로서의 자질과 관계없이 상급기사와 동등한 대우가 보장됩니다.”

“그렇군. 내가 잘 못 안 게 아니었어. 난 또 저자들이 나보다 높은 자들인 줄 알았지 뭐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대화에 기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뒤늦게 자신들이 저지른 행동이 용서받기 힘든 무례이며, 하극상에 가까운 행동임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제 잘못을 인정하고 물러날 자들이라면 처음부터 이런 억지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결투를 신청하려던 것 뿐인데, 신분을 앞세워 이리도 우리를 핍박한단 말이오?”

“맞는 말이요! 그 어떤 기사도 신분을 핑계로 결투를 거절한 자는 없었소!”

그야말로 적반하장에 가까운 태도로 금세 말을 바꾸는 기사들을 보며 김선혁이 차갑게 대꾸했다.

“난 거절한다고 한 적 없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을까. 기사들이 어벙한 얼굴을 해 보이는 사이, 김선혁이 줄리앙의 도움을 받아 갑옷을 착용했다.

“처음부터 말했잖아. 숨 고르고 덤빌 준비 하라고.”

벼락의 검을 상대할 때처럼 물 샐 틈 없이 무장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급소와 중요 관절만큼은 확실하게 갑옷을 착용한 그가 마지막으로 용기병 전용 거창(巨槍)을 건네받았다. 기사들이 그 기형적으로 길고 거대한 창을 보고는 잠시 몸을 움찔 떨어보였다.

“이 정도면 전부 숨 돌렸지? 자. 이제 슬슬 정하자고. 누가 제일 먼저지?”

그 한마디에 기사들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이 위기를 빠져날까 궁리하던 교활한 눈동자가 뒤룩뒤룩 굴러가며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면, 한꺼번에 올래?”

그 꼴 보기 싫은 모습에 그가 한 번 더 도발했다.

“모욕이 지나치오!”

거칠게 소리치며 앞으로 나선 기사, 아이놀 레이널드를 본 김선혁이 물었다.

“네가 첫 번짼가?”

“다시 인사드리겠소. 동부 레이널드가의 차남 아이놀이 드레이크 나이트께 결투를 신청하오!”

여세를 몰아 결투 신청까지 끝내버린 아이놀 레이널드를 본 기사들이 아쉬움에 탄성을 내뱉었다.

“여기 모인 기사들 모두가 이 결투의 증인이 되는 걸로 하고. 바로 시작하도록 하지.”

“하아압!”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놀 레이널드가 한손반검을 양손으로 움켜잡고는 달려왔다. 김선혁은 그래도 기사랍시고 제법 기세 좋게 달려드는 아이놀 레이널드를 보며 혀를 찼다. 제 딴에는 장병(長兵)을 지닌 상대의 간격 안으로 파고들어 공격의 여지를 주지 않을 셈이었리라.

“쯧.”

지난 결투에서 벼락의 검이 바닥을 나뒹굴었을 때와 똑같은 패턴,벼락의 검이 다른 이야기는 다 해줬어도 자신이 당한 수치만큼은 쏙 빼고 이야기 해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쾅!

철갑이 부서지는 끔찍한 소음과 함께 아이놀 레이널드가 저 멀리 튕겨져 나갔다. 잠시 꿈틀대던 가엾은 기사는 어느 순간이 되자 신음조차 내뱉지 않게 되었다.

“자, 다음.”

**

운 좋게 승리를 얻은 기회주의자, 그라두스를 원하는 진짜 기사들을 피해 몇 달이나 영지를 떠나 있던 겁쟁이, 스킬이라는 이름의 이능(異能)을 통해 서임을 받은 가짜 기사, 그게 기사들 사이에 퍼진 드레이크 나이트에 대한 소문이었다.

그라두스는 탐이 나지만, 감히 왕도의 기사들에게 도전할 엄두는 내지 못한 자들이 이 가짜 기사를 찾아 서부 국경지대까지 달려왔다. 코널리 칙스 역시 그중에 하나였다.

먼저 도전하는 놈이 그라두스의 임자다.

그 역시 그러한 소문을 따라 머나먼 북부에서 서부까지 찾아왔다. 몇날 며칠을 기다려도 핑계만 댈 뿐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드레이크 나이트의 행동에 과연 소문대로 비겁한 자라 생각했다.

그럴수록 그는 끈질기게 버텼고, 그 결과 마침내 그토록이나 바라던 ‘가짜 기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당장에라도 그라두스를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입 다물어.”

마치 북풍한설을 혀끝에 품은 듯 차가운 음성을 듣는 순간 코널리 칙스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듯 거만한 시선으로 자신들을 쏘아보는 이방인의 모습은 소문과 전혀 닮은 구석이 없었다.

누가 겁쟁이고, 누가 가짜 기사라는 말인가.

드레이크 나이트는 난폭하고 사나웠다. 첫 만남부터 폭언을 서슴지 않았고, 반발하는 자들을 직접 지목해 찍어 누를 정도로 과격했다.

“이 정도면 전부 숨 돌렸지? 자. 이제 슬슬 정하자고. 누가 제일 먼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널리 칙스는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 않았다. 다른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약삭빠르게 레이널드가의 아이놀이 가장 먼저 결투를 신청했다.

눈치만 살피다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에 모두가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안타까움은 길지 않았으니, 결투를 신청한 아이놀 레이널드가 숨 몇 번 들이키기도 전에 거창에 두들겨 맞고는 실신해버린 것이다.

“자, 다음.”

내뱉고 들이쉬는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드레이크 나이트의 모습을 보며 코널리 칙스는 이를 갈았다. 멋대로 드레이크 나이트의 능력을 폄하하고 기회주의자로 몰았던 벼락의 검과 다른 기사들을 찾아가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처음 그 기세는 다 어디 갔어. 다들 나 따위는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노골적인 조롱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코널리 칙스는 차마 나설 수가 없었다. 차라리 다른 자들을 상대하다 조금이라도 힘이 빠진 뒤에 도전하는 게 유리할 거라 여겼던 탓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다른 자들도 하고 있었으니, 서로의 눈치를 살필 뿐 어느 누구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줄리앙. 그 결투 신청이라는 거, 꼭 저쪽에서만 해야 하는 거야?”

“그렇지는 않습니다.”

얄미울 정도로 명료한 종자의 대답에 드레이크 나이트가 씨익 하고 웃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 기사들이 황급히 눈을 내리 깔았다.

“음. 저 친구가 이름이...”

“동부 케일리 남작가의 차남, 나이트 케일리입니다.”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해 종자에게 이름을 묻고 나서야 하는 결투 신청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경우였다.

“좋아. 동부 케일리 남작가의 차남, 너에게 결투를 신청하지.”

황당함과는 별개로 지목당한 기사는 죽을상을 해보였다.

“저, 저는 나이트 레이널드처럼 쉽게 당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기세에 눌렸다고 해서 기사가 결투를 포기하는 법은 없었다. 케일리가의 기사는 애써 기세를 북돋으며 검 끝에 검력을 모았다.

“전력을 다 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첫 번째 결투가 검광이 피어오르기도 전에 끝이 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기사들이 아차 싶은 얼굴이 되었다. 상대의 병과가 기사가 아니며, 검력을 지니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것이다.

“그래? 그럼 나도 제대로 상대하도록 하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대한 창을 옆구리 어림에 끼운 드레이크 나이트가 허리를 비틀었다.

“윈드 피어싱.”

작은 속삭임과 함께 한계까지 비틀렸던 허리가 튕기듯 펴졌고, 제 자리에 못 박혀 있던 그의 몸이 갑작스레 전방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아아.”

창이 먼저였을까. 휘몰아치는 광풍이 먼저였을까.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저 창과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피투성이가 된 케일리가의 기사가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만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다음. 없어? 그럼 내가 또 고르지.”

지치기는커녕 도리어 활기가 더해진 드레이크 나이트의 음성에 기사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

결투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호기롭게 나섰던 기사들은 만신창이가 되어 실려 나갔다.

“그래도 조금은 사정을 봐주셨군요.”

제 주인이 당연히 승리할 거라 여겼던 것처럼 줄리앙의 말투는 들뜬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잘 하셨습니다. 저들이 무례를 저지르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심한 부상을 입히면 소속 가문과 원한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아닌데. 그것 때문에 봐준 거 아닌데.”

김선혁은 줄리앙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부상이 심하면 몸이 나을 때까지 우리 영지에 눌러앉을 거 아냐. 절대로 그 꼴은 보기 싫어. 적당히 두들겨 놨으니 부끄러운 걸 아는 놈이면 알아서 영지를 떠나겠지.”

그는 저 꼴 보기 싫은 기사들이 영지에 오래 머무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억지로 고통을 참고 길을 나설 정도만 두들겨주었다. 아마도 개중에 맷집이 좋은 놈은 내일 저녁이 되기 전에 영지를 떠날 것이다.

“저들이 그저 자신이 당한 그대로 소문을 내주면, 앞으로 귀찮은 일이 조금이나마 줄겠지만. 아마 입을 아예 다물거나 제 유리한 대로 떠들고 다니겠지.”

그라두스라는 걸 처음 들었을 때는 꽤나 재미있는 발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당사자가 되고 나니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기사들이 자신을 만만하게 보고 들러붙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저들은 저렇게 돌려보냈지만, 곧 벼락의 검이 찾아올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온 벼락의 검은 설욕을 위해 잔뜩 독이 올랐겠지요. 장기 휴가까지 내며 검을 갈고 닦았다니, 저들처럼 쉽게 물리칠 수는 없을 겁니다.”

염려 가득한 줄리앙의 말에 김선혁이 피식 웃고는 그녀의 머리를 엉클어트렸다. 사실 그라두스 따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애초에 그의 목표는 왕국의 기사들이 아니었다.

“질 거 같아?”

“지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평소 무뚝뚝하지만 이따금씩 이렇게 진심을 드러내 보일 때면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뻔뻔하기까지 한 줄리앙이었다.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어린 종자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지지 않을게.”

염려가 무색하도록 태평한 음성에 줄리앙이 고개를 들었다.

“나도 이제는 이길 자신이 생겼거든.”

그 자신만만한 태도에 그녀가 조금은 안심하는 얼굴을 해보였다.

**

예상대로 몸을 추스른 기사들은 도망치듯 라인펄 영지를 떠났다. 김선혁은 그들이 떠나고 나서야 겨우 평안한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가 평안하게 지내는 것 바라지 않았던 모양이다.

“멈춰라!”

저택을 지키고 있던 영지병들이 험악하게 소리를 치기에 창밖을 보았더니, 저 멀리서 하얀 먼지를 피우며 달려오는 인마(人馬)가 있었다.

“정지! 소속을 밝히고 용건을 말하라!”

기세 좋게 외치며 인마를 멈춰 세우는 영지병들의 모습이 제법 그럴싸했다.

"어서 길을 터라! 사령관님의 전언이다!"

하지만 기병은 뭐가 그리 다급한지 영지병들의 제지에도 말의 속도를 줄이지 않았고, 입구를 지나쳐 한참이나 저택 깊숙이 들어서고 나서야 말을 멈춰 세웠다.

“급봅니다! 급보! 영주께서는 속히 나와 사령관님의 전언을 들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끼고 있던 김선혁은 전령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저택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자작께서는 최대한 빨리 드레이크 기병대를 이끌고 24연대와 합류하라는 사령관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리 급하게...”

그의 질문에 전령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녹테인 기병대가 국경을 넘었습니다!”

========== 작품 후기 ==========

*뚜둥! 골디 출도오옹!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벌에 쏘이긴 했지만, 통증은 이제 없고 부기와 가려움만 남았습니다. 손꾸락이 움직이기가 영 부대끼지만 타이핑 느려진 거 빼면 아무런 이상 없습니다. 껄껄.(그리고 저 불의 대륙, 남미에 삽미다. 댓글에 물어보시는 독자분이 계셔서;;)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과 코멘트는 사랑입니다. 잇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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