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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74화 (74/305)

<-- 32. 해룡 -->

김선혁이 거대 괴수의 뱃속으로 들어간 직후 불효자호를 두들겨대던 격랑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부서진 배의 파편과 구조를 요청하는 선원들만이 배 주변을 떠다녔을 뿐이다.

“빨리 구해!”

살아남은 두명의 선원이 다른 선원들을 구조하는 도중에 죽은 줄 알았던 도팽이 끌려 올라왔다.

“발보아는, 녀석들은 날 데려가지 않았어...”

“너 이 새끼!”

이제는 한센도 요나슨도 상황을 대충 알게 된 터라, 도팽을 보는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급기야 한센이 욕설을 내뱉으며 멱살을 잡아 바닥에 패대기치기까지 했다.

“이 미친 새끼가! 죽으려면 혼자 뒤지지!”

유순한 잭슨도 이때만큼은 한센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선실에서 칼 한 자루를 가지고 와 도팽의 목을 베려고 했다.

“선원이 둘 죽었다. 이 새끼까지 죽여 버리면 배가 멈춰 버려.”

“하지만 이 사람 때문에 영주님이!”

요나슨의 만류에 잭슨이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도팽을 노려보았다.

“아직 영주님은 죽지 않았어.”

요나슨의 음성은 단호하다 못해 확신에 차 있었다. 납득하지 못한 잭슨이 도팽의 목을 쳐서라도 영주님의 복수를 해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어댔다. 이를 우악스럽게 붙잡아 만류한 한센이 눈짓으로 이유를 물었다.

“멍청이들아. 바람이 아직 불고 있잖아.”

“바람이 뭐요. 바람이 부는 게 뭐가...”

격앙된 음성으로 따져대던 잭슨이 요나슨이 치켜올린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좌측이 부서지며 자꾸만 기우려는 배를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돛이 힘겹게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영주님의 바람이다.”

딱히 드러내놓은 적은 없지만 오래 붙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영주의 능력, 바람이 돛을 밀어내고 있었다.

**

금방이라도 침몰할 것 같았던 불효자호는 선원들의 재빠른 조치로 겨우 침몰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임시조치에 불과했으니 한시라도 빨리 뭍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남겨진 김선혁 일행이 이를 거부했다.

“영주님을 기다린다.”

“그러다 그 괴물이 다시 나타나면!”

“어차피 배를 몰 선장도 없지 않나?”

항의하는 선원을 요나슨이 여전히 넋을 잃은 도팽을 핑계 삼아 돌려보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저놈들이 잠든 선장과 선원들을 다시 깨울지도 몰라.”

“하지만 영주님을 두고 돌아갈 수도 없지. 만약 훼방을 놓는 놈이 있다면 전부 죽이고 우리끼리라도 기다리겠어.”

“저도 거들겠습니다.”

귀환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는 한센과 잭슨의 모습이 차라리 비장했다.

“아주 충신 났네. 났어.”

요나슨이 혀를 차며 비아냥대자 한센이 울컥해서 따지고 들었다.

“요나슨 너는 그럼 아무렇지도 않아?”

“이 멍청이들아! 이럴 때일수록 냉정하게 생각해야 할 거 아냐! 정작 영주님이 돌아오셨는데 선원이 없어서 배에 갇히면 참 좋아하시겠다. 어떻게든 구슬려서 배를 끌고 갈 생각을 해야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의리만 갖고 헤쳐 나가기에는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끄응. 어쨌건 영주님이 아직 살아있는 건 확실하지?”

“안 그랬으면 이 배 벌써 자빠졌다.”

전처럼 반듯하게 배를 세우지는 못했지만, 다소 기울었을지언정 바람은 쉬지 않고 돛을 밀어냈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이 무모한 영주놈은.”

답답한 마음에 예전의 말버릇이 튀어나왔지만, 트집을 잡는 사람은 없었다.

**

선원들이 수면향에 잠든 선장과 동료들을 깨우려 시도했다. 하지만 미리 대기하고 있던 잭슨이 나서서 모두를 제압했고, 다행스럽게도 일은 미수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일행도 슬슬 같은 자리에서 버티는 건 한계임을 느껴가고 있었다. 배의 균형을 잡아주던 바람도 지금에 와서는 거의 제 힘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배는 이제 거의 반쯤 기운 상태로 이리저리 파도와 바람에 떠밀려 다니고 있었다.

언제든 배를 벗어날 수 있게 비상용 보트를 준비해둔 일행은 초조한 마음으로 영주의 귀환을 기다렸다.

“어?”

뜬눈으로 밤을 새운 잭슨은 저 멀리 보이는 물보라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선원들이 그의 목소리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비명을 질렀다.

전날 물속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왔던 괴수가 이제는 아예 몸통의 절반을 물 위로 드러내놓고는 수면을 스치듯 다가오고 있었다.

“괴물이 다시 온다!”

“꽉 잡아!”

차라리 물에 빠져 죽었으면 죽었지, 괴물에게 잡혀먹히고 싶지는 않았던 선원들이 배를 뛰어다니며 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배가 멀쩡했을 때도 손 쓸 새도 없이 당했던 괴물의 습격인데,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배를 갖고 달리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선원들은 발을 동동 굴렀고, 한센을 비롯한 일행들은 괴물의 비늘이라도 베어내고 죽겠다는 각오로 칼을 뽑아들었다.

크아아아아.

검푸른 해수면을 뚫고 솟구친 괴수의 위용은 여전했다. 그 아름다우면서도 끔찍한 모습에 사람들이 저마다 마지막 각오를 다졌다.

“다행이다. 너무 늦지 않아서.”

그런데 그때 실종되었던 영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가 제 자리에 없어서 한참이나 찾았지 뭐야.”

빳빳이 고개를 들었던 괴수가 고개를 숙여 뱃머리 위에 턱을 가져다댔다. 그렇게 드러난 괴수의 머리 위에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그렇게 애타게 찾던 영주와 그 종자였다.

“영주님!”

“김선혁 이 빌어먹을 자식아!”

잭슨과 한센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달려들었다.

크르릉.

반가움 탓에 잠시 괴수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괴수가 목을 울리며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사내들이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가까이 오지는 마. 보기보다 섬세한 녀석이거든.”

사납게 으르렁대는 괴수를 등 뒤에 두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여대는 김선혁의 모습은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지나치게 태평스러웠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한센과 잭슨이 주춤 물러난 사이, 요나슨이 나서서 사정을 물었다.

“어떻게 되기는.”

뒤를 힐끔 바라본 그가 괴수의 억센 턱에 몸을 기대고 서서 대답했다.

“이놈도 골디처럼 길들인 거지.”

**

불효자 호는 결국 침몰했다. 침몰 직전 내린 두 척의 비상용 보트에 일행은 나누어 탔다. 기존의 선장과 선원들은 전부 한 곳에 모아 큰 보트에 실었고, 정신이 멀쩡한 선원들이 그들을 책임지기로 했다. 그리고 남은 하나의 보트에는 김선혁 일행과 도팽이 올라탔다.

“뭍으로 돌아가려면 뭐 빠지게 고생해야 할 겁니다. 워낙에 많이 태워서 배가 나가기나 할지 모르겠군요.”

“어쩌면 잠든 선장과 선원들을 나머지 선원들이 바다에 버릴지도 모릅니다. 의리가 있는 놈들이었다면 저만 살자고 그 난리를 떨었을 리가 없으니까요.”

김선혁은 다소 복잡한 눈으로 멀어져 가는 불효자호의 선원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동정의 여지는 없었다. 그간 저들에 의해 수장되었을 수많은 승객들을 생각하면 저렇게 살려두는 것 자체가 과분한 자비였다. 물론 따지고 보면 이런 망망대해에 돛도 없는 배 한 척을 주고 풀어준 것이 자비라고 하기에는 우스웠지만.

“발보아. 아니, 도팽이라고 불러야 하나.”

“제가 실성을 해서 애꿎은 분들을 위험에 휘말리게 했습니다.”

도팽은 하루 사이에 몇십년은 늙어버린 듯했다. 하얗게 새버린 머리에 굽어버린 등은 첫 대면에서 봤던 건장함 따위는 온데간데없는 모습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제 정신이 돌아왔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삶을 지탱해주던 광기를 잃어버리고 기력을 잃은 모습이라 차라리 미쳐 살 때가 나아보였을 지경이었다.

“네가 도팽 맞지? 선원들의 구조를 막았던 그 선장.”

“네. 제가 그 도팽입니다. 발보아는 당시 기함에 타고 있었던 선원들 중 하나의 이름이었습니다.”

한 척의 배를 온전하게 지켜 자신의 선원들을 살렸지만, 반대로 죄책감으로부터 자신만큼은 지킬 수 없었던 가엾은 선장, 그게 바로 도팽이었다.

김선혁은 화조차 낼 수 없는 그 가엾음에 그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어줬을 뿐이다.

“근데 저희야말로 어떻게 돌아갑니까? 설마 노를 저어서 가자는 건 아니시겠죠?”

한센의 질문에 김선혁이 씨익 웃어 보였다.

“블루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해수면 뒤에서 괴수, 해룡 블루곤이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밀어.”

“어? 어? 으아아아아!”

넓은 콧잔등 위에 보트를 얹어놓다시피 한 블루곤이 미친 듯이 질주했다.

**

블루곤은 골드레이크가 복종도 99에서 한참이나 머물러야 했던 기억을 떠올려 김선혁이 지어준 씨 서펜트의 이름이었다. 제 딴에는 블루 드래곤을 줄여서 그럴싸하게 지었던 이름이었지만, 스텔라를 스노우화이트로 개명하려던 그의 작명 감각은 여전했다.

“으으. 불효자 호에 탔을 때도, 없었던 멀미가...”

블루곤은 바다에서만큼은 그 어떤 생명체보다 빨랐지만, 그만큼 난폭하고 거칠었다. 그 바람에 속이 뒤집혀버린 한센을 비롯한 사내들은 거듭 토악질을 해댔다. 하지만 진짜 고통은 근해에 접어들어 블루곤이 사라지고 난 뒤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뒤집혀버린 속을 꾹 눌러 참으며 파도와 싸워야 했다.

도팽의 손이라도 빌릴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완전히 정신을 차린 것처럼 보였던 도팽은 하루가 지나자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결국 실성한 도팽을 두고 한센과 젝슨, 요나슨이 수고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으아. 다시는 배 안 타!”

노를 저어도 저어도 좀처럼 나아가지 않는 배 탓에 완전히 지쳐갈 때쯤, 겨우 항구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으. 죽겠다!”

“으아. 땅이 흔들린다!”

침을 질질 흘려대며 드러누워 죽는 소리를 해대는 사내들을 보며 김선혁이 말했다.

“엄살 그만 피우고, 일어납시다. 줄리앙부터 어떻게 해야지. 이러다 애 큰일 나겠어.”

정작 위급한 이는 따로 있었다. 바로 줄리앙이었다. 바닷물을 뒤집어쓰고 해룡의 뱃속까지 들어갔다 나온 줄리앙은 이틀간 고열에 시달렸고, 의식을 좀처럼 차리지 못했다.

“사제라면 저쪽 대로를 걸어가다 보면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부두에 나와 있던 관리들에게 물어 사제를 소개 받았다. 하지만 나이 먹고 돈만 밝히는 사제의 치유술은 쇠약해진 기를 북돋는 정도에 불과했고, 어린 종자의 몸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사람을 치료하는데 도가 튼 마법사가 있기는 한데...”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습니까?”

사제는 김선혁이 귀족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바가지를 씌운 데에 대해 뒤늦게 미안함을 표했다. 그러면서 소개해준 것이 바로 뤼겐부르크 영지의 영주가 거느린 마법사였다.

“치안대의 해럴드 타이론을 불러주시오.”

“누가 찾는다고 전해드릴까요?”

김선혁의 말에 사제가 눈을 멀뚱멀뚱거리며 물었다.

“드레이크 나이트가 찾는다고 하면 될 거요.”

**

해럴드 타이론은 오래지 않아 나타났다. 오면서 대강의 사정을 들은 것인지, 줄리앙을 후송할 마차까지 준비한 상태였다.

“염치없지만 부탁 좀 합시다.”

매몰차게 돌려보냈던 이에게 다시 이런 부탁을 하기가 영 민망했지만, 줄리앙의 상태가 좋지 않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천만의 말씀, 이런 좋지 못한 일로 자작님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저희가 더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해럴드 타이론은 도리어 그를 안심시켜 보이고는 곧장 영주의 저택으로 향했다.

“이쪽으로.”

미리 기별을 받고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가 곧장 줄리앙을 살폈다.

“독에 중독됐군요.”

이제는 아예 파랗게 되어버린 줄리앙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마법사가 말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된 걸로 보이는데, 어서 치료하지 않으면 손을 쓸 기회마저 잃고 맙니다.”

“그래서 치료는 어떻게, 가능할 거 같습니까?”

애써 평정을 지키며 물었더니 마법사가 대답했다.

“쉽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치료해보이겠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스콰이어 줄리앙은 마법사님께 맡기고, 너무 염려치 마시지요. 쉽게 단언하는 분이 아니니 저렇게 말했다는 건 방도가 있다는 말입니다.”

해럴드 타이론이 그렇게 말하고는 그를 뤼겐부르크의 영주에게 안내했다. 도움을 받는 입장이라 손님 된 도리로 먼저 주인을 찾지 않을 수도 없어 그는 내키지 않는 걸음이나마 견습 기사의 뒤를 따랐다.

“줄리앙을 부탁해.”

“맡겨 주십시오. 영주님.”

잭슨이 자청하여 줄리앙의 곁에 남았고, 김선혁의 뒤를 한센과 요나슨이 뒤따랐다.

========== 작품 후기 ==========

*해룡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은 겸둥이 줄리앙부터.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참으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찡긋.

*추천과 코멘트는 글쟁이의 좋은 단백질원입니다. 저를 벌크업 시켜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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