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해룡 -->
불효자호의 선장과 선원들은 그다지 인내심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그들은 선박이 항구를 떠나 망망대해에 이르자 거침 없이 본색을 드러냈다.
“어, 어떻게? 분명 이틀은 내리 잘 만한 양의 향을 피웠는데?”
한밤중에 선실을 습격한 선장이 주춤거리며 내뱉은 말에 김선혁이 피식 웃었다.
“이쪽에 냄새에 좀 민감한 친구가 있거든.”
배에 올라탄 직후, 아니 뤼겐부르크 영지에 도착한 이후로 김선혁은 단 한 시도 아티야를 떨어트려놓지 않았다. 그 덕분에 불효자호의 선장이 피운 수면향을 조기에 알아차리고 배 밖으로 밀어낼 수 있었다.
“항복! 항복!”
계획이 틀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챈 순간 선장은 곧장 항복을 선언했다. 그 어이없을 정도로 빠른 상황판단에 도리어 맥이 빠질 지경이었다.
“칼도 뽑아보고, 좀 필사적인 면이 있어야 하지 않아?”
“그럴 생각도, 마음도 없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아무래도 뭍에서 그가 일으켰던 난투극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십수명의 선원들이 반의 반도 안 되는 상대를 두고 저리 선선히 투항을 할 리가 없었다.
“다시는 허튼 생각 하지 않고, 나으리께서 원하시는 곳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한 번 그런 놈이 두 번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그거야 그렇지만, 저희가 없으면 나으리께서도 다시 뭍으로 돌아가실 방법이 없지 않으십니까.”
어쩐지 선선히 항복을 한다 싶더니, 믿는 게 있었다.
“부디 용서해주시지요.”
비열하게 지껄여대는 선장은 칼자루라도 쥔 것처럼 느긋해 보였다. 하기야 선장의 말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 망망대해에서 선장과 선원을 잃은 배가 온전하게 목적지에 도달하기는 요원한 일이었다. 아니. 목적지는 고사하고 다시 항구로 돌아가는 것마저 불가능했다.
“발보아.”
하지만 김선혁이 마냥 아무 생각도 없이 배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네. 나으리.”
경고를 듣고 미리 객실을 옮겨 피신해 있었던 발보아가 냉큼 다가와 곁에 섰다.
“저 중에 필요한 놈만 추려내.”
“필요한 놈이라는 게...”
“딱 배 모는 데 필요한 최소인원만 추려내라고.”
뒤늦게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파악한 불효자호의 선장과 선원들이 하얗게 질렸다. 반대로 발보아는 신이 난 얼굴로 선원들을 훑어보았다.
“딱 다섯 놈이면 충분합니다요. 조타수 한 놈, 갑판에서 허드렛일을 거들 놈 넷 정도면 충분하지요.”
“서, 선장도 없는 배가 제대로 목적지에 도착할 리가 없습니다! 다시 생각을!”
이때만큼은 선장보다 선원들의 상황 판단이 빨랐다.
“제가 이 배의 조타숩니다!”
“제가 돛도 잘 만지고, 잡일도 잘 합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다시는 허튼 짓하지 않겠습니다요!”
“하, 항해사도 필요하실...”
손을 내밀며 자신을 선택해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선원들을 본 선장이 뒤늦게 끼어들었다.
“이 배를 가장 잘 아는 건 접니다. 저 없이는 이 배를 움직이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곤란하네. 딱 다섯 놈만 살려줄 생각인데, 어쩔 수 없이 선장의 자리를 하나 남겨둬야 하나. 어떻게 생각해?”
이번 질문은 발보아를 향한 게 아니었다.
“저런 놈 따위는 없어도 그만입니다!”
“선장놈은 술 먹고 거들먹거릴 줄이나 알지, 항해에 대해서는 제가 백배 더 잘 알고 있습니다요!”
“살다살다 저놈보다 무능한 선장은 본 적이 없습죠. 승객들 꼬셔서 바다에 쳐넣는 것 빼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놈이 하는 말을 믿지 마십시오.”
선원은 열다섯인데, 살 수 있는 자는 다섯이었다. 선원들은 선장 때문에 자신이 살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선장의 무능함을 험담했다.
“그렇다는군.”
“이익! 이 배의 주인은 나야! 감히 내 배를 네놈들이!”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선장이 칼을 뽑았다. 하지만 반항은 길지 않았다. 선원들 중 누군가가 뒤에서 몽둥이로 뒤통수를 후려치는 바람에 그대로 정신을 잃은 것이다.
“발보아. 하던 일 마저 하도록.”
발보아는 선장을 제외한 선원들 중에 다섯을 골라냈고, 남은 자들은 한 곳에 모아 수면향을 피워 재워버렸다.
“음. 능숙해 보이네.”
발보아는 생각보다 유능한 선원이었다. 선장과 항해사의 부재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발보아는 마치 처음부터 이 배의 선장이었던 양 능숙하게 다섯의 선원들을 부렸다.
한 밤중의 습격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곧이야.”
다만 꺼림칙한 것이 있었다면, 그 전에도 이따금씩 신경쇠약에 걸린 것 같은 모습을 보였던 발보아가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심각한 광증을 보였다는 것이다.
“조금만 참아. 발보아.”
처음에는 해룡에 대한 복수심과 공포때문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면이 많았다. 이따금씩 발보아는 보이지 않는 여러 사람과 대화를 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 모습이 히스테릭 했다가 구슬펐다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영주님.”
“알아. 만약 최악의 경우가 벌어지더라도 살아날 방법은 있어. 그러니 동요하지 말고 지금은 목적지에 가는 것만 생각하자.”
땅위에서만큼은 두려움을 모르던 사내들도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에 압도된 것인지, 눈에 띄게 걱정이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김선혁은 자신에게 방법이 있다며 그들을 안심시켜 돌려보냈다.
“거의 다 왔어.”
불효자호의 조타륜(操舵輪)을 잡고 혼자 중얼거리는 발보아의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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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이상 징후를 느낀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김선혁이었다. 그는 기이할 정도로 배의 흔들림이 약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즉시, 선실을 뛰쳐나갔다. 곧장 갑판 위로 나가 주변을 둘러보니 쉴 새 없이 배를 밀쳐대던 파도가 어느 순간부터 어린아이의 물장구처럼 변해버린 것이 보였다.
“설마...”
배의 난간에 슬쩍 머리를 내밀어보았다. 오늘따라 유달리 검푸른 수면의 모습이 불길하기만 했다.
“아...”
그 고요한 바다를 본 순간 김선혁은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땅과 바람, 그가 지배하는 속성이 유일하게 미치지 못하는 세상이 바로 빈약한 발판 아래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줄리앙! 잭슨! 모두를 깨워라!”
순간적으로 밀려드는 공포심을 억지로 떨쳐낸 그가 마침 자신을 따라 갑판으로 올라온 줄리앙과 잭슨에게 외쳤다.
“발보아!”
조타륜을 꽉 움켜잡고 선 발보아를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환희와 공포로 범벅이 된 엉망진창의 음성만이 들려왔을 뿐이다.
“드디어! 드디어!”
광증을 넘어 아예 미쳤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모습에 김선혁은 만약을 대비했다.
“아티야.”
‘네. 주인님.’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아티야의 상큼한 음성은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가라앉히는 힘이 있었다.
“최악의 경우 배를 네가 밀어줘. 할 수 있지?”
‘힘닿는 데까지 해볼게요!’
앙증맞게 주먹을 움켜쥐고는 메인마스트 위에 내려앉은 아티야를 보던 김선혁이 다시 수면 아래를 바라보았다.
뭔가 다가오고 있다.
풍령의 힘도 닿지 않는 깊은 바다, 보이는 것도 느껴지는 것도 없었지만 그는 확신했다.
“온다! 꽉 잡아!”
그의 경고에 일행이 각자 배의 어딘가를 꽉 움켜잡는 순간, 무언가가 배를 부드럽게 밀어냈다. 하지만 그 완만한 접촉의 여파는 결코 적지 않았다. 일직선을 향해 나아가던 배가 격랑이라도 만난 듯 기울어버린 것이다.
끼이이이이.
부서질 듯 요란한 불효자호의 비명을 들으며 김선혁이 아티야를 불렀다.
‘맡겨주세요!’
다부진 대답과 동시에 돛이 부풀어 오르며 기울던 배가 겨우 균형을 잡았다. 하지만 충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전 후 좌 우 할 것 없이 밀쳐대는 정체불명의 무언가 때문에 불효자호는 쉴 새 없이 뒤뚱거렸다.
“발보아!”
“드디어 다시 왔어. 내가 너희들을 구하러 이곳에 왔다고!”
그 와중에도 발보아는 여전히 알아먹지 못할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너희들의 선장 도팽이 왔다고!”
아티야를 통해 지속적으로 빠져나가는 기력, 김선혁은 순식간에 땀과 바닷물로 범벅이 되었다.
“뭣들 하느냐! 어서 구명줄을 던져라! 저들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지 않느냐!”
하얀 포말만이 피어난 망망대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발보아를 본 순간, 김선혁은 깨달았다.
‘선장은 바다 밑에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위험을 자초하는 대신, 제 배만이라도 살리기로 결정했었습죠. 선원들은 선장을 원망하면서도 동료들이 괴물의 주둥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습니다.’
“발보아! 네놈이 그 선장이었냐!”
생각했던 것보다 최악의 경우보다 몇 배는 더 상황이 좋지 않았다. 복수에 미친 선원이라면 차라리 해룡과 싸우기라도 했을 텐데, 발보아, 아니 도팽은 제 결단으로 구하지 못했던 망령들을 다시 건지러 온 미치광이였다.
“어서 줄을 잡아!”
조타륜마저 내팽개친 도팽은 아무것도 없는 수면 위로 구명줄을 던지고 다시 끌어올리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제, 제가 잡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눈치 빠른 선원 하나가 도팽을 대신해 조타륜을 잡고는 힘차게 돌렸다. 쓰러질 것처럼 기울었던 배가 다시 한 번 제 몸을 바로 잡았다.
“또 온...”
쾅!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충격, 각기 몸을 고정시키고 있던 일행들이 이리저리 나뒹굴었다.
“악!”
“줄리앙!”
비교적 근력이 약한 줄리앙이 저 멀리 뛰쳐나가는 것을 본 그가 이를 악물고 내달렸다. 바닷물에 젖어 미끄러워진 갑판 탓에 몇 번이나 넘어지면서도 그는 줄리앙이 있는 곳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잡아!”
이때만큼은 줄리앙도 사양하지 않고 그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다친 사람은!”
“정신없지만 괜찮습니다!”
짜디짠 바닷물을 들이마신 것인지 눈물콧물 섞인 음성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일행 중에 바다 밖으로 튕겨나간 이는 없었다.
“배는!”
“아직은 버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빨리 수리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살아남은 선원 하나가 솜씨 좋게 미끄러운 갑판 위를 뛰어다니다가 대답해왔다.
“도팽! 아니 발보아, 아니 도팽은!”
“방금 전에 파도에 휩쓸려서!”
“멍청한 새끼!”
가엾은 미치광이의 운명에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누군가를 동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불효자호를 가지고 놀 듯 이리저리 밀어대던 거대한 무언가가 다시 또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또 온다! 다들 꽉 잡아!”
줄리앙을 꽉 끌어안아 품안에 둔 김선혁이 마스트에 팽팽하게 묶여있던 밧줄을 움켜잡았다.
쾅!
부서진 선박의 파편이 사방에 비산하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한센! 요나슨! 잭슨!”
목 놓아 일행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정작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배를 뒤덮은 파도중 일부가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주인님! 더 이상은 무리예요!’
이명뿐인 세상에서 유달리 선명하게 들려오는 아티야의 음성에 그가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배가 이 지경이 됐는데도 아직 해룡의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이 빌어먹을 뱀장어 새끼가!”
반쯤 정신을 잃다시피한 줄리앙을 여전히 꽉 끌어안은 채 그가 구불거리며 다가서는 검푸른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크오오오오오.
그 순간 수면이 쫙 갈라지며 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렇게 괴수와 마주친 순간 분노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촤아아악.
꼿꼿하게 고개를 든 괴수의 미려한 목선을 따라 바닷물이 흘러내린다. 가장 깊은 바닷물을 한웅큼 떠다 부은 듯한 눈동자는 제 몸통만큼이나 푸르른 빛이었고, 물기 젖어 번들거리는 비늘은 마치 사파이어처럼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보석으로 빚은 조각품과도 같은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골디랑은 차원이 다르잖아...”
마치 네깟 놈이 날 길들일 수나 있겠냐는 듯 내려다보는 시선은 오만하고 도도했다.
[드래곤 테이밍 스킬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잠시간 씨 서펜트와 교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쩍 벌린 아가리가 그와 줄리앙을 집어삼켜버렸다.
“영주님!”
“김선혁! 이자식아!”
길게 이어지는 동료들의 비명, 하지만 그마저도 이내 괴수의 입이 닫히자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김선혁과 줄리앙은 그렇게 해룡에게 집어삼켜지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연참연참연참!
*댓글과 추천 감사드리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답댓은 일일이 못하고 있지만 코멘트 하나하나 몇번씩 곱씹어 읽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영지의 방문에 대한 댓글 잘 읽어보았습니다. 한국어를 포함하여 원문으로 된 자료를 모두 뒤져보아도 귀족이 다른 귀족의 영지를 방문시 반드시 기별을 해야 하며, 이를 어길 경우 큰 실례라 기술된 자료는 찾지 못했습니다. ㅜㅜ
제가 찾은 자료라고 해봐야 '고위귀족의 방문은 정치적인 문제로 말미암아 공식적이었다. 하지만 그 외의 다른 귀족의 방문과 여행은 원한관계가 있는 영주가 아닌 이상 자유로웠다.'라는 짧은 문장 뿐입니다. ㅜㅜ 그 외의 사료로는 기별없이 방문한 귀족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채고 따로 초대하여 저녁을 대접했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기별없는 방문을 실례로 여겼다는 자료는 찾지 못했습니다. ㅜㅜ
하여 사료의 유무를 떠나 제가 정확히 알지 못하는 내용은 쓰기가 애매해서 드래곤 푸어의 세상에는 그러한 통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설정했습니다.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꾸벅.
*전편에서 사과하는 장면에 우르르 몰려온 병사들은 모두 그 자리에 있었던 병사들이며 사과를 하기 위해 모인 것인데 아무래도 묘사가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실제로 확인해보니 묘사가 엉성해 전개가 어색하지 않도록 수정 보강했습니다. 조언 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