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해룡 -->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는 걸까.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드레이크 나이트께서는 그라두스 89를 받으셨습니다.”
잠시 텀을 두고 들려온 대답에 그는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89라는 숫자는 낮은 것 같으면서도 그라두스를 가진 자들의 수가 백을 넘지 않는 상황에서는 마냥 낮다고 볼 수도 없었다. 결국 호기심이 생긴 그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샤 트레일 경과 레인하르트 후작께서는 그라두스가 어떻게 되는가.”
필시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라두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게 분명한 해럴드 타이론은 그가 입을 열자 싱글벙글 웃으며 대꾸했다.
“아샤 트레일 경은 그라두스 46을 받으셨고, 레인하르트 후작께서는 그라두스 4를 받으셨습니다.”
지도대련에서조차도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던 아샤 트레일은 검의 천재였다. 그런데 그녀보다 강한 기사가 무려 마흔다섯 명이나 있다니 차라리 황당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아샤 트레일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했던 레인하르트 후작마저도 고작 4의 그라두스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 이상의 괴물이 셋이나 있다는 말에 김선혁은 기가 질리고 말았다.
“사실 드레이크 나이트께서 처음에 받으신 그라두스는 99였습니다. 하지만 보다 한 계단 아래의 그라두스를 받으셨던 벼락의 검이 거듭 결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90의 그라두스를 거머쥐며, 자연스럽게 벼락의 검을 꺾은 드레이크 나이트의 그라두스도 상승했지요.”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뻔 했다. 열심히 결투에서 승리를 할수록 원수 같은 자신의 그라두스를 올려주는 꼴이 된 라이든 레이라크의 심정이 짐작이 갔던 탓이다. 얼마나 억울하고 분할까, 하는 생각에 자꾸만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원하신다면 지난달의 그라두스가 수록된 잡지를 구해다드릴 수도 있습니다.”
너무 대놓고 흥미를 보인 탓에 민망해진 김선혁이 뒤늦게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그 잡지가 하필이면 영주님의 서고에 있지 뭡니까. 가져다 드리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그러자면 영주님의 허락을 구해야 하는지라...”
속내가 빤히 드러나 보이는 말에 김선혁이 피식 웃어 보였다.
“됐다. 내 그라두스가 89라는 걸 알았으니, 그걸로 만족하지, 뭐.”
아마도 호승심 강한 기사이니만큼 자신의 위에 누가 있는지 궁금증을 참지 못할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김선혁은 평범한 기사가 아닌 이방인이었고, 호승심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태평스러운 성격의 사내였다. 그저 왕국의 쟁쟁한 기사들과 마법사들 사이에 자신의 이름이 놓여 있다는 사실로도 충분히 만족할 만 했다. 그는 교활한 견습기사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글쎄. 지금은 궁금증보다는 허기가 더 하군. 용무가 끝났으면 이만 일행과 식사를 시작했으면 좋겠네만.”
포기하지 않고 몇 번 더 권유하던 해럴드 타이론도 더는 권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혹시 필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기꺼이 드라흔 자작님의 손과 발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마음만 받도록 하지.”
김선혁의 냉담한 대답에 해럴드 타이론은 아쉬운 얼굴로 인사를 해보이고는 여관을 나섰다.
“잘 하셨습니다. 뤼겐부르크의 영주는 귀족파의 자금줄을 담당하는 자입니다. 그런 자와 사사로이 자리를 마련해서 괜스레 왕실의 눈 밖에 날 이유가 없지요. 아주 잘 하셨습니다.”
“아니. 나 그런 것보다는 정말 배가 고팠던 건데.”
시큰둥하게 대답한 그가 자신의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종업원을 불러 음식을 주문했다.
아덴버그에서만 내 위로 여든여덟이라...
한참 바삐 손을 놀리던 김선혁은 문득 그라두스를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재끼고 올라갈 놈들 많아서 좋네.
아직은 레이라크 후작은커녕 아샤 트레일조차도 이길 자신이 없었지만, 어쨌건 간에 지금처럼 강해지다 보면 언젠가는 그들을 넘어설 수 있으리라.
“영주님. 그거 안 드실 거면 제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제 접시를 깨끗하게 비운 한센이 손을 뻗어왔다. 그는 뒤늦게 제 접시를 움켜잡고는 다시 식사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
다음날이 되자 요나슨과 한센은 지난 선박 침몰 사고의 생존자를 수소문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김선혁은 혼잡스러운 뤼겐부르크 영지의 상황으로 말미암아 혹시 또 다른 시비에 휘말릴까 염려가 된 탓에 숙소를 지키기로 했다.
“그라두스라는 거 정말 획기적인 생각 아닙니까? 낮은 자는 높은 자를 넘어서기 위해 노력할 테고, 위에 선 자는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검을 연마하겠지요. 그조차도 받지 못한 자는 어떻게든 이름을 올리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할 게 뻔하니 그야말로 모두에게 득이 되는 이로운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게 가만히 있자니 할 일이라는 게 잭슨의 수다를 들어주는 것밖에 없었다.
“나는 그것보다도 결투에서 딱 한 번 졌다던 라이든 레이라크의 그라두스가 생각보다 낮은 게 놀랍더군.”
왕도에서 연승을 거두며 레이라크의 재판관이라는 명성마저 얻은 뛰어난 기사가 고작 90의 그라두스를 받았다는 게, 왕국에 그만큼 강자가 많다는 소리인지 그도 아니면 라이든 레이라크의 명성이 거품이었다는 의미인지 영 애매하기만 했다.
“레이라크가의 차남이 명성을 얻은 건, 선임 기사의 신분으로 상급 기사를 상대로 승리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귀족들의 결투에 대리 기사로 나설 정도의 기사들 중에 변변한 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물론 그 말이 라이든 레이라크가 실력이 부족한 기사라는 말은 아니지만, 왕국에는 그 이상 가는 강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잡지라는 거 한 번 구경이라도 해보고 싶군요.”
잭슨은 그라두스에 굉장한 흥미를 보였고, 그에 반해 줄리앙은 상대적으로 시큰둥했다.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서열이라는 게 얼마나 신뢰할 수 있고, 또 믿을 수 있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며 어깃장을 놓았다.
그 바람에 신나게 떠들어대던 잭슨이 무안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때 마침 자리를 비웠던 요나슨과 한센이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온 그들 곁에 검게 피부가 그을린 사내 하나가 있었다.
“영주님. 전에 말씀드렸던 사고의 생존자입니다.”
“생각보다 일찍 찾았군.”
한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생존자를 찾아온 그 수완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미천한 뱃놈 발보아가 귀한 분께 인사드립니다요.”
발보아라고 자신을 밝힌 사내가 엉성한 동작으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거두절미하고 묻도록 하지. 당시의 사고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 해주겠나?”
김선혁의 질문에 발보아는 곧장 자신이 겪은 사고에 대해 더듬더듬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날은 왠지 모르게 바다가 잠잠했습죠. 성가시게 배를 때려대는 파도도 없었고, 갑판 위의 찌꺼기를 노리고 달려드는 갈매기조차도 단 한 마리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요.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 투성이었습니다요.”
그렇게 운을 떼고는 잠시 입을 다물었던 발보아가 텀을 두고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당시에는 그저 항해하기 좋은 날이라 여기고는 다들 더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요. 그대로 가면 예상보다 빠르게 왕국 남부 해역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요. 하지만 그때 일이 벌어졌습니다.”
“계속해봐.”
발보아의 눈빛에 언뜻 공포가 스쳐갔다. 무려 수년이나 지난 일임에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건장한 사내가 몸을 발발 떨어댔다.
“가장 먼저 일을 당한 건 기함이었습니다. 선두에서 나아가던 기함이 마치 암초에라도 부딪친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항로가 틀어졌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희는 그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부딪친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말았습죠. 그런데 항로를 벗어난 기함이 빠르게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호위함이 다가가 구조를 시도했지만, 그렇게 다가선 호위함마저도 기함과 똑같은 꼴이 되었습죠.”
발보아는 당시 기울어가는 배 위에서 목 놓아 구조를 요청하던 선원들을 잊을 수가 없노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선장은 바다 밑에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위험을 자초하는 대신, 제 배만이라도 살리기로 결정했었습죠. 선원들은 선장을 원망하면서도 동료들이 괴물의 주둥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생존자들이 탄 배를 지휘하던 선장은 이상한 낌새를 진즉에 알아차리고 구조 작업 자체를 허락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기함과 호위함이 3분의 1쯤 잠겨갈 때쯤, 놈이 나타났습니다.”
증오와 공포가 어우러진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메인마스트(주 돛대)만큼이나 두꺼운 몸통은 마치 뱀의 그것처럼 징그러웠고, 끔찍했습니다. 놈은 순식간에 침몰해가는 기함을 휘감아 으스러트리고는 비명을 지르는 선원들을 집어 삼켰습니다.”
뱀이라는 말에 김선혁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정확하게 어떻게 생긴 놈이었지?”
“으으. 그놈은 건장한 선원을 한 입에 둘셋씩 집어삼킬 정도로 큰 아가리와, 흉물스럽게 번들거리는 비늘을 가진 놈이었습니다. 몸통은 최소한 소형 상선 하나를 휘감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했지요. 사람들은 믿지 않았지만, 분명 놈은 해룡이었습니다. 배가 가라앉을 때 보였던 소용돌이는 흔히 전해져 오던 씨 서펜트의 사냥터와 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두서없이 이어지는 설명,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씨 서펜트의 존재를 확신하기에는 충분했다. 아무리 각양각색의 몬스터들이 날뛰어대는 세상이라고 해도 상선 한 척을 통째로 휘감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뱀 모양의 몬스터가 달리 존재할 거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게 어디에서 일어난 것이지?”
그의 질문에 발보아의 눈빛이 돌변했다. 이제껏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동자가 갑작스레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제가 어디인지 안내해드릴 수 있습니다.”
끔찍한 사고 탓에 발보아를 안내역으로 쓸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접었었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발보아는 기꺼이 자신이 안내를 하겠다며 나섰다.
“배만 구해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놈을 찾아 보이겠습니다.”
**
“그 발보아라는 자, 조금 께름칙합니다.”
요나슨의 말이 아니어도 김선혁 역시 발보아라는 자의 태도가 영 석연치 않게 느껴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신경쇠약에 걸린 듯한 몸짓과 시시때때로 변하는 눈빛은 척 보기에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따로 다른 생존자들을 수소문해보자. 저 자에 대한 생각은 가장 나중에 하도록 하지.”
다음날 다시 탐문을 나선 요나슨과 한센은 어두운 얼굴로 돌아왔다. 생존자들이 어디로 숨었는지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겨우 찾은 자조차도 다시는 바다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며 광적인 거부감을 보였던 것이다.
“자작님.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그 자 정상이 아닙니다.”
“방법이 없다. 그 자가 허튼짓을 하지 못하게 믿을 만한 자들을 따로 고용하면 그나마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겠지.”
고민 끝에 김선혁은 조합에서 믿을만한 선장과 선원들을 고용해 출항을 결정했다. 그렇게 배를 구한 그와 일행이 바다로 향하려는데, 문제가 생겼다.
“저런 저주받은 놈과 함께 바다로 나갈 수는 없습니다.”
“선금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겨우 구한 선장과 선원들이 발보아와 함께 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덕분에 연달아 계약이 취소되어버린 김선혁은 씨 서펜트가 있는 바다를 코앞에 두고도 발 한 번 담궈보지 못하게 되었다.
“미치겠네. 버리고 가자니 안내할 사람이 없고, 같이 가자니 아무도 배를 빌려주지 않고.”
발보아를 얼러도 보고 윽박질러보기도 했지만, 발보아는 꼭 자신이 안내를 해야겠다며 버텼다. 결국 달리 방법을 찾지 못한 김선혁은 조합이 아닌 다른 쪽을 통해 배를 수배해야 했다.
“영주님. 이쪽의 놈들은 해적이나 다름이 없는 놈들입니다. 망망대해에서 혹시 불온한 마음이라도 먹는다면, 저희로서는 손 쓸 새도 없이 당하고 말 겁니다.”
그렇게 찾은 배편이 정상적일 리가 없었다. 요나슨과 줄리앙이 우려를 표했지만, 김선혁은 이번만큼은 고집을 꺽지 않았다. 해룡을 고작 이틀거리에 두고 돌아서기에는 너무도 아쉬웠던 탓이다.
“만약 내키지 않는다면 여기서 기다려도 돼. 굳이 내 개인적인 용무에 다른 사람들까지 위험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
혼자 고집을 피우기도 뭐해 그렇게 얘기를 했다가 된통 잔소리만 들었다. 줄리앙은 주인을 홀로 위험한 곳에 보내는 건 한 번이면 족하다고 버럭 화를 냈고, 한센과 요나슨은 사나이 의리를 뭘로 보냐며 서운한 표를 냈다. 잭슨 역시 드러내놓고 서운함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뭍에 남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배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긴장의 끈을 놓치 말도록. 식수와 식량은 일절 선원들의 것을 제공받지 않는다. 특히 한센. 준다고 넙죽넙죽 받아먹지 말라고.”
요나슨의 지시에 한센이 볼멘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불효자’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나으리.”
퀭한 눈동자에 술 냄새가 물씬 풍기는 불효자 호의 선장은 연극이라도 하듯 과장된 몸짓으로 일행을 맞아주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선원이라고 하기에는 몸의 이곳저곳에 흉터가 지나치게 많은 사내들이 일행을 힐끔힐끔 곁눈질했다. 개중에는 몹시 음흉한 눈으로 줄리앙을 바라보는 자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조용한 항해가 되기는 다 그른 것 같았다.
“발보아.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간에, 안내만 잘 하면 죄를 묻지 않겠다.”
“이를 말이겠습니까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곳까지 모시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배에 오른 뒤로 부쩍 의욕에 불타오르는 발보아의 모습이 도리어 불길했지만, 김선혁은 애써 무시했다. 부디 최악의 경우가 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예상이란 놈은 가장 안 좋은 쪽으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지금 그의 경우가 딱 그러했다.
========== 작품 후기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바로 글 쓰러 가보겠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