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71화 (71/305)

<-- 32. 그라두스 -->

“방패!”

성난 외침에 줄리앙이 재빨리 말안장에 고정해두었던 원형 버클러(소형 방패)를 던져 주었다. 허공을 날아오는 버클러를 낚아챈 김선혁이 손잡이를 움켜잡고는 그대로 내리찍듯 그었다.

“크억!”

가장 앞에서 달려들던 사내가 방패 모서리에 안면을 긁히고는 비명을 지르며 벌러덩 넘어졌다.

“죽어!”

쓰러진 동료를 짓밟으며 내지르는 칼 한자루, 그는 그 하품이 날 정도로 느리고 엉성한 공격을 막는 대신 발끝을 세워 강하게 걷어찼다.

“끄으윽.”

단단한 가죽제 장화의 코로 복부를 찔린 사내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바로 뒤에서 달려들던 남자가 놀라 눈을 부릅떴다. 순식간에 동료가 둘이나 나자빠지자 적지 않게 당황한 눈치였는데, 김선혁은 그 얼빠진 얼굴을 버클러로 냅다 후려쳤다.

꽝.

“끅.”

하얀 잇 조각과 빨간 피가 허공에 비산하고 세 번째 남자가 무너져 내렸다.

“어?”

뒤늦게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괴한들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하지만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김선혁은 물러나는 상대를 그대로 두고 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어설프게 움켜잡은 방패의 손잡이를 단단히 고정시켰다. 머리 하나를 간신히 가릴 정도로 작은 이 방패는 앙증맞은 모양새와는 달리 몸통 전체가 쇠로 이루어진 살벌한 물건이었고, 그의 손에 쥐어진 순간 더없이 효율적인 흉기가 되었다.

“악!”

“끄아악!”

성큼 다가간 그가 버클러를 크게 휘두르니, 긁히듯 안면을 베인 사내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김선혁은 거침없이 밀고 나가며 방패고 주먹이고 할 거 없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괴한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히이익!”

“허. 눈을 감아? 기본도 안 된 새끼일세.”

손을 다 뻗지도 않았는데 겁에 질려 눈을 감은 사내의 모습이 칼자국 길게 난 얼굴이 무색할 정도로 한심했다.

“자, 잘못했... 끄억!”

엎드려 용서를 빌 듯 고개를 숙이던 사내가 무릎에 안면을 강타 당하고는 거품을 물었다.

“둘은 놓쳤습니다.”

언제 나선 것인지 활잡이 둘을 밟고 선 한센과 잭슨의 모습이 보였다.

“뭐야. 이게 끝이야?”

화가 채 가라앉지 않은 김선혁이 다른 상대를 찾아보았지만, 이미 주위에 제 발로 서 있는 자들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으으.”

“아헝헝.”

바닥을 버르적거리며 눈물콧물을 쏟아내는 괴한들의 모습 그 어디에도 처음의 기세등등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서부 국경으로 보내면 가장 말단의 병사에게도 두들겨 맞을 놈들이 칼을 들고 제 세상인양 설치는 모습이 하도 꼴같잖아 김선혁은 더욱 더 화가 났다. 그래서 개중에 정신이 있는 놈들을 찾아 발길질을 해댔다.

“영주님. 사람들 눈이 있습니다.”

잭슨의 만류에 정신을 차린 그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발을 멈췄다.

“아무도 안 보는데?”

괴한들을 두들겨 패다보니 어느새 골목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큰 소란이 일어났는데도 행인들 중 누구 하나 이쪽을 눈여겨 바라보는 이가 없었다. 그저 눈이 마주칠까봐 서둘러 이동하는 이들은 이런 한 낯의 칼부림 따위는 만성이 된 듯 익숙해 보였다.

“뭐, 이런 거지같은 동네가 다 있어. 이게 사람 사는 곳이야?”

황당함이 가시지 않아 그렇게 내뱉는 사이 저 멀리서 호각소리와 함께 경비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찍도 온다. 아주 다 죽고 오지.”

지독스러울 정도로 느긋한 경비병들의 출동에 그가 혀를 차는데, 줄리앙이 다가와 피 묻은 버클러를 넘겨받았다.

“멈춰라!”

“이미 멈춘 지 오래다.”

우르르 몰려든 경비병들이 골목 안쪽을 힐끔 바라보더니 엉거주춤하게 창을 내밀었다.

“그대들이 선량한 시민을 습격했다는 신고를 받았다. 무기를 버리고...”

“하지 마. 그거. 나 진짜 화나려고 하니까.”

노골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바꾸려는 듯한 태도에 김선혁이 나지막이 경고했다.

“투항하면 공정한 재판에 회부될 수 있게 선처를...”

“진짜 여기 막장이구만.”

들어줄 가치도 없는 경비병의 투항 경고에 그가 줄리앙을 불렀다. 바닥을 나뒹구는 사내 하나의 웃옷을 벗겨 버클러에 엉겨 붙은 피와 살점을 닦아내던 그녀가 그의 부름에 하던 일을 그대로 두고 재깍 달려왔다.

“알아서 처리 해.”

“먼저 숙소로 가시겠습니까?”

“아니. 잠시 기다렸다 같이 가도록 하지. 동네가 좀 거지같아야지. 괜히 흩어져서 더 문제 만들지 말자고.”

“그럼 최대한 빨리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경비병이 험악한 얼굴을 해보였다.

“지금 뭐하는...”

짝.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큼 다가선 줄리앙이 경비병의 뺨을 후려쳤다.

“지금 뭐하는...”

“소속과 신분을 밝혀라. 경비병.”

그 당당한 태도에 압도당한 경비병이 금세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어루만지며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뤼겐부르크 치안대 소속 십인장 칼스...”

짝.

다시 한 번 경비병의 뺨이 돌아갔다.

“감히 귀족도 아닌 십인장 따위가 존귀한 분을 앞에 두고 그리 망발을 떨었던 게냐.”

“귀, 귀족이십니까?”

짝.

줄리앙은 가차 없었다. 연이어 뺨을 얻어맞은 십인장은 이제 반쯤 정신이 나간 얼굴이 되었다.

“존귀한 분이 누구인지를 묻기 전에 사죄부터 하라. 너희들의 안일한 태도와 부주의함이 하마터면 귀한 분을 상하게 할 뻔 했다.”

짝, 짝, 짝!

말로는 사죄하라면서도 입을 열 틈도 주지 않고 연달아 뺨을 올려붙이는 줄리앙의 모습이 그야말로 서릿발 같았다.

“너희들은 존귀한 분의 이름을 알 자격이 없다. 저 쓰레기들을 데리고 이곳에서 꺼져라. 혹시라도 나중에 저들이 합당한 벌을 받지 않았다는 말이 귀에 들린다면, 네놈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작지만 매운 손에 십여 차례 뺨을 얻어맞은 십인장은 거의 혼절직전이었고, 남은 경비병들이 나서서 괴한들을 수습해 사라졌다.

“그래도 영지의 경비병인데, 저렇게 막 대해도 괜찮아?”

경비병들이 저 괴한들을 두둔하는 태도만 봐도 평소 어떤 관계일지 빤히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영지 소속의 경비병인데 저리 험하게 다루어도 되는지,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자작님께서는 조금 더 귀족의 위치에 자각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 어떤 귀족도 저런 아랫것들에게 일일이 양해를 구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자작님을 범죄자로 몰려했던 작자가 아닙니까.”

하지만 걱정을 늘어놓았다 괜한 잔소리만 듣고 말았다.

“일단 가자. 가뜩이나 피곤한데 괜한 놈들한테 힘까지 써서 피곤해 죽겠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한참은 더 잔소리를 할 모양새라 그가 적당히 핑계를 대니 줄리앙이 못마땅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

다행스럽게도 숙소에서까지 칼침을 걱정해야 할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뤼겐부르크의 숙소는 유동인구가 많은 항구에 위치한 만큼 시설도 훌륭했고, 서비스도 안락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뒀을 뿐인데 소란스러운 대로와는 완전히 딴 판이었다.

“이제 좀 살겠네.”

각자 몸을 씻고 식당에 모인 일행은 오후의 불쾌한 기억 따위는 죄 잊어버린 듯 풀어진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단 한 번도 몸을 제대로 씻지 못했으니, 묶은 때를 털어낸 지금 새로 태어난 듯 상쾌함을 느낀 것이다.

“흐음.”

오후에 그렇게 불꽃같은 싸대기를 날렸던 줄리앙조차도 온욕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 보기 좋게 홍조가 어린 얼굴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때마침 선원 조합으로 향했던 요나슨이 돌아왔다.

“용케 숙소를 찾았네?”

“그렇게 요란하게 일을 벌여놨으니, 찾기 어려운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지.”

한센의 말에 요나슨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는 곧장 자신이 들은 것을 이야기 해주었다.

“4년 전쯤 서남쪽으로 향하던 상선 세척이 거대한 바다 몬스터를 만났답니다. 그중에 기함과 호위함 한척은 침몰했고, 딱 한 척만 반파된 채로 지나가던 상선대에 구조를 받았다더군요.”

“그게 씨 서펜트가 한 짓인가?”

“말로는 씨 서펜트일 거라고 합니다. 근데 정작 제대로 몬스터의 실체를 본 사람이 없어서, 확실한 건 내일 생존자들을 수소문해 이야기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너무 노골적으로 정보를 캐고 다니면 장난질을 칠 수도 있다며 너스레를 떠는 요나슨은 이런 일이 제법 익숙해보였다.

“일단 밥부터 먹자.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음식으로 배 채워야지.”

첫날이니만큼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김선혁이 그렇게 말하고는 식사를 주문하려는데, 여관의 문이 열리고 경비병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아. 진짜 여기 나랑 안 맞네.”

겨우 기분전환을 하려던 찰나에 방문한 경비병들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인상을 와락 찌푸리니 줄리앙이 자리에서 일어나 도끼눈을 떴다.

“소속을 밝...”

“뤼겐부르크 치안대 소속, 스콰이어(견습기사) 해럴드 타이론입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제 소개를 하며 나선 사내의 태도가 정중하기만 했다.

“오후에 수하들이 오해를 하여 무례를 저질렀다는 소식 듣고 이렇게 직접 사죄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전형적인 도보 기사의 차림새를 한 견습기사 해럴드 타이론의 깍듯한 태도에 줄리앙이 한숨을 내쉬었다.

“스콰이어 줄리앙 뱅키쉬입니다.”

병사 나부랭이도 아니고 견습기사씩이나 되는 자가 이렇듯 성의를 보이니, 무시하기 영 애매했는지, 줄리앙이 마지못해 예를 취해 보였다.

“칼스. 용서를 빌어라.”

“잘못했습니다. 부디 자비를.”

끌려온 듯 한 켠에 서 있던 십인장 칼스가 팅팅 부어 오른 얼굴로 용서를 빌었다. 줄리앙의 손자국 말고도 추가로 이런저런 멍이 생겨난 것을 보면, 보고를 하는 과정에서 대차게 깨지기라도 한듯했다.

“흠.”

마음 같아서야 괴한들과 밀접한 관계일 경비병들의 행동거지를 지적하고 싶었지만, 애초에 남의 영지일에 왈가왈부하기에는 손님이라는 위치가 애매했다. 정중한 태도에 차마 대차게 쏘아붙이지는 못하고 대충 손을 휘저어 알았다는 제스처를 보이니 해럴드 타이론이 넌지시 물었다.

“혹시 귀하신 분의 성함이라도 알 수 있겠습니까. 존귀한 분께서 저희 영지까지 찾아오셨는데, 어떻게 대접을 해야 할지 모르니 혹시 또 불편을 드릴까 걱정입니다.”

아무래도 이쪽이 본론일 게 빤히 보였다. 하지만 예를 차린 상대의 질문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선혁 라인펄 김 드라흔 자작님이십니다. 왕녀께서 친히 드레이크 나이트라는 이름을 하사하셨고, 폐하께서 직접 기사 서임을 해주신 귀한 분이시지요.”

“오오. 명성 높은 드레이크 나이트셨군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거 영주님께서 아시면 당장 뛰어오셔서 자작님을 맞으실 겁니다.”

“개인적 볼일로 잠시 귀 영지에 들린지라 자작님께서는 딱히 소란이 이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뤼겐부르크의 영주께서 기꺼이 맞아주실 것은 의심치 않으나, 그 마음을 받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김선혁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줄리앙이 눈짓으로 나서지 말 것을 부탁했던 탓이다.

“안타깝습니다. 그라두스(Gradus)가 매겨진 기사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영주님께서는 그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으실 텐데 말입니다.”

“그라두스?”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이번에는 줄리앙도 상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눈만 말똥거렸다.

“그라두스 모르십니까? 요즘 왕도에서는 마법사고 기사고 정령사고 죄다 순위를 정해 그 힘을 가늠하는 게 유행인데 말입니다.”

해럴드 타이론이 그런 그녀를 보며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국경이 워낙 외졌고, 평소 녹테인의 움직임에 온 이목을 다 집중하는지라 왕도의 소식에 밝지 못합니다. 스콰이어 타이론이 설명을 좀 해주시면 좋겠군요.”

줄리앙의 말에 해럴드 타이론이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왕도에 신문이라는 것이 유행한 뒤로, 잡지라는 재미난 물건이 나왔답니다. 왕도의 명성 높은 기사들이나 마법사들과의 대담(對談)을 따로 기술한 것인데 이게 왕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이 그라두스라는 것인데, 내로라하는 강자들에게 임의로 순위를 매겨 그 힘을 가늠하는 것이지요.”

설명을 듣는 순간 김선혁은 이 그라두스라 불리는 해괴하기 그지없는 서열이 이방인의 작품일 거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라두스가 저쪽 세상의 랭킹과 그 의미가 다르지 않을 거라는 사실 역시 알 수 있었다.

“왕도의 자존심 강한 기사들이 호사가들이 그리 떠들도록 둔단 말입니까?”

“이를 말입니까. 한동안 이 그라두스에 불만을 가진 기사들이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보이겠다고 계속해서 결투를 하는 바람에 왕도가 난리도 아니었답니다. 하지만 거의 반년이 지난 지금은 결투도 뜸해지고 다들 자신의 그라두스에 만족하는 분위깁니다.”

해럴드 타이론은 그라두스는 기사와 마법사를 포함하여 오직 실력이 입증된 100인에게만 주어졌으며 그라두스를 가진 것 자체가 대단히 명예로운 것이라 말했다.

“저의 주인께서는 그라두스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그렇지 않아도 이 유치한 순위 놀이에 부쩍 호기심을 보이는 김선혁의 내심을 짐작한 것인지 줄리앙이 대신 나서서 물었다.

“드레이크 나이트께서는...“

========== 작품 후기 ==========

*되게 오랜만에 연참하는 기분이군요. 껄껄. 글노예는 다시 글 쓰러 가겠습니다. 오늘 한 편 더 추가로 올릴지 자정에 또 올릴지는 모르겠지만, 써지는 족족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찡긋.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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