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첫 외유 -->
시야를 가리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광야(廣野)는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시원한 것이었다. 그렇게 펼쳐진 평원 위로 노을이 지고 별빛이 쏟아질 때면 이따금씩 저도 모르게 감탄을 튀어나왔다.
“아오. 지겨워 죽겠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다. 오늘 보는 평원의 모습이 어제와 다르지 않고, 또 내일 볼 모습이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걸 바라보는 김선혁의 시선은 무디기만 했다.
“지겨워. 지겨워.”
정말이지 이곳 세상에의 여행은 지루하고 재미없고 반복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지겹기만 한가. 새벽이슬이 몸서리치게 서늘한 평원의 야숙은 불편하기까지 한데다 할 일도 더럽게 많았다. 하나에서 열까지 그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끙. 이러다 몸 곯지. 곯아.”
한센과 요나슨도 그와 마찬가지 심정인지 입에 불평을 달고 살았다. 신이 난 건 오직 잭슨과 줄리앙뿐이었다.
“하늘을 보십시오.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헛소리 말고, 그 시간에 가서 땔감이나 주워와.”
매일 보는 밤하늘이 지겹지도 않은지, 잭슨은 야영준비를 할 때면 저 멀리 보이는 노을을 보며 감탄하고는 했다. 그때마다 한센과 요나슨이 메마른 얼굴로 성을 내며 야영 준비나 서두르라며 타박을 해댔다.
타닥. 타닥.
땔감이 모이고 모닥불이 노릇노릇 타오르기 시작하면, 한센이 곧장 저녁 준비를 시작한다. 이런저런 곡물을 빻아 만든 가루를 끓는 물 가득한 솥에 넣고, 여행용으로 준비한 말린 고기를 한웅큼 잡아 솥에 던져 넣는 것으로 요리 같지 않은 요리의 과정도 끝이 난다.
“웩.”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은 정말 죽지 않기 위해 먹는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그런 맛이었다. 그래도 귀족이랍시고 근래 들어 꽤나 건실한 식단을 즐겨왔던 김선혁으로서는 영 입맛이 당기지 않는 형편없는 식사, 나무그릇을 들고 먹는 둥 마는 둥하는 그를 본 한센이 손을 내밀었다.
“영주님. 그거 안 드실 거면, 저 주십쇼.”
“어. 나 이 장면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별안간 김선혁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
“어제 한센이 영주님께서 먹다 남긴 스튜를 남김없이 먹어치웠습니다. 그 전날에도요. 그리고 영주님은 어제 오늘과 똑같은 말씀을 하셨지요.”
줄리앙의 시큰둥한 말에 그가 금세 시무룩해진 얼굴을 해보이고, 한센과 요나슨이 낄낄대며 웃었다. 하지만 이내 그 웃음소리마저 사그라들고 야영지에는 땔감 타는 타닥타닥 소리와 스튜를 들이마시는 한센의 후루룩거리는 소리밖에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변하는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여행길에 어제와 오늘의 구분마저 모호할 지경이었다. 줄리앙의 말마따나 야영지의 풍경은 어제와 다른 것이 조금도 없었다. 모든 게 반복되는 지루한 여행길, 그래서 김선혁은 줄리앙이 이 다음에 할 말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영주님...”
“준비해.”
미리 자리에서 일어나 선수를 치니 그릇을 내려놓은 줄리앙이 미리 점찍어두었던 막대 두 개를 들고 일어났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개중 하나를 넘겨받은 그가 적당히 다리를 벌리고 자세를 취했다. 왕국 표준 검술의 기본 준비 자세였다.
“오늘은 한 대라도 때려라. 줄리앙!”
“영주님 엉덩이를 걷어차 주라고!”
그날 군복을 벗고 영지병으로 새로이 계약을 한 이후, 한센과 요나슨은 사석에서도 그를 영주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 건들거리는 말투까지는 어떻게 하지 못했으니, 이렇게 여흥거리가 시작될 때면 여지없이 타고난 불량스러움이 드러나는 사내들이었다.
“애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은 그가 이내 줄리앙에게 시선을 옮겼다. 막대를 검처럼 양손으로 움켜잡고 오른쪽 가슴 앞에 둔 줄리앙은 그가 대련의 시작을 고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줄리앙이 도움닫기를 하고는 막대를 위에서 아래로 힘차게 내리쳤다. 나무랄 데 없는 머리치기의 동작, 김선혁은 가로로 막대를 들어 머리 위를 막았다.
콱.
막대를 때리는 가벼운 충격에 그가 손목만을 사용하여 그대로 횡 베기를 시전했다. 어린종자가 날다람쥐처럼 날쌘 동작으로 상체를 뒤로 빼고는 다시 막대를 뾰족하게 세우고 찌르듯 달려들었다.
“컥.”
하지만 줄리앙의 공격은 제대로 시도도 해보기 전에 무산되고 말았다. 김선혁이 발을 쭉 내밀어 그녀의 복부를 걷어찬 것이다.
“우우. 비겁하게 발로 차다니.”
“애한테 못하는 짓이 없다!”
사내들이 야유를 했지만, 김선혁과 줄리앙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알지? 싸우는데 정석 없는 거.”
“알고 있습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배를 어루만지던 줄리앙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또 걷어차이고 얻어맞으며 바닥을 굴렀고, 그때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다시 달려들었다.
“와. 이럴 때 보면 우리 영주님 진짜 독해. 애한테 어쩌구저쩌구 하면서도 제일 가혹하잖아?”
요나슨의 말에 김선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자신이 배운 방식이 이런 식이니 종자인 줄리앙에게 가르쳐줄 때도 이런 무식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괜히 검을 정식으로 갈고닦은 것도 아닌 자신의 종자가 된 그녀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이렇게 지도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정작 줄리앙은 그 어느 때보다 생기가 돌았다. 기사를 목표로 하는 그녀이니만큼 이런식으로라도 경험을 다지는 게 몹시 기꺼웠던 탓이리라.
“그럼 저도 부탁드립니다.”
줄리앙과의 지도 대련이 끝이 나니, 잭슨이 나섰다.
‘잭슨 해밀튼, 서자지만 마땅한 후계가 없어 나름대로 귀족으로서 소양을 다진 놈입니다. 만약 영지에서 누군가가 기사가 된다면 그건 잭슨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중에 계승권을 되찾겠다고 하면 골치 아프겠지만, 그때까지는 충분히 써먹으십시오.’
클라크는 잭슨의 가문에 얽힌 비화와 잭슨 스스로가 기사로 성장할 자질이 충분한 이라며, 그에게 잘 이끌어 써보라고 조언을 했었다.
실제로 잭슨의 능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간 다른 이들이 이러한 능력을 제대로 눈치 채지 못한 것은 잭슨 스스로가 창보다는 검에 소질이 있었고, 기마 상태시보다 하마 상태에서 더욱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지라, 기병과는 상관이 없는 쪽으로 능력이 뛰어났던 탓이리라.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줄리앙이나 잭슨이나 동작이 전형적인 교범 검술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차이가 있다면 신체적으로 성숙한 잭슨의 공격이 훨씬 더 날카롭고 위력적이라는 것뿐이었다.
“끄억!”
하지만 그래봐야 김선혁에게는 한주먹 감에 불과했다. 막대를 쥐지 않은 왼손으로 옆구리를 강타당한 잭슨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아직 견습 기사로서의 기본 소양인 검력조차 다루지 못하는 애송이는 레이라크가의 재판관마저 쓰러트린 그의 상대가 아니었다.
[통솔력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지도 대련 역시 통솔력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이렇게 덤으로 수치가 오르는 경우가 있었다.
“좋다. 좋아.”
김선혁은 기분 좋게 웃으며 그날의 지도 대련을 마무리 했다. 뤼겐부르크로 향하는 하루가 또 그렇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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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여행길, 특별한 이벤트가 발생했다.
“그 말하고 가방 두고 썩 꺼져.”
“시키는 대로 하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그야말로 도적의 전형적인 대사라고 할 수 있는 말에 김선혁은 도리어 환호했다.
“고마워! 너희가 아니었으면 지겨워서 돌아버렸을지도 몰라!”
지루한 여행길에 이런 사건이라도 발생하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행 중에 발생한 이 작은 변수는 너무도 금방 정리되었다.
“자, 잘못했습니다. 부디 목숨만은.”
기세등등하게 나섰던 도적떼는 김선혁이 나설 새도 없이 한센과 요나슨에 의해 제압당했다.
“왜! 어째서! 더 못 버틴 거야!”
긴장감 넘치는 상황을 기대했던 김선혁은 미친 사람처럼 화를 냈다.
“어떻게 할까요. 장비를 갖춘 기병들한테 이 정도 수에 무장으로 달려들 정도면 완전 생초짜들 같은데. 마침 오늘 묵을 마을이 제법 규모가 있으니 그쪽에 넘기는 게 좋겠습니다. 운이 좋다면 포상금이라도 받을 수 있겠지요.”
요나슨의 말에 도적떼가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지만, 일행 중 어느 누구도 동정을 표하지 않았다. 한 번 남의 것을 빼앗아본 자는 그 맛을 잊지 못하니 싹을 잘라야 한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어째 남부는 치안이 별로 좋지 않네.”
스물 남짓한 무리의 도적떼와 조우한 것을 시작으로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불온한 무리와 마주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남부 영지 자체는 해상 무역 덕에 꽤나 부유하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척 보기에도 빈민들이 먹고 살겠다고 도적이 된 꼴이었다.
“듣기로는 영지의 부에 상당부분 기여한 상인들이 평민들을 상대로 꽤나 가혹하게 구는 모양입니다. 화려한 항구 도시의 절반이 빈민촌이라니, 앞으로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줄리앙의 말은 사실이었다. 거의 2주에 걸친 시간을 나아가 도달한 뤼겐부르크는 그야말로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도시였다.
화려한 복장을 한 이들 뒤로 종종거리며 따라다니는 복장 허름한 사람들의 눈빛에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이 새끼가, 감히 내 앞을 막아?”
“악! 나으리! 살려주십시오! 미천한 놈이 눈이 어두워 나으리를 앞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습니다요!”
“그래? 그 눈 참 쓸모없군. 어차피 쓸모없는 눈이니 없어도 되겠어.”
미처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대로 한복판에서 빈궁해 보이는 노인의 눈이 파내어졌다. 그런데 주변을 돌아다니는 이들 중 소란을 신경 쓰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담벼락에 등을 기댄 채 창을 꺼떡거리고 있던 병사들조차도 소란을 보지 못한 척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김선혁은 넋을 놓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아무리 귀족이라지만 저렇듯 쉽게 사람을 병신으로 만드는 꼴을 보니 속에서 욕지기가 치밀어오를 지경이었다.
“저들은 귀족이 아닙니다. 아무리 남부의 귀족들이 기질이 드세다고 해도, 저렇게까지 과격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전에 말씀드린 그 상인이란 부류들 중 하나겠지요.”
영주도 아닌 자가 멋대로 영지민을 해하는데 영지의 병사는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는다. 법도 질서도 없는 무법도시, 그게 김선혁이 뤼겐부르크를 보고 느낀 첫인상이었다.
“아무래도 이번만큼은 자작님의 방문을 알리고, 영주에게 편의를 부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줄리앙의 말에 김선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부터 말위에 오른 채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그의 일행을 고깝게 쳐다보는 이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일단 씻고, 옷부터 갈아입자. 별 같잖은 것들이 들러붙기 전에.”
2주에 걸친 여정으로 먼지가 가득 내려앉은 후드를 뒤집어 쓴 꼴이 오해를 사기에 딱 좋았다. 스스로 귀족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도 별로 없었고, 딱히 그 권위를 내세운 적은 없지만 지금만큼은 권위를 어필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저는 그럼 곧장 선원들의 조합으로 향해서 씨 서펜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요나슨이 무리를 떠나고 일행의 수가 줄자 주변의 눈총이 더욱 따가워졌다.
“영주님. 아무래도 귀찮은 놈들이 붙은 것 같습니다.”
“알아.”
행인에게 물어 숙소를 안내받았더니, 행인부터가 좋지 못한 의도를 지닌 자였던 모양이다. 막다른 골목길 앞에서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 사내들 십수 명이 나타나 하나뿐인 길을 막아섰다.
“완전 개판이구만.”
“제가 이래서 혼자 가시는 걸 반대한 겁니다.”
도시에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드러내놓고 활을 겨눈 자들을 본 김선혁의 한숨에 줄리앙이 잔소리를 했다.
“네놈들! 이분이 누구신지 알고!”
“뭐, 누구면 어때. 어차피 죽을 놈들인데.”
미처 제 주인의 정체를 밝히기도 전에, 화살 한 대가 날아들었다.
“아티야.”
‘얍!’
앙증맞은 기합소리와 함께 나타난 아티야가 스텔라를 향해 날아들던 화살의 궤도를 슬쩍 빗겨냈다. 그와 동시에 열댓 명 남짓한 사내들이 날이 심하게 꺾인 해병용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아. 오늘은 진짜 그냥 쉬고 싶었는데.”
앞으로 나서려는 한센을 비롯한 이들을 김선혁이 막았다.
“그래도 할 건 해야겠다.”
기본적인 법도도 없는 무법도시에 도착한 내내 느껴왔던 불쾌감, 그의 분노가 폭발했다.
========== 작품 후기 ==========
*염려해주신 여러 독자분들께 먼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독자분들의 격려에 힘입어 글쟁이 간만에 꿀잠 잤습니다. 체력 어느정도 회복했으니, 다시 연참모드 가동하겠습니다. 목표는 기존의 연재분 만회와 일 2연참 유지입니다. 최소한 요번달 내로는 100편 찍어보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