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첫 외유 -->
으레 영주라는 족속들은 엉덩이가 무거운 법이다. 하지만 김선혁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는 씨 서펜트의 실존을 확인한 즉시 영지를 나설 채비를 했다.
“안 됩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난관이 발목을 붙잡았다. 줄리앙이 수행인원을 두고 영주의 외유를 극렬하게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그녀는 자작이나 되어서 수행인원도 없이 홀로 움직이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며 부득불 그를 만류했는데, 당장 그를 수행할만한 인원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근래 들어 제법 모양새를 갖춘 영지병들은 안타깝게도 기마 훈련을 받지 않아 원행을 따라나설 능력이 되지 않았고, 드레이크 기병대의 기병들은 영지 소속이 아닌 왕국군 서부방면 소속이기에 함부로 개인적 용무에 동행시킬 수가 없었다.
결국 남은 건 영지병들 뿐이었는데, 데리고 가자니 기동력이 떨어져 가뜩이나 먼 거리에 시간만 더 걸릴 뿐이었다.
“그 먼 거리를 혼자 가시다니요. 그러다가 혹시라도 자작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운이긴 하지만 그래도 레이라크의 재판관까지 이겼는데, 설마 내가 오가는 길에 무슨 일이라도 당할까봐? 나 드레이크 나이트야. 왜 이래.”
갑갑한 마음에 허세도 떨어보았지만 줄리앙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길을 모르시지 않으십니까.”
딜레마였다. 혼자 가자니 길을 모르고, 누구를 데려가자니 또 마땅한 이가 없었다.
“차라리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줄리앙이라면 숙련된 기병으로서의 소양도 갖추고 있었고, 이런저런 일에 해박하니 동행으로는 적격이었다.
“안 돼. 영지가 완전히 비잖아.”
이번에는 김선혁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줄리앙이야말로 실질적으로 영지를 운영하는 책임자였던지라 추수철을 앞둔 지금으로서는 그녀를 영지 밖으로 내돌릴 수가 없었다. 물론 그 바쁜 시기를 두고 영주 본인이 자리를 비우는 것도 문제가 있었지만 이는 상징적인 문제였지, 줄리앙의 경우처럼 현실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영지가 잠깐 마비되는 게 자작님을 혼자 보내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줄리앙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진짜 환장하겠네.”
생각 같아서는 지칠 줄 모르는 드레이크를 타고 후딱 다녀오면 좋으련만, 금빛 번쩍이는 거대 괴수는 단순 여행용으로는 지나치게 눈에 띄는 탈것이었다. 자신의 행선지를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닐 게 아닌 이상, 골드레이크와 동행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이렇다 할 해결책을 마련하지도 못한 채 궁리만 거듭되기를 사흘째, 잭슨이 그를 찾아왔다.
“멀리 외유를 나가셔야 하는데, 마땅히 수행할 사람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어디서 이야기를 듣고 온 것인지, 잭슨은 그의 고민을 정확하게 찔러왔다.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마음은 고맙지만, 안 돼. 드레이크 기병대는 서부군 소속이야. 내 개인적인 용무로 그렇게 근무지를 멀리 벗어나게 할 수는 없어.”
그의 말에 잭슨이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다 이내 비장한 얼굴로 입을 뗐다.
“그럼 드레이크 기병대를 나가겠습니다.”
“뭐?”
생각지도 못한 잭슨의 말에 그가 이건 또 뭔 소린가 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전역을 신청하겠다는 말입니다.”
“잭슨.”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 아닙니다. 전부터 생각했었습니다. 제가 있고 싶은 곳이 드레이크 기병대의 그늘인지, 아니면 다른 곳인지.”
아무래도 잭슨은 아예 작정을 하고 말을 꺼낸 모양이었다. 평소의 유순함은 온데간데없는 태도가 단호하기만 했다.
“지난 재판 결투 이후 마음을 결정했습니다. 제가 있고 싶은 건 자작님의 곁입니다.”
누군가의 맹목적인 믿음과 동경이 이렇게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웠던 적이 있었던가. 김선혁은 기병대로서는 거의 최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 드레이크 기병대의 대원 자리마저 버리겠다는 잭슨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은 고맙다. 근데 생각은 조금 더 해보도록 해.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이미 충분히...”
“그래도 가서 더 생각해봐.”
김선혁은 끝까지 버티던 잭슨을 겨우 돌려보냈다. 그런데 그렇게 돌아간 잭슨이 불과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그를 찾았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용기백백한 잭슨의 곁에는 클라크를 비롯한 기존의 기병대원들과 함께였다.
“우리도 데려가.”
그가 자작에 오른 뒤로 늘 공대를 했던 한센이 오늘만큼은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건들거리며 말했다.
“아니, 애가 그런 소리 하면 말려야지. 고참이 되가지고 애한테 넘어가면 어떻게 해요.”
김선혁은 갑작스레 몰려든 기병대원들 탓에 머리까지 아파올 지경이었다.
“굳이 이번 일이 아니었어도, 전역은 생각하고 있었어.”
“믿을 말을 해야 믿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되도 않을 핑계는 대지도 말라고 쏘아붙였더니, 한센이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엠마 말이야. 아직 창창한 나인데 시집도 못 가고 애들 뒤치다꺼리만 하고 있으니, 도저히 더는 두고 못 보겠어.”
“아...”
아무래도 한센과 기병대원들이 전역을 하겠다는 이유 중에는 자신들이 돌보던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도 한몫을 한 모양이었다.
“끄응. 미치겠네.”
엠마와 아이들이 이유라면 덮어놓고 그들의 전역 의사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말문이 막혀 가만히 한센과 기병대원들을 보다 클라크에게 물었다.
“설마 클라크도?”
“아니. 나는 못 나가. 나까지 나가면 우리 중대장님은 어떻게 하라고. 나라도 자리를 지켜야지.”
중대장이야 김선혁이 맡고 있다지만, 실질적으로 기병대 전체를 지휘하는 건 클라크였다.
“나는 전역 때문에 온 게 아니라, 얘들 몇 나간다고 드레이크 기병대 어떻게 안 되니까 그냥 소원 들어주는 셈 치고 전역 시켜주라고, 그 말 하려고 온 거야.”
그나마 클라크 자신이 전역하겠다는 말은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김선혁으로서는 난감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참고로 전역하겠다는 놈들 여기 셋 말고도 많다. 이 절제력 고자 새끼들이 한꺼번에 우루루 나간다고 해서, 겨우 뜯어말렸어. 그나마 그중에 끝까지 못 말릴 것 같은 놈만 추려온 게 이놈들이야.”
그 말이 꼭 지금 안 들어주면 다음에는 기병대 전체를 끌고서라도 오겠다는 말처럼 들려 왠지 무섭기까지 했다.
“끄응. 전역하고 계획은 있어요?”
“무슨 계획?”
“먹고 살 계획이요.”
그의 질문에 이번에는 요나슨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냐는 듯이 되물었다.
“당연히 니가 우릴 고용해야지.”
뻔뻔하기까지 한 그 대답에 김선혁은 황당한 얼굴을 해보였다.
“지금 그게 무슨...”
엠마를 구실로 전역을 한다기에 당연히 군과는 인연을 끊으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단지 서부군 소속을 벗어나겠다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대체 그게 무슨 차인가 싶어 요목조목 따졌더니, 대답이 걸작이었다.
“서부군에 있으면 전쟁 때마다 불려갈 텐데, 영지 소속이면 그냥 급료만 날름해도 되는 거 아냐? 터놓고 말해서 이 볼 거 없는 영지에 뭔 일이 있을라고.”
“지금 그 급료 주는 사람 바로 앞에 있거든요?”
“그게 억울하면 알아서 굴리시든가.”
낄낄대며 대꾸하는 사내들의 모습을 보던 김선혁이 문득 잭슨을 째려보았다. 잭슨도 자신이 시발점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지, 그의 시선에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급료 많이 못 줘요.”
“광산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하면 그때 더 챙겨줘.”
“그리고 사람 없어서 휴가도 많이 못 줘요.”
“외박이나 후하게 줘.”
“저 밖에 볼일 보러 자주 돌아다닐 거예요.”
“그 김에 나들이나 하지.”
하는 말마다 반박을 당했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알았어요. 그럼 마음대로 해요.”
결국 김선혁은 사내들의 고집에 두손 두발 다 들고 말았다.
**
“저도 가겠습니다.”
“줄리앙은 또 왜.”
“종자가 돼서 매번 영지에 남겨지는 것도 못 견딜 일이고, 이번에는 꼭 따라가렵니다.”
이번에는 줄리앙까지 고집을 피웠다. 영지 운영을 빌미삼아 남겨두려고 했더니, 치밀한 줄리앙은 그에 대한 핑계까지 마련한 상태였다.
“어차피 제가 전문적으로 영지 운영을 배운 것도 아니고, 따로 전문가를 들여야 할 시점이었습니다. 전에야 영지 재정도 빈약하고 워낙에 할 게 없으니 제가 했지만, 광산이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한 지금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그게 왜 하필 지금이냐고.”
“빠르냐 늦느냐의 차이지, 큰 차이는 없습니다.”
줄리앙은 이미 적당한 인재를 찾아 편지를 보낸 상태라 했다.
“난 줄리앙이 아니면 못 믿겠는데.”
영지가 아무리 낙후되었다고 하지만, 광산이 굴러가기 시작한 이 시점에서 들어오는 돈은 결코 적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믿을 수 있는 자가 아니면 영지 운영을 맡기기에 영 께름칙했다.
“저를 믿으신다면, 제가 초빙한 전문가도 믿으셔야 합니다.”
대체 누구길래 이리 호언장담을 하나 했더니, 맹스크 영지에서 관료로 봉사하던 노학자를 과거의 인연을 빌어 겨우 초빙해온 것이라 말했다.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맹스크에서 봉사해오면서도 한 번도 사리사욕을 위해 물의를 일으킨 적이 없는 분입니다. 마침 낙향하여 조용한 곳에서 여생을 보내시려던 걸, 제가 라인펄로 초빙한 겁니다.”
줄리앙이 이 정도로 보증을 하고 나서니, 계속해서 제 고집만 피울 수도 없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영지가 무럭무럭 성장하는 지금은 전문적인 경영인이 필요한 시점이었고, 줄리앙은 전문가가 아니었다.
“끙. 알았어. 일단 만나보고 결정하지.”
허락이 떨어지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줄리앙이 말한 노학자를 만나볼 수 있었다.
“명성 높은 드레이크 나이트를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안토인 몽테뉴라고 합니다.”
안토인 몽테뉴는 주름진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맑은 눈을 지닌 노인이었다. 꽉 다물린 입매가 다소 고집스러워 보이기는 했지만, 하얀 수염과 머리가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줄리 아가씨께서 이 늙은이가 필요하다 하시니 일단 달려왔지만, 저 같은 퇴물이 무슨 도움이 될지...”
아가씨라는 말에 김선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니, 줄리앙이 샐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며칠을 곁에 두고 지켜본 안토인 몽테뉴의 능력은 탁월했다. 노학자는 단 이틀만에 라인펄 영지의 실정을 완벽하게 파악했고, 곧장 업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업무 처리 속도가 느긋한 말투와는 어울리지 않게 신속했다. 그간 줄리앙이 잠도 못자고 매달려야 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대단하네. 나이도 자실 만큼 자신 양반이.”
영지 업무를 전혀 모르는 김선혁이 보기에도 안토인 몽테뉴의 실무 능력은 발군이었다. 게다가 며칠 만에 저택 내의 하인들과 병사들마저도 이 노신사의 매너에 대한 소문이 나올 정도였으니, 그로서는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도 없었다.
“허허. 이제야 시험이 끝난 겝니까?”
오전에 모든 업무를 처리하고는 김선혁을 맞이한 안토인 몽테뉴가 웃으며 한 말이다.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합니다. 하지만 줄리앙 외에는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김선혁도 이때만큼은 영주의 권위를 바닥에 내려놓고 연장자에 대한 예우를 보였다. 단 며칠이지만 안토인 몽테뉴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자였다.
“그럼 저는 어떠셨습니까? 믿을 만하다 여겨지셨습니까?”
“네. 줄리앙의 호언장담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의 말에 안토인 몽테뉴가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본인에 대한 칭찬보다는 한 때 모셨던 아가씨에 대한 영주의 신뢰가 기꺼운 기색이 역력했다.
“어지간하면 조용한 곳에서 여생을 보내려 했습니다. 그런데 아가씨께서 생떼를 부리시지 뭡니까. 어린 시절 내내 곁에서 모셨지만 그런 모습은 처음이라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승낙을 했더군요.”
줄리앙이 생떼를 부렸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눈을 꿈벅거리니 안토인 몽테뉴가 껄껄대며 웃었다.
“혹 운이 좋다면 앞으로 몇 번쯤은 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자작님께서 저를 고용해주신다면 말입니다.”
“고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몽테뉴경.”
그가 고개를 숙이며 부탁하자, 안토인 몽테뉴가 늙은 몸을 깊이 숙이며 마주 인사를 해왔다.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영주님.”
**
한센과 요나슨 잭슨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드레이크 기병대의 제복을 벗었다. 비록 뭇 기병들의 선망을 받는 블루 코트는 버렸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한 점 후회도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영주님.”
그들은 새롭게 고용 계약을 맺었고, 그날부로 라인펄 영지의 병사가 되었다.
“이제야 속 편히 떠날 수 있겠네.”
줄리앙을 포함해 숙련된 기병이 넷이다. 왕도의 고위 귀족들처럼 기사를 호위로 대동하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면 시골 영주에게는 과할 정도로 구색이 갖춰진 것이었다.
“가자.”
기병 넷의 호위를 받으며 김선혁은 곧장 뤼겐부르크 영지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체력이 떨어지니 연참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딱 반나절만 푹 자고 일어나서 저녁부터 밀린 연참 분량 만회하도록 하겠습니다. 너른 마음으로 양해 부탁드립니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