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준비된 조교 -->
신병들은 긴장한 탓인지, 제 영주가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부드러운 웃음을 보고 막연히 짐작했을 뿐이다. 개중에 눈치가 유독 없는 몇이 영주를 따라 웃었다.
“입 다물라고. 영주 말이 우스워? 전부 영주 모독죄 적용해줄까?”
말투는 부드러운데, 정작 내용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신병 나부랭이들이 빠져가지고는. 차렷. 차렷을 몰라? 손 허벅지 위, 다리 모아서 허리 펴. 그래. 차렷. 그래. 그대로 움직이지 마.”
영주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독사의 그것처럼 살벌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 섬뜩한 눈초리에 얼어버린 신병들은 눈만 데굴데굴 굴려댔다.
“거기 너. 이름이 뭐지?”
“아, 아돌입니다.”
지목당한 신병, 아돌이 굳은 얼굴로 대답하자 영주가 다시 한 번 소름돋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좋아. 아돌. 넌 앞으로 1번, 훈련병이다. 그리고 네가 2번. 네가 3번. 순서대로 자기 번호 파악해둬. 앞으로 그게 너희들의 이름이 될 테니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영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신병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영주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래. 너 이름이 뭐라고?”
“아돌입...”
방금 전과 똑같이 대답하던 아돌이라는 훈련병이 영주의 표정이 험악해지는 것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1번 훈련병...”
“그래도 눈치는 있는 놈이었네. 좋아. 마음에 들었어. 앞으로 네가 1분대의 분대장이다.”
순식간에 흘러간 대화, 신병들은 뭔지는 몰라도 대장이라는 말에 눈이 번뜩 뜨였다. 그들은 똑같이 입대한 아돌의 갑작스러운 출세(?)에 부러워하면서도 기대하는 눈치가 되었다.
“내 목소리가 크다 생각하는 놈, 앞으로 나와.”
영주를 만난 이래 예상대로 흘러가는 게 하나도 없었다. 종잡을 수 없는 영주의 말에 신병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중에 하나, 눈치가 제법 빠릿빠릿해 보이는 훈련병 하나가 앞으로 튀어 나왔다.
“제가 목소리가 큰 편입니다!”
제 말을 증명해보이기라도 하듯, 앞으로 나선 훈련병이 고래고래 악을 쓰듯 말했다.
“넌 몇 번이지?”
“11번 훈련병입니다!”
“오. 마침 번호도 딱 좋군. 앞으로 네가 2분대장이다.”
순식간에 두 명의 신병이 분대장이라는 직책을 받고 승진(?)했다. 남은 훈련병들은 혹시나 또 다른 기회가 있을까 해서 영주의 말에 귀를 기울였지만, 아쉽게도 20명 중에 분대장이라는 건 단 둘뿐이었던 모양이다.
“1분대장이 10번까지. 2분대장이 20번까지 책임지고 맡도록 해. 앞으로 전달할 사항이 있으면 두 분대장을 통해 하겠다.”
훈련병들 사이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간발의 차이로 놓친 출세의 기회에 안타까움을 느낀 것이다.
“좋아. 분대장들이 훈련병들 인솔해서 저택으로 가도록. 거기서 스콰이어(견습기사) 줄리앙을 찾아라. 각자 몸에 맞는 옷을 줄 테니까. 그리고 그 허접쓰레기 같은 창은 치우도록 해. 대체 그런 이상한 꼬챙이를 어디서 가져온 거야.”
“고향 목수에게 부탁해서 만들어 왔습니다. 필요할 거 같아서...”
“쓸데없는 짓을 했군. 너희들이 앞으로 사용할 장비는 전부 내가 책임진다. 그러니 이상한 거 주워 오지 마. 거기 그 냄비 뚜껑 같은 그런 거 버리라고.”
영주의 말을 들은 신병들은 금세 헤벌쭉 웃었다. 번쩍이는 갑옷에 칼과 방패를 두른 자신들의 모습을 상상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상상은 그저 덧없는 망상에 불과했으니, 저택에서 지급받은 옷은 영주의 병사가 입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고 허름했다.
아니. 비단 상상과 달랐던 것은 지급받은 옷뿐이 아니었다. 출세라고 생각했던 분대장의 자리가 사실 귀찮고 험한 직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끄악!”
“똑바로 안 해? 그렇게 할 거면 왜 분대장 달고 있어!”
“그게 영주님께서...”
“그럼 지금 내탓이라는 건가.”
다른 훈련병이 잘못해도 깨진다. 본인이 잘못해도 깨진다. 하루에도 최소 스무 번 서른 번씩은 깨진다. 그게 분대장의 자리였다. 그들은 자신이 분대장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뒤늦게 안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신병들이 편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들은 제식 훈련이라는 명목하에 손짓 하나, 발짓 하나까지 새롭게 배워야 했고, 그 과정에서 영주라는 자가 얼마나 악마 같은 자인지를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
“충성!”
“쉬어.”
그렇게 걷는 법부터 시작해서 말하는 법까지 혹독하게 습득한 신병들은 근 2주의 시간이 지나자 거수경례라는 생소한 인사법에 익숙할 정도가 되었다.
“이제 겨우 걸음마는 뗐네.”
날카로운 눈으로 신병들을 둘러보던 영주가 그제서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내보였다.
**
줄리앙은 차라리 유명한 용병대를 고용하는 것이 영지병을 직접 육성하는 것보다 싸게 먹힐 거라 말했다. 하지만 김선혁은 그녀의 권유를 거절했고 직접 병사들을 육성하는 번거로움을 택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름대로 저쪽 세상에서 얻은 노하우와 이쪽 세상에서 각종 훈련을 통해 습득한 경험을 지금이 아니면 쓸 일이 없다 생각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개인 훈련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조금은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신병들을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얻는 재미가 상당했던 탓이다.
“뛰어! 발보이지! 빨리 안 뛰어?”
자신의 말에 혼비백산해서 발을 놀리는 훈련병들을 보는 것은 고된 훈련에 지친 그에게는 활력소 그 자체였다. 이렇게도 굴려보고 저렇게도 굴려보고, 그게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조교 체질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문득 문득 들었을 정도였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는 법이라 했다. 지금 그는 명백하게 신병 교육을 즐기고 있었고, 과연 그 말대로 효과는 탁월했다.
불과 2주가 지나지 않아 아무 것도 모르던 신병들이 제법 병사 태가 나기 시작했고, 한 달이 지나자 어지간해서는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는 군기가 섰다. 그때부터가 진짜 훈련의 시작이었다.
김선혁은 지휘관 훈련을 이수하며 배웠던 온갖 체력 단련법과 기초 무기술을 병사들에게 훈련시켰다. 그 강도 높은 훈련에 날이 갈수록 병사들의 눈가가 퀭해졌지만, 반대로 몸은 보기 좋게 균형이 잡혀가고 있었다.
“이쯤에서 기병대의 대원들에게 교육을 맡기시는 건 어떻습니까. 직접 영지를 지킬 병사들을 육성하시는 마음이 기꺼운 것이야 당연하지만, 그래도 너무 시간을 빼앗기시는 게 아닌지...”
그가 한창 교육에 재미를 느끼고 있을 때, 줄리앙이 넌지시 조언했다. 개인적인 훈련 시간을 빼앗겨가면서까지 기사도 아닌 일반병을 훈련시킬 가치가 있냐는 어조였다.
“아직은 아니야.”
하지만 김선혁은 그녀의 권유에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그가 영지병들을 훈련시키는 재미에 빠져 자신의 수련을 등한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도 나름대로 얻는 것이 있었다.
[통솔력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처음에는 기본만 잡아두고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려던 훈련병을 그가 거의 한달이 지나가도록 붙잡고 있었던 이유가 바로 통솔력 수치의 상승이었다.
[통솔력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분대 지휘 스킬 스킬의 등급이 상승했습니다.]
[분대 지휘 스킬(하급)이 분대 지휘 스킬(중급)이 되었습니다.]
[소규모 부대를 지휘시 병사들이 조금 더 의욕적으로 명령을 수행하게 됩니다. 병사들이 대열을 유지하고 전투를 수행하는 능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신병들을 굴리면 굴릴수록 통솔력의 성장이 빨라졌다. 게다가 오늘은 덤으로 분대 지휘 스킬의 등급까지 올라갔다. 이런 좋은 훈련을 당장 그만 둘 이유가 없었다.
김선혁은 이제는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헉헉대는 병사들을 보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제 딴에는 병사들 덕에 스킬이 오른 게 뿌듯해 지은 웃음이었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영락없이 남 괴롭히기 좋아하는 영주가 병사들의 고난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이들이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따위는 전혀 안중에도 없었으니, 병사들을 굴리며 하루하루를 알차게 살아가는 데에만 의의를 두었다.
김선혁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영지병의 훈련은 이곳 세상의 그것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거수경례라는 처음 보는 인사법부터 시작해서 분대장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직급까지 생소한 것들 투성이었다. 그중에서도 그의 훈련이 남달랐던 점은 병과의 구분이 모호했다는 점이었다.
이곳 세상의 병사들은 각기 적성에 맞춰, 또는 사정에 맞춰 검이나 창, 또는 방패를 지급받아 한 개 병과의 훈련만을 받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떤 날은 검을 가르치고, 어떤 날은 창을 가르치는 등 무기를 가리지 않고 훈련을 시켰다.
그 결과 두어달이 지났을 때 병사들은 어설프게나마 검과 창, 방패를 다룰 수 있게 되었고, 심지어 투창과 단검 투척술까지 몸에 익히게 되었다.
그야말로 전천후 병사들이 된 것이다. 당연하게도 병사들의 무장은 자신들이 익힌 무기술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해졌다. 투척용 단검 4자루와 60센티 가량의 투척용 단창 하나, 거기에 칼과 방패까지. 무장만 보면 병사들은 당장 전쟁터의 어디에 던져 놓아도 어색함이 없을 듯한 모습이었다.
칼같이 자세를 잡고 늘어선 병사를 보며 김선혁이 몹시도 만족스러운 얼굴을 해보였다.
“크. 가성비 좋아.”
저렇게 요란하게 무장을 시켜도 어지간한 보병들보다 비용이 저렴하게 들었다. 단가 낮은 싸구려 날붙이에 철제 갑옷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저렴한 가죽제 갑옷, 그 위로 드라흔 가문을 상징하는 포효하는 금빛 드레이크가 새겨진 튜닉을 입히고 나니 그 모습이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병사들도 자신들에게 지급된 제복과 무장이 썩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닌지, 달마다 주어지는 2박 3일의 정기 휴가를 갈 때면 꼭 저렇게 복장을 하고 나간다는 소문이 있었다.
훈련병 시절부터 지급되던 정규군 수준의 급여, 강도 높은 훈련과 보기 그럴 듯한 복장까지, 병사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영지병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껴가고 있었다.
하지만 김선혁은 만족하지 않았다. 검으로는 검병을 이길 수 없고, 창으로는 창병을 이길 수 없다. 방패의 사용도 아직은 미숙하기만 한 병사들은 만능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했다.
“더! 더! 더 굴려주마!”
이제는 꿈마저 병사들을 굴리는 꿈을 꾸게 된 김선혁의 잠꼬대, 그를 시중드는 하인들은 자신들이 병사로 지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시간은 쏜살같았다.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라인펄 영지는 많은 면에서 전과 달라졌다. 먼저 개발 중이던 광산이 채광 작업을 시작하며 팍팍하던 자금에 여유가 생겼다. 화장실을 만들며 확보한 퇴비가 효과를 보아 그 논밭에 가득한 작물들은 그 줄기와 잎이 남달랐다. 모르긴 몰라도 추수철이 되면 꽤나 수확량이 늘어날 것 같다는 게 줄리앙의 예상이었다.
영지 운영에 한결 여유가 생긴 김선혁은 2개 분대 규모의 신병을 더 모집했다. 그 덕분에 그간 밤낮이 멀다하고 영지를 순찰하던 드레이크 기병대원들이 영지의 치안 업무에서 해방되었다. 그들은 주기적으로 수행하는 장거리 순찰을 제외하고는 영지 내에서 자신들의 중대장과 기동 훈련을 하며 시간을 보내었다.
그렇게 영지에 작고 큰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씨 서펜트의 소식을 찾아 왕국의 남부 해안가로 향했던 전령이 돌아왔다.
“그래. 씨 서펜트라는 놈이 실제로 있다든가?”
기대 가득한 얼굴로 물으니, 전령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뤼겐부르크의 선원들 중에 당시의 사고를 기억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입모아 악마와 마주했다 말했고, 정황을 따져보았을 때 그 악마가 영주님께서 찾으시던 씨 서펜트일 가능성이 몹시 높습니다.”
“오오. 딕슨이라는 자의 말이 정말이었군.”
김선혁은 환호했다. 당장 씨 서펜트가 정말로 용의 아종일지는 둘째 치고, 소식 없는 다른 아룡들에 대한 연락을 기다리느라 지친 마음에 활력이 솟아난 것만큼은 사실이었던 탓이다.
“다만 문제가 조금 있습니다.”
기뻐하는 그를 보며 망설이는 전령, 한 발 앞서 보고를 받은 줄리앙이 대신 나서서 상황을 정리해주었다.
“씨 서펜트로 추정되는 몬스터는 근 몇 년간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말은 설령 씨 서펜트의 존재가 사실이라고 한들, 드넓은 망망대해에서 찾을 길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 정도야 마지막 사고를 토대로 뒤져보다 보면 답이 나오지 않겠어?”
“만약 자작님을 태워줄 배가 있다면 말입니다.”
씨 서펜트의 정보를 찾았다고 좋아했던 것이 무색하게 이런저런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일단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봐야겠어.”
========== 작품 후기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과 코멘트로 지친 글쟁이에게 새로운 활력을 주소서.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