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몬스터 사냥꾼 -->
“서펜트?”
애초에 줄리앙의 반대를 무릅쓰고 몬스터 사냥꾼들을 불러 모을 생각을 한 건 스스로가 몬스터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김선혁이 서펜트가 뭔지 알 리가 없었다.
“씨 서펜트. 해룡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몬스텁니다. 이놈만 떴다 하면 출항한 배들 중 한 두 척은 무조건 침몰한다고 봐야 합죠. 다른 말로는 바다의 재앙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그가 관심을 보이자 딕슨이 필사적으로 아는 바를 늘어놓았다.
“해룡이라 불릴 정도의 놈이라면 내가 찾던 놈이 맞아.”
그의 대답에 꺼멓게 죽어있던 딕슨의 얼굴에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근데 사기꾼이 한 말이라 영 미덥지가 않네. 네놈이 가짜 일각수의 뿔을 팔아먹었던 것처럼 나한테도 똑같은 짓을 할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하지만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아는 법이다. 김선혁은 사기꾼의 말을 신뢰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이, 이번에는 정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아무리 필사적으로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외쳐봐야, 없던 신뢰가 갑작스레 생겨날 리가 없었다.
“근데 왜 하필 지금이냐고. 전에 말했다면 차라리 믿는 시늉이라도 했을 텐데.”
“그, 그게... 제가 직접 본 게 아니라 남부 쪽을 돌아다니다가 선원들이 하는 말을 엿들었을 뿐이라,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았습니다요. 정 의심이 가시면 사람을 보내 확인해보십시오. 제 말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저리 호언장담을 하니 한 번쯤은 미친 척하고 믿어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게 남부 어딘데?”
“남부의 뤼겐부르크라는 곳입지요. 당시에 출항했던 배들 중 여러 척이 씨 서펜트에게 당해 침몰했다니, 분명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왕도로 향하는 몇몇 길목을 제외하고는 도로가 제대로 다져진 곳이 없어 오가는 인편을 수배하기란 쉽지 않았다. 비용도 많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덜컥 사기꾼의 말만 믿고서 감수하기에는 그 수고가 너무도 컸다.
“만약 제 말이 거짓이라면, 저를 죽이셔도 좋습니다.”
그때 그의 고민을 알아차린 것인지 딕슨이 쐐기를 박는답시고 나서서 말했다. 제 딴에는 비장하게 한 말이라지만, 그로서는 코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일단 확인해볼 가치는 있겠어.”
하지만 마음이 기운 것만큼은 사실이라 그는 몇 가지 더 확인을 해보고는 줄리앙에게 말해 따로 확인할 사람을 보내기로 했다.
“다시 광산으로 보내.”
“어, 어째서! 정말 거짓말이 아닙니다! 믿어주십시오.”
억울한 얼굴로 필사적으로 애원하는 딕슨을 보며 그가 차갑게 말했다.
“진짜든 아니든 네놈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친 범죄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저는 이 영지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고요!”
아무리 외쳐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는 애시당초 딕슨을 풀어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평생 어둡고 좁은 땅굴을 전전하며 죗값을 치러라. 그게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보수다.”
“부디 한 번만! 평생 착하게 살겠...”
그는 무심하게 손을 흔들었고, 딕슨은 우악스러운 사내들의 손에 이끌려 다시 광산으로 보내졌다.
“흠. 씨 서펜트라.”
정말로 씨 서펜트가 용의 아종일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해룡이라는 이름에 기대를 걸 뿐이었다.
“근데 씨 서펜트를 찾으시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야 당연히 잡아와야...”
줄리앙의 질문에 생각 없이 대답하던 그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해룡이라는 놈을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떠나서 운반은 어떻게 할 것이며, 또 가져온다 한들 어디에 두실 겁니까?”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그가 한참을 고민하다 피식 웃어버렸다.
“그런 고민은 그때 가서 하지. 사실 저놈의 말이 사실일지 아닐지도 모르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속 편한 그의 대답에 줄리앙이 입을 오물거리다 도로 다물었다. 제 주인의 말마따나 벌써부터 고민할 필요는 없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럼 최대한 빨리 인편을 구해서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줄리앙만 믿을게.”
그렇게 말하고 나니 줄리앙의 얼굴이 영 말이 아니었다. 하기야 어린 나이에 영지의 대소사를 거의 홀로 도맡다시피 했으니 피곤하지 않은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장 영지에 인재가 없었던지라 다른 대안이 없었다.
“혼자 수고하느라 힘들 거야. 도움이 못 돼서 영 미안하네.”
미안한 속내를 슬쩍 내비추자 줄리앙이 고개를 저었다.
“자작님께서 강해진다는 건 곧 영지의 위상이 올라가고 다른 영주들이 함부로 이곳을 넘보지 못하게 된다는 뜻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자잘한 일은 저에게 맡기시고 부디 염원을 이루시는 것만 생각하시기를.”
김선혁은 얼마 전부터 영지의 운영과 발전에 대한 욕심과 의욕이 많이 꺾인 상태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지의 발달에 대한 의욕이 꺾인 뒤부터 개인의 성장과 발달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이 아인스트 제네거에게 대소환의 역사를 듣고 난 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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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을 지켜드릴 테니, 이전의 대소환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해주시겠습니까?”
김선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인스트 제네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드라흔 자작님...”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어떤 사람들이 다녀갔고,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만이라도 알고 싶을 뿐입니다.”
그는 머리를 깊이 숙이며 부탁했다.
“후우...”
망설이던 아인스트 제네거가 이야기를 시작한 건 한참이나 더 시간이 흐른 후였다.
“반드시 비밀 지켜주셔야 합니다.”
“이를 말입니까. 죽을 때까지 무덤에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절대로 다른 곳에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진지한 어투로 몇 번이나 거듭 비밀을 엄수할 것을 강조했고, 그렇게 하고 나서야 입을 꽉 다물고 있던 조사관이 겨우 입을 열었다.
“대소환이 정확하게 몇 번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대소환의 징조를 사전에 알아차리고 유도진(誘導陳)을 설치하여 한 곳에 이방인을 모으게 된 것도 바로 전대의 대소환부터가 처음이었으니까요.”
아인스트 제네거는 이전의 대소환은 최근에 일어난 대소환과 완전히 그 모습이 달랐다고 했다.
“지금의 대소환이 처음부터 이방인들을 한 자리에 모아 각성을 유도했다면, 과거의 대소환은 그야말로 중구난방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은 대륙 곳곳에 산발적으로 떨어졌고, 그나마도 본인 스스로가 각성하여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 도대체 얼마나 되는 이방인이 떨어진 것인지 알 길이 없었던 게지요.”
그 바람에 정확한 기록이 남지 않아 드물게나마 발견하는 자료에서조차 세세한 내용을 알 수 없노라 말했다.
“그럼 바로 이전에 일어난 대소환이 언젭니까?”
“기록상으로는 약 200년 전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에 아덴버그에 떨어진 이방인의 수는 70을 넘지 않았습니다. 왕실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에도 이방인들을 전부 받아들였고, 그들로 인해 당시 융성했던 귀족들의 세를 꺾고 지금과 같은 위엄을 얻을 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중에 이름이 알려지거나, 큰 업적을 남긴 이가 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이방인 개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저 굵직한 줄기정도나 남아있는 정도지요.”
아무래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이방인에 대한 기록을 지우거나 누락시킨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필시 뛰어난 능력을 가졌었을 게 분명한 상급 병과의 이방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지금처럼 전무할 리가 없었다.
“바로 전대의 이방인들이 왕가의 편에 서서 귀족들과 싸웠다면, 지금 왕가가 보이는 호의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의심하는 이들은 없지만, 아무래도 사특한 무리들은 늘 존재해왔던지라...”
김선혁은 그보다 더 이전의 대소환에 대해 물었다. 아인스트 제네거는 망설였지만, 이미 이야기를 꺼낸 마당에 더 이상 숨길 것도 없다 생각한 것인지 이방인들이 일으킨 난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들이 만든 문물로 인해 이곳 세상의 질서가 송두리째 무너질 뻔 했던 적이 있노라 말했다.
“기록은 그 당시를 가리켜 ‘기사의 긍지가 땅에 떨어지고, 마법사의 지혜가 눈 멀었던 시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역사를 보면 그때를 기준으로 하여 검력에 능통한 기사들과 가문이 상당수 몰락하고 마법사들의 수가 현저하게 줄어든 것도 사실입니다.”
크건 작건 전투가 일어나면 늘 선봉에 섰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어지간하면 분쟁에 끼어들지 않는 것도 검과 마법의 힘이 쇠퇴했던 당시의 암흑기를 기억하기 때문이라 말했다.
“이상하군요. 기사들이나 마법사처럼 대단한 이들이 그토록 많았다면, 어째서 이방인들의 난이 큰 소란이 되었을까요. 애시당초 이방인 몇을 앞세운다고 해서 만회되기에는 힘의 차이가 너무 극명하지 않습니까?”
이방인들의 수는 적고 마법사들과 기사들의 수는 더 많았던 시절, 고작 이방인들의 난 따위에 그 많던 초인들이 희생되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 점을 지적하니 아인스트 제네거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가설을 늘어놓았다.
“이방인들이 이끄는 군대는 강력한 기사단과 마법사단에 전혀 뒤지지 않는 힘을 보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해서 저는 당시의 이방인들이 지금의 이방인들보다 조금 더 특별하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아니, 어쩌면 왕국 내부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났을 수도 있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많은 인재들이 희생되었을 리 없습니다.”
강력한 초인들의 군대에게 뒤지지 않는 힘을 지니고도 결국 무너지고 지워진 것은 이방인들이었다. 그는 새삼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지닌 초월적인 힘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 뒤로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지만, 결국 밝혀진 건 그다지 없었다. 이방인들에 대한 기록은 누군가에 의해 철저하게 지워지다시피 했고, 그가 기대했던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뒤에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있던 김선혁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이야기를 꺼냈다.
“예전에야 시간도 오래되었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니 그렇다 치지만, 200년 전의 대소환에서 소환된 이방인들은 대체 어디로 간 겁니까?”
가장 의문스러운 점이 바로 그 점이었다. 왕가를 도와 왕권을 확립시켰다면, 개중에 한 둘 쯤은 공신으로서 받은 권세를 지금까지 이어왔을 법도 했다.
이름은 남아있지 않더라도 작은 흔적은 남아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불과 200년 전에 일어난 일인데 이방인들에 대한 종적은 묘연하기만 했다. 마치 그들이 한꺼번에 사라지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기록이 없으니 저도 감히 추측조차 할 엄두가 나지 않는군요.”
“혹시 말입니다.”
넌지시 운을 띄우는 김선혁의 얼굴이 복잡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이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갔을 가능성은 없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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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인스트 제네거와의 대화를 통해 김선혁은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국왕이 총애하고 앞날을 기대하는 이방인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실이 정말로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어느 정도 이상으로 세력이 자라는 것을 왕실은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구실을 만들어 작위를 몰수하고 영지를 돌려달라 말할지도 몰랐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는 당장 영지를 키우는 것보다 개인의 무력을 성장시키는데 주력하기로 다짐했다. 영지는 빼앗아갈 수 있지만, 용기병의 힘은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나중 일은 모른다고 해도 당장 영지의 치안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개인의 무력이야 이미 어지간한 기사들 이상으로 성장했다고 하지만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었고, 넓은 영지를 혼자 지킬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드레이크 기병대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자니, 기병대의 부재시에 영지가 텅 비어버리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는 영지민들 중 품행이 단정하고 체력이 좋은 자를 선별하여 20명 정도를 시범적으로 영지병으로 모집했다.
“반갑다.”
아직은 장비랄 것도 없이 기다란 창 하나가 무장의 전부인 병사들이 영주를 보며 수군거렸다. 김선혁은 오합지졸과도 같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누가 이빨 보이래."
========== 작품 후기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좀 자고 자정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꾸벅.
*추천과 코멘트는 언제나 사랑입니다. 찡긋.
*용량에 관한 댓글들이 요즘 보여서 변명을 하자면, 지금으로서는 2편 분량을 쓰면 압축하고 삭제해서 한 편을 겨우 남기고 있습니다. ㅜㅜ
압축하지 않고 군더더기를 쳐내지 않고 그냥 연재하면 하루 5편이라고 어렵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해봐야 포장만 거창한 질소과자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한 편당 한 개의 재미요소는 넣자는 철칙으로, 평균 6천자, 많게는 8천자 가까이를 넣어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드래곤 푸어의 권당 옹량은 평균적인 이북 한권 분량인 12.5만자에서 13만자을 한참 넘은 15만자에 가까운 분량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이 짧게 느껴지신다면, 기분 탓이라고 생각해주세요. ㅜㅜ